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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판단(形勢判斷)
형세의 유리하고 불리한 정도를 판단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形 : 모양 형(彡/4)
勢 : 형세 세(力/11)
判 : 판가름할 판(刀/5)
斷 : 끊을 단(斤/14)
형세판단 능력은 경영자의 최고 덕목이다. 형세판단이 느린 경영자는 죄악에 가깝다. '대마 잡고 바둑 진다'라는 말이 있다. 작은 면에 치우치지 말고 대세관을 가져야 한다.
초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 항량(項梁)은 진시황 사후에 조카 항우와 함께 반진기의를 일으켰다. 진승(陳勝)이 사망하자 항연은 제후들을 설읍(薛邑)으로 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이 회의에 등장한 범증(范增)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 양을 치던 초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회왕으로 옹립했다. 회왕은 허수아비였으나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항량이 살아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항량이 전사하자 반진군의 전선이 궤멸됐다. 팽성에 주둔하던 유방은 재빨리 항우와 연합했다. 회왕은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宋義)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다. 초의 병권은 회왕이 신임하는 송의에게 넘어갔다. 항우와 회왕의 사이가 벌어졌다.
회왕은 누구든지 먼저 진의 본거지인 관중을 점령하면 왕으로 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몰래 유방을 후원했다. 진의 주력과 싸우던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이 됐지만, 진의 명장 장감(章邯)과 싸우느라고 관중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동안 유방이 관중을 점령하고 진왕을 생포했다.
간신히 장감을 격파하고 항복한 진군 20만명을 생매장한 항우가 함곡관을 공격했다.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홍문(鴻門)으로 항우를 찾아갔다. 범증이 홍문연(鴻門宴)에서 유방을 죽이라고 건의했지만, 오만해진 항우는 유방을 살려줬다. 항우는 항복한 진왕을 죽이고, 아방궁에 불을 질렀다. 유방은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우는 인심을 잃었다.
고대 전적이 사라진 것은 진시황의 분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항우가 아방궁을 태웠기 때문이다. 항우는 관중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부귀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항우에게 원숭이가 관을 쓴 꼴이라고 비판한 사람은 솥에 삶기고 말았다.
항우는 관중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회왕에게 의견을 물었다. 항우를 견제하려는 회왕은 약속대로 유방이 관중왕이 돼야 한다고 대답했다. 항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회왕은 우리 항씨가 옹립했다. 그가 무슨 공을 세웠는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그는 제후들의 약정을 확정할 수가 없다.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과 나 항우일 뿐이다."
항우는 서초패왕으로 자칭하고, 회왕을 의제로 추존했다. 유방은 오지인 한중(漢中)으로 들어가 한왕이 됐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진의 항장 장감을 옹왕(雍王),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 동예(董翳)를 적왕(翟王)으로 삼아 한중을 포위했다.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항우는 마침내 영포(英布)를 시켜 의제를 죽였다. 항우는 정치적 우세를 상실했다. 항우가 지지세력을 잃어가는 동안 유방은 철저히 약자동맹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동공(董公)이 유방을 찾아와 의제를 위해 상복을 입으라고 건의했다.
그렇다면 유방이 의제에 대한 군신간의 정의(情誼)가 있었던 것일까?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을 왕으로 삼자는 약정을 끌어낸 것도 의제였으며, 항우를 송의에게 붙여 북쪽으로 가게하고 유방은 서쪽을 보낸 것도 의제였다. 그러나 유방은 관중을 차지하자마자, '나와 제후들과의 약속'을 거론하면서 회왕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항우와 중원쟁탈전을 앞두고 갑자기 항우에게 피살된 의제를 위해 3일이나 곡을 한 것은 출병의 명분을 세우고 항우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다. 그는 의제의 상을 치루고 항우 토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정치적 감각을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각축전이 벌어지면 누구도 적으로 돌릴 수 없다. 과반수도 획득하지 못한 사람도 대통령이 되는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 형세판단(形勢判斷)
동진(東晉)은 사마씨와 낭야왕씨의 연합정권이었다. 야심가 왕돈(王敦)의 난을 평정한 공은 대부분 세가대족 출신이 차지했다. 호군장군 유량(庾亮)은 외척으로 친위대를 장악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실질적인 공을 세운 강남세족과 서족(庶族)들은 불만이 컸다.
소준(蘇峻), 조약(祖約), 도간(陶侃) 등이 그들이다. 소준은 산동의 서족 출신으로 건국 초기에 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어 남쪽으로 이주했다. 왕돈의 반란이 일어나자 사태를 관망하다가 반군이 수도를 공격하자 적을 대파했다. 소준은 1만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강북에 주둔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유량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실과 번진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소준과 유량의 갈등이 심화됐다.
