미로 안의 릴리
김선재
릴리 나는 지나간다 꽃을 거스르는 심정으로 갈색 붉은 양말을 신고 나침반이 달린 시계와 시계가 달린 나침반 사이를 지나 순서도 모르고 차례도 없이 너머를 넘어 돌아간다 울지 않는 나무와 말하지 않는 새에게 전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주어를 잃어버린 어미처럼
어미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을 잃은 릴리, 우리는 어느새 단순히, 단순하게 떠오르는 이름들의 후렴구를 닮아 있구나 한 발짝 다가서면 그만큼 물러나는 길 위에서 꽃잎을 헤치며 걷는 심정으로 몸에 그어진 붉은 밑줄을 숨기고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밑줄을 숨기고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건너뛰는 심정으로 새도 아닌데 꽃도 아닌데
서로의 눈 속에서 겨우 빛나는 인사들
서로의 눈 속에서 다만 사라진 안부들
없는 마음으로도 산단다 릴리, 슬픔 뒤에는 막다른 길 막다른 길을 돌아 막 다다른 내일은 다시 멀어지는 미래 손바닥 위의 모래가 날아오른다 원을 그리며 핵심을 벗어나 모래처럼 미래로 먼저 가 닿는 소리들 검불같이 바스락거리는 이름들
지느러미를 잘라버린 가지의 눈처럼
더듬이를 잃어버린 곤충의 심장처럼
바늘 없는 시계 속 흐린 시계 속으로 달려가는 미완성의 문장들 우리는 후렴구만으로도 살 수 있다 끝없이 끝을 이어가며 끝을 향해 끝을 모르고 속삭이며
녹색 바람을 부른다 녹색 바람이 부른다 맥락 없이 두서없이
릴리, 릴리아나 루릴리
울음을 참는 나무에서 오독을 슬퍼하는 꽃을 지나 울음을 잃어버린 새에게로
릴리, 릴리아나 루릴리
—《시인수첩》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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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 1971년 통영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실천문학》에 소설, 2007년《현대문학》에 시로 등단.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시집 『얼룩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