유량이 소준의 병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왕도(王導)와 변호(卞壺)가 반대했다. 유량은 말을 듣지 않았다. 소준이 병권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유량은 소준을 대사농과 산기상시로 임명해 조정으로 소환했다. 소준은 중원회복을 구실로 거절했다. 밀당이 계속되자 소준은 드디어 조약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명장 조적(祖逖)의 아우였던 조약은 왕돈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오등후(五等侯)에 봉해졌으며, 수양(壽陽)에서 북변을 지키고 있었다. 명문의 후예를 자부하던 그는 자신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강남세가 출신 도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온교(溫嶠)와 치감(絺鑑)이 수도방어를 자청했으나, 유량은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거절했다.
그러나 소준과 도간을 동시에 대적하느라고 병력이 양분되자 동진군은 연전연패했다. 며칠 후 소준이 건강에 육박했다. 유량은 심양으로 도주하고, 황제와 태후는 건강에 남았다. 반군은 수도에 불을 지르고 궁궐까지 침범했다. 소준과 조약이 정권을 장악했다. 유량 일족은 참살됐다. 유량은 심양에서 온교와 함께 도간을 맹주로 삼아 소준 토벌군을 일으켰다.
도연명의 조상인 도간은 소준이 아들 도첨(陶瞻)을 죽이자 유량과 연합했다. 이 소준에게 피살되자, 온교는 도간에게 함께 소준을 공격하자고 설득했다. 연합군이 건강의 석두성을 압박했다. 몇 달 동안 대치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소준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석두성을 수비하면서 황제를 인질로 삼았다. 소준은 부하들을 각지로 파견해 약탈을 자행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온교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관망하던 도간이 움직였다. 그는 참모 은선(殷羨)의 건의에 따라 수군을 이용해 석두성을 공격했다. 유량과 온교도 호응했다. 소준은 8천명의 병력을 아들 소석(蘇碩)과 부장 광효(匡孝)에게 나눠주고 적을 격파했다. 그러니 기고만장했던 그는 적을 추격하다가 낙마하고 말았다.
도간의 아문장 팽세(彭世)와 이천(李千)이 재빨리 그의 목을 잘랐다. 삼군이 일제히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자 소준의 잔여병력은 석두성으로 도망쳤다. 일세의 영웅은 공연한 호기로 그렇게 허무하게 전사했다. 소준이 전사하자 그의 아우 소일(蘇逸)이 무리를 이끌고 다시 싸웠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봄에 모두 체포돼 참수되고 말았다. 조약은 북쪽으로 도망가서 석륵(石勒)에게 투항했지만 전 가족이 피살되고 말았다.
소준의 난이 평정되자 동진의 정국은 일시적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70년 동안 내란이 발생하지 않자 경제도 점차 회복됐다.
소준과 조약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유량이 서쪽의 도간을 견제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서 외환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상대가 연합하기 전에 우군을 조성해 유리한 형세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수도를 차지하고 천자를 휘어잡으면 승리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도간과 연합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는 와중에 도간의 아들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결국은 세력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정권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 재상과 명장의 능력을 겸비한 인재 왕수인(王守仁, 1472~1528)
모든 서생이 다 무능하고 계책이 없지는 않았다. 다양한 장군의 품격 가운데 최고의 경지는 역시 유장(儒將; 선비 출신의 장수)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무를 겸비한 유장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여 그만큼 인격적 매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장이 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스스로 유장임을 표방한 인물이 무수히 많았지만 진정한 유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인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유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대의 대학자였던 왕수인(王守仁)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학자로서 자질과 능력이 충분했고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서 문화의 거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그는 수많은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였고 황실에 대한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명 무종(武宗) 정덕(正德) 14년(1519), 강서에서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각지의 중진을 함락시키고, 불과 사흘 만에 파죽지세로 구강 등지를 장악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큰 혼란에 빠졌지만, 군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명조에는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자신의 봉지인 북경에서 모반을 일으켜 수년간에 걸친 정전 끝에 혜제(惠帝; 명나라의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의 황위를 빼앗았던 것이다. 때문에 조정은 큰 불안에 휩싸여 불운한 역사가 반복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조정이 이처럼 비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병부상서 왕경(王琼)은 침착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큰 공을 세울만한 유장을 물색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왕수인이다.
왕수인은 일찍부터 주신호의 모반을 예견하고 이를 미리 방비해둔 바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복주에서 주신호를 배알, 연회에 동석했을 때였다. 한때 시랑을 지냈던 이사실(李士實)도 주신호의 문객으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시정에 관한 담론이 오가면서 이사실이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데 안타깝게도 탕무(湯武) 같은 인물이 없구려!"
당시의 상황에서 이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는 황제에 대한 모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왕수인이 심학(心學; 중국의 정주학(程朱學)과 대립되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의 학문체계, 넓은 뜻으로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유교 전체를 말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의 육상산(陸象山), 명나라 때의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학문을 일컫는다)을 창시하여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암암리에 다른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돕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총명하고 눈치 빠른 왕수인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받았다. "탕무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려(伊呂)가 보좌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오."
주신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탕무가 있다면 자연히 이려도 있게, 마련인데 걱정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이사실을 이려에 비유한 주신호의 말에 왕수인이 응수했다. "이려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제(夷齊)도 있을 것이오."
이제(夷齊)는 옛날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를 지칭했다.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멸해 주나라 천하가 되자 두 형제는 주나라의 양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백이 숙제 형제를 절개 있는 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때 이후로 왕수인의 심지를 알게 된 주신호는 항상 그를 경계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해치려고 했고, 왕수인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주신호의 일거일동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6월 9일, 감주를 출발한 왕수인이 15일에 풍성에 도착하자 풍성 지현은 주신호가 모반을 일으키는 동시에 왕수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왕수인은 즉시 복장을 바꿔 임강으로 잠입했다. 임강 지부는 왕수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황급히 달려 나와 영접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성지를 지킬 계략을 제시해 달라고 간청했다.
왕수인이 대덕유(戴德儒)에게 말했다. "임강은 장강(長江; 양자강을 달리 이르는 말) 유역에 있어 남창과 인접한 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길안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대덕유는 이에 찬성하면서 반군을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왕수인은 적의 위치와 형세에 대해 세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마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신호의 용병에는 상중하 세 가지 계략이 있소. 그가 곧장 경사로 쳐들어간다면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 예상치 못한 후환을 조성하게 될 텐데 이것이 상책일 것이오. 아니면 먼저 남경을 점령하여 장기전 태세를 갖출 수도 있는데, 이것도 큰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오. 이는 상책이 될 수는 없지만, 중책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그가 남경을 사수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하책이 될 것이오. 그때 가서 관군을 한대로 집결시켜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그는 항아리 속의 자라가 되어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대인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다양하게 조치를 하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왕수인은 비밀리에 고깃배를 한 척 구해 직접 길안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반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그는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부하에게 자신의 관복을 입고 타고 있던 배에 남아 있게 했다. 주신호의 부하들은 이 배를 뒤쫓아 붙잡았으나 왕수인이 이미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되돌아갔다.
도중에 주신호가 공격하여 성지를 함락시킬 것을 우려한 왕수인은 밀정을 보내 조정의 밀지를 가장하여 양평과 호양의 어사와 남경과 북경의 병부는 즉시 장수들을 출동시켜 비밀리에 요충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주신호의 대군이 몰려오면 이들을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이런 조치로도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우령(優伶) 몇 명을 고용하여 이런 명령이 담긴 서한을 옷섶에 지니고 다니게 했다. 우령들이 출발할 때쯤 그는 또 영왕 태사의 가족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배에 태워 일부러 이런 명령을 알게 했다. 그러고는 크게 화를 내며 이들을 배에서 끌어내려 목을 베라고 호통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이 몰래 도망쳐 주신호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주신호는 우령들을 붙잡아 그들의 옷 속에서 서찰을 발견하고는 정말로 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오판하고 출병을 망설였다.
한편 무사히 길안에 도착한 왕수인은 길안 지부 오문정(伍文定) 등과 함께 주신호에 대한 방어 전략을 상의했다. "적병이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남경을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내가 이미 그들의 동행을 저지할 수 있는 조치를 해놓았소. 열흘 후에 여러 지역의 군마가 집결하면 주신호와 결전을 벌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오. 옛 성현들께서도 일이 닥쳤을 때는 두려움을 갖고 진지하게 책략을 준비하라 하셨소. 이제 곧 군사를 움직여야 할 터이니 먼저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확보하고 병기와 배를 넉넉하게 갖춰 결전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왕수인은 군마와 군량, 마초를 준비하는 동시에 사방에 방을 붙여 16만 대군이 남창 부근에 집결할 예정이라 대량의 군량이 필요하니 제때 군량을 내도록 하되 이를 어기는 사람은 참수하겠다는 포고를 내렸다.
주신호가 포고문을 보고는 진위를 가리지 못해 밀정을 보내 알아보게 했으나 너무나 치밀한 계략에 밀정도 이를 사실로 알고 그대로 보고했다. 결국, 주신호는 목을 감춘 자라처럼 남창 성안에 틀어박혀 감히 남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왕수인도 여전히 성을 지키면서 출병하지 않자 오문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용병의 도리에 따르자면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하는 일이오. 지금 반군이 성안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방비에 전념하고 있으니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오. 내가 공격을 미루면서 일부러 수비가 허술한 척하면 주신호가 먼저 참지 못하고 공격해올 터이니 그때 가서 그가 차지했던 성을 수복하고 그의 본거지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오. 그가 다시 성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돌릴 때 진로를 차단하고 공격하는 것이 거점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오." 오문정은 왕수인의 전략에 감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신호는 남창을 사수한 지 열흘쯤 지나도 관군의 공세가 시작되지 않자 정찰병을 보내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한 결과 자신이 왕수인의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후회 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는 서둘러 6만의 병사와 군마를 모아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파양호를 출발하여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남창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주신호는 안경에서 관군의 저항에 부딪혀 며칠 동안 성을 포위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병력의 손실만 가중될 뿐 전세가 나아지지 않고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 사이에 왕수인은 어렵지 않게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왕수인은 오문정 등 길안에서 온 병력과 포고에 따라 각 지역에 집결한 8만의 병력을 이끌고 7월 중순에 팽성에 도착했다.
이때 장수 하나가 그럴듯한 계책을 제시했다. "주신호는 열흘 동안의 치밀한 계략 끝에 출병한 만큼 남창성의 방비 또한 철저하여 일시에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안경을 공격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털어져 있을 터이니 대군을 파견하여 안경의 병력과 합세하여 양면에서 협공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창의 병력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일리 있는 허허실실 책략으로 병가의 도리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수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아군이 남창을 가로질러 내려가 장강에서 적군과 대치한다면 안경의 병력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강으로 와서 우리를 지원하지는 못할 것이오. 게다가 남창의 병력이 우리의 뒤를 공격하게 되면 보급로가 끊어지고 남창과 구강의 적병이 합세한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훨씬 불리한 상황으로 몰릴 수 있소. 차라리 남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주선호의 정예 병력은 전부 안경에 있기 때문에 남창의 수비는 허술할 수밖에 없소. 아군의 사기가 한참 올라 있는 이때에 남창을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오. 주선호가 아군의 남창 공격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병력을 돌려 지원하러 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있을 것이고, 일단 남창을 함락시키면 적군의 기세는 크게 꺾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오."
이는 아군에 대한 지원과 적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으로써 병법의 극치라 할 만했다. 그리하여 왕수인은 부대 전체를 몇 개의 지대로 나누어 남창의 각 성문을 공격했다.
19일에 출병한 그는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기로 약속하고 명령을 내렸다. "북을 한 번 울리면 성문에 접근하고 두 번 울리면 성에 오르기 시작한다. 북을 세 번 울릴 때까지 성에 오르지 못한 자는 무조건 참수하고 네 번 울렸을 때 성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 부대장까지 참수한다."
아울러 성인의 백성들에게도 전부 문을 닫아걸고 절대로 반군에 협조하지 말며 두려워서 숨겨나 도망가지 말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마침내 사다리와 밧줄 등 성을 오르기 위한 도구가 갖춰지고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비하는 적군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거나 숨기에 급급했고, 미처 성문을 닫아 걸기도 전에 왕수인의 군대가 밀고 들어가 손쉽게 남창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는 번개처럼 빠르고 신속한 작전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한 결과였다.
이어서 왕수인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군기를 엄격히 세워 함부로 불을 지르거나 노략질을 하는 사람은 군법에 따라 다스렸다. 동시에 반군의 주요 장수 10여 명을 생포하는 대신 본의 아니게 반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풀어줌으로써 빠른, 시간에 성안의 안정을 되찾아주었다.
이때 주신호는 전력을 다해 안경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성을 점령할 생각이었던 그는 남창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사실 등은 주신호에게 곧장 병력을 돌려 남창의 군사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안창을 포기하고 곧장 남경으로 가서 황위를 찬탈하여 천하를 호령하기만 하면 강서는 저절로 굴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는 당시에 대단히 정확하고 결단력 있는 전략이었고,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정국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란 주신호는 이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안창을 포기하고 남창으로 달려갔다. 왕수인의 계략에 정확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22일, 반군이 남창을 지원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수인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상의했다. 장수 하나가 나서서 자신의 계략을 밝혔다. "반군의 세력이 강대한 데다가 우리 지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으니 이들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방의 보루를 견고히 하여 성을 사수하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군사 전문가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전략이었겠지만 왕수인의 생각은 달랐다. "주신호의 병력이 강하긴 하지만 가는 곳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병사들도 억지로 복종하고 있는 형편이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고 한낱 안경성조차도 함락시키지 못한 데다가 근거지마저 잃은 터라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상갓집 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을 것이오. 아군은 병력이 많진 않지만 전부 정예병이라 할 수 있고 사기도 왕성하니 일당백으로 싸움에 임해 승기를 잡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오."
마침 이때 무주 지부 진괴(陳槐)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다음날 주신호의 선봉대가 초사에 당도하자 왕수인은 오문정이 정면에서 공격하고 여은긴(余恩緊)이 후면에서 공격하며 서연(徐璉)과 대덕유가 좌우 양쪽에서 협공하도록 진영을 배치했다. 배치를 마친 왕수인은 남창성안에 차분히 앉아서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
24일, 반군은 대단한 기세로 황가도를 향해 밀려왔다. 오문정은 몇 번 싸우다가 지는 척하면서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적병은 전력을 다해 진군하면서 점차 대오가 흐트러져 상호 대응이 어려워졌다. 이때 왕수인의 군대가 적진을 가르며 달려들어 반군의 대오를 완전히 흐트러뜨리자 반군은 방향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문정이 퇴각하는 적병을 추격하자 서연과 대덕유의 협공이 시작됐다. 오문정 등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10여 리까지 적을 쫓아가 2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사살했고 물에 빠져 죽은 적병도 수만에 달했다. 반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 채 퇴각하여 팔자뇌를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수인은 다시 장수들을 불러모아 당시의 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나서 말했다. "구강과 남강을 수복하지 않으면 도로가 막히게 되고 호광(湖廣)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어려울 것이오."
그리하여 그는 병력을 나눠 구강과 남강으로 급파했다. 주선호도 이러한 형세를 간파하고 구강과 남강에 병력을 보내 왕수인의 관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이틀 동안의 격전을 경험으로 왕수인은 반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 주신호가 배를 연결시켜 진을 치는 것을 보고는 화공(火攻)용 병기를 총동원하여 좌우 양쪽에서 협공하는 동시에 병사들을 사방에 매복시켜 불로 공격하면서 진격해 들어간다는 전략을 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주신호는 반군의 여러 대장을 접견하면서 작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들은 무조건 참수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장수들의 불만을 샀고 군대의 심리도 이반되기 시작했다. 이때 관군의 전면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천지를 요동쳤다.
주신호가 타고 있던 배도 불길에 휩싸였다. 반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무수한 반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주신호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 자신의 실패를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울면서 여러 빈비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빈비들은 대부분 물에 몸을 던졌고 주신호의 수하에 있던 장수들은 생포되었으며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때 구강과 남강이 수복되었다는 또 다른 첩보가 날아왔다.
중국 군사 사에서는 왕수인을 뛰어난 장수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가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음에는 이견이 없다. 그가 지휘한 반군 진압 작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가진 군사 전문가로서 자질과 정치가로서의 넉넉한 도량을 알 수 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주신호의 불순한 기도를 매우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었고, 줄곧 조정과 일정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사태의 발생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현실적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이와 반대로 주신호는 처세술에 능하지 못했고 너무 일찍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으며 인재와 물자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또 구체적인 전술 운용에 있어서 왕수인은 뛰어난 군사 전문가로서의 풍모를 과시했다. 그는 매사에 실제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이론만 중시하고 실제를 무시하는 유생들의 일반적인 단점을 극복했고 병법의 운용에, 있어서도 적이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이는 전체 중국 군사 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이처럼 왕수인이 사람들을 감복케 하는 것은 그가 문화의 위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군사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지략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형세와 대세의 중요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비록 총명함이 절정에 이른 지혜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객관적인 환경에서 유리한 형세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객관적 형세가 불리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오토바이에 올라탔다고 해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바퀴가 움직이는 그 세(勢)에 동력이 발생해야만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에 그러한 '세'도 없으면서 도착할 생각만 부질없이 하고 있다면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한 요인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개인의 노력이나 자질 등도 필요하고, 그때의 대세나 형세 등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 시대의 상황과 대세에 맞지 않다면, 그러한 능력이 별 쓸모 없어지는 경우를 종종 주변에서 목격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비운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과학자 테슬라 같은 경우가 이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 등도 중요하지만, 그 시기의 전체적인 대세와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여, 나아가고 물러남을 잘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 形(모양 형)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터럭삼(彡; 무늬, 빛깔, 머리, 꾸미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开(견; 같은 높이의 두 개의 물건, 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생김새가 뚜렷이 보인다는 뜻이 합(合)하여 형상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形자는 '모양'이나 '형상'을 뜻하는 글자이다. 形자는 幵(평평할 견)자와 彡(터럭 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幵자는 두 개의 干(방패 간)자를 겹쳐 그린 것으로 '평평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평평하다'라는 뜻을 가진 幵자에 彡자를 더한 形자는 '둘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形(형)은 (1)형상(形狀) (2)활용형(活用形) 등의 뜻으로 ①모양, 꼴 ②형상(形狀) ③얼굴 ④몸, 육체(肉體) ⑤그릇 ⑥형세(形勢), 세력(勢力) ⑦모범(模範) ⑧이치(理致), 도리(道理) ⑨거푸집 ⑩형상하다(形象), 형상을 이루다 ⑪나타나다, 드러나다 ⑫나타내다, 드러내 보이다 ⑬바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모양 상(像), 모양 자(姿), 모습 태(態), 모양 양(樣), 모양 모(貌), 코끼리 상(象),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그림자 영(影)이다. 용례로는 일이 되어 가는 모양이나 경로 또는 결과를 형편(形便), 사물의 생김새를 형태(形態), 겉으로 드러나는 격식을 형식(形式), 어떠한 꼴을 이룸 또는 어떠한 꼴로 이루어짐을 형성(形成), 사물의 형편과 세력을 형세(形勢), 물건의 생김새나 상태를 형상(形狀), 어떤 일이 벌어진 그때의 형편이나 판국을 형국(形局), 생긴 꼴로 사물의 어떠함을 말이나 글 또는 시늉을 통하여 드러냄을 형용(形容), 물건의 모양과 그 바탕인 몸을 형체(形體), 생긴 모양이나 얼굴 모양을 형모(形貌), 생긴 형상과 빛깔을 형색(形色), 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를 형상(形相), 모양이나 형식 따위가 달라짐을 변형(變形), 물건의 큰 형체를 대형(大形), 물건의 작은 형체를 소형(小形), 활자를 부어 만드는 원형을 자형(字形), 그림의 형상을 도형(圖形), 심정이 밖에 드러난 형편을 정형(情形), 땅의 생긴 형상이나 형세를 지형(地形),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형체가 있음 또는 육체를 가진 것을 유형(有形), 사물의 형상을 본뜸을 상형(象形), 외과적 수단으로 형체를 고치거나 만드는 것을 성형(成形), 변하기 전의 본디의 모양을 원형(原形), 형체를 이루어 만듦을 조형(造形),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외형(外形), 형체를 초월한 영역에 관한 과학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일컫는 말을 형이상학(形而上學), 모양이나 종류가 다른 가지 각색의 것을 이르는 말을 형형색색(形形色色), 자기의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몹시 외로움을 일컫는 말을 형영상조(形影相弔), 용모가 여위고 쇠약해짐을 이르는 말을 형용고고(形容枯槀), 지세가 좋아서 승리하기에 마땅한 자리에 있는 나라를 이르는 말을 형승지국(形勝之國),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땅을 이르는 말을 형승지지(形勝之地), 행동의 자유를 구속함을 이르는 말을 형격세금(形格勢禁),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몹시 외로움을 이르는 말을 형단영척(形單影隻), 몸 형상이 단정하고 깨끗하면 마음도 바르며 또 겉으로도 나타남을 이르는 말을 형단표정(形端表正) 등에 쓰인다.
▶️ 勢(기세 세)는 ❶형성문자로 势의 본자(本字), 势(세)는 간자(簡字), 埶(세)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埶(예)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문자의 윗부분인 埶(예)는 나무를 심다, 나무가 자라는 일, 나중에 藝(예)로 쓴 글자와 力(력)은 힘, 힘이 있다, 元氣(원기)가 좋다로 이루어졌다. 나무가 자라듯이 원기가 좋다, 기운차다는 말이다. ❷회의문자로 勢자는 '형세'나 '권세', '기세'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勢자는 埶(심을 예)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埶자는 묘목을 심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심다'나 '재주'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묘목을 심는 모습을 그린 埶자에 力자를 결합한 勢자는 나무가 힘차게 자란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묘목은 작고 연약하지만 언젠가는 크고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래서 勢자는 점차 큰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에서 '형세'나 '기세'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勢(세)는 (1)세력(勢力) (2)힘이나 기운(氣運) (3)형세(形勢) 등의 뜻으로 ①형세(形勢) ②권세(權勢) ③기세(氣勢: 기운차게 뻗치는 형세) ④기회(機會) ⑤동향(動向) ⑥시기(時期) ⑦불알, 고환(睾丸) ⑧언저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권세 권(權)이다. 용례로는 권력이나 기세의 힘 또는 일을 하는데 필요한 힘을 세력(勢力), 일정한 자세를 갖춤을 세구(勢具), 형세가 기울어 꺾임을 세굴(勢屈), 권세를 잡을 수 있는 길을 세도(勢塗), 올려다 봐야 하는 형세를 세앙(勢仰), 권세 있는 사람을 세객(勢客), 세력을 얻기 위한 사귐을 세교(勢交), 권세가 있는 자리 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세요(勢要), 어떤 동작을 취할 때 몸이 이루는 어떤 형태를 자세(姿勢), 어떤 현상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힘 또는 그 형편을 추세(趨勢), 공격하는 태세나 그 힘을 공세(攻勢), 병으로 앓는 여러 가지 모양을 증세(症勢), 정치 상의 형세를 정세(政勢), 남보다 나은 형세를 우세(優勢), 상태와 형세를 태세(態勢),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사물의 형편과 세력을 형세(形勢), 사람을 두렵게 하여 복종시키는 힘을 위세(威勢), 권력과 세력을 권세(權勢), 적을 맞아 지키는 형세 또는 힘이 부쳐서 밀리는 형세를 수세(守勢), 어떤 때의 형세 또는 어느 일정한 때의 어떤 물건의 시장 가격을 시세(時勢), 사람이 타고난 운명이나 운수를 운세(運勢), 약한 세력이나 기세 또는 물가나 시세 따위가 떨어지고 있는 상태를 약세(弱勢), 실제의 세력 또는 그 기운을 실세(實勢), 힘찬 세력 또는 물가 상승의 기세를 강세(强勢), 세력을 제거함을 거세(去勢), 바깥의 형세 또는 외국의 세력을 외세(外勢), 실상은 없이 겉으로 드러내는 형세를 허세(虛勢), 세력을 더하는 일이나 거드는 일을 가세(加勢), 힘이 상대편보다 못한 형세를 열세(劣勢), 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기세가 맹렬하여 대항할 적이 없는 모양을 세여파죽(勢如破竹), 권세는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뜻으로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늘 변한다는 말을 세불십년(勢不十年), 기세가 다 꺾이고 힘이 빠짐이나 기진 맥진하여 꼼짝할 수 없게 됨을 이르는 말을 세궁역진(勢窮力盡),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세가소탈(勢家所奪), 권세와 이익을 위하여 맺는 교제를 일컫는 말을 세리지교(勢利之交), 비슷한 두 세력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세불양립(勢不兩立), 사세가 그렇지가 아니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세소고연(勢所固然),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곧 세력이 강대하여 대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 또는 세력이 강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파죽지세(破竹之勢),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형제인 장남과 차남의 차이처럼 큰 차이가 없는 형세 또는 우열의 차이가 없이 엇비슷함을 이르는 말을 백중지세(伯仲之勢), 포개어 놓은 알의 형세라는 뜻으로 몹시 위험한 형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누란지세(累卵之勢), 헛되이 목소리의 기세만 높인다는 뜻으로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로만 떠벌림을 이르는 말을 허장성세(虛張聲勢),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장대 끝에 서 있는 형세란 뜻으로 어려움이 극도에 달하여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를 이르는 말로서 아주 위태로운 형세를 비유하는 말을 간두지세(竿頭之勢) 등에 쓰인다.
▶️ 判(판단할 판)은 ❶형성문자로 牉(판)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半(반; 둘로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칼로 물건을 잘라 나누는 것으로, 옛날 증문(證文)을 판서(判書)라고 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고는 나중에 맞추어 보았다. ❷회의문자로 判자는 ‘판단하다’나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判자는 半(반 반)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半자는 소머리에 八(여덟 팔)자를 그려 넣은 것으로 ‘나누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判자는 이렇게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半자에 刀자를 결합한 것으로 사물을 나누어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判자는 ‘구별하다’나 ‘판단하다’와 같이 진실을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나누는 일도 맞추는 일도 判(판)이라고 한다. 그래서 判(판)은 (1)판(版). 책이나 상품의 종이의 길이와 넓이의 규격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판단하다 ②판결하다 ③가르다 ④나누다, 구별하다 ⑤떨어지다, 흩어지다 ⑥맡다 ⑦판단 ⑧한쪽, 반쪽 ⑨판, 인쇄판, 활판 ⑩문체(文體)의 한 가지 ⑪구별이 똑똑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판단할 단(彖), 결단할 결(決)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의 진위를 판단(判斷), 선악을 가리어 결정함을 판결(判決), 판단해서 결정함을 판정(判定), 사실이 명백히 드러남을 판명(判明), 판단하여 구별함을 판별(判別), 분명하게 아주 다름을 판이(判異), 뜻을 헤아려 읽음을 판독(判讀), 판단하여 앎을 판지(判知), 아주 없음이나 도무지 없음을 판무(判無), 판단하는 방법을 판법(判法), 아주 환하게 판명된 모양을 판연(判然), 아내가 시키는 말에 거역할 줄 모르는 사람을 농으로 일컫는 말을 판관사령(判官使令) 등에 쓰인다.
▶️ 斷(끊을 단)은 ❶회의문자로 부수(部首)를 나타내는 斤(근; 도끼, 끊는 일)과 계(실을 이음)의 합자(合字)이다. 나무나 쇠붙이를 끊다, 일을 해결함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斷자는 '끊다'나 '결단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斷자는 㡭(이을 계)자와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㡭자는 실타래가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잇다'나 '이어 나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실타래가 이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㡭자에 斤자를 결합한 斷자는 실타래를 도끼로 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斷(단)은 (1)결단(決斷) 단안 (2)번뇌(煩惱)를 끊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일 등의 뜻으로 ①끊다 ②결단하다 ③나누다 ④나누이다 ⑤결단(決斷) ⑥단연(斷然: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 ⑦조각 ⑧한결같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끊을 절(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을 계(繼), 이을 속(續)이다. 용례로는 일단 결심한 것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는 모양을 단호(斷乎), 먹는 일을 끊음으로 일정 기간 음식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먹지 아니함을 단식(斷食), 딱 잘라서 결정함을 단정(斷定), 죄를 처단함을 단죄(斷罪), 유대나 연관 관계 등을 끊음을 단절(斷絶), 결단하여 실행함을 단행(斷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함을 단속(斷續),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를 단연(斷然), 끊어짐이나 잘라 버림을 단절(斷切),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림을 단념(斷念), 열이 전도되지 아니하게 막음을 단열(斷熱), 주저하지 아니하고 딱 잘라 말함을 단언(斷言), 교제를 끊음을 단교(斷交), 어떤 사물의 진위나 선악 등을 생각하여 판가름 함을 판단(判斷), 막아서 멈추게 함을 차단(遮斷),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여 병상을 판단함을 진단(診斷), 중도에서 끊어짐 또는 끊음을 중단(中斷), 옷감 따위를 본에 맞추어 마름을 재단(裁斷), 옳고 그름과 착함과 악함을 재결함을 결단(決斷), 끊어 냄이나 잘라 냄을 절단(切斷), 남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의 의견대로 결단함을 독단(獨斷), 잘라서 동강을 냄을 분단(分斷), 가로 자름이나 가로 건넘을 횡단(橫斷),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단장(斷腸),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베를 끊는 훈계란 뜻으로 학업을 중도에 폐함은 짜던 피륙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훈계를 이르는 말을 단기지계(斷機之戒), 긴 것은 자르고 짧은 것은 메워서 들쭉날쭉한 것을 곧게 함을 이르는 말을 단장보단(斷長補短), 남의 시문 중에서 전체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따서 마음대로 해석하여 씀을 일컫는 말을 단장취의(斷章取義), 단연코 용서하지 아니함 또는 조금도 용서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불용대(斷不容貸), 떨어져 나가고 빠지고 하여 조각이 난 문서나 글월을 일컫는 말을 단간잔편(斷簡殘篇), 머리가 달아난 장군이라는 뜻으로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 장군을 이르는 말을 단두장군(斷頭將軍), 단발한 젊은 미인으로 이전에 흔히 신여성의 뜻으로 쓰이던 말을 단발미인(斷髮美人), 오로지 한 가지 신념 외에 다른 마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단무타(斷斷無他), 단단히 서로 약속함을 이르는 말을 단단상약(斷斷相約), 조금이라도 다른 근심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무타려(斷無他慮),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어물어물하기만 하고 딱 잘라 결단을 하지 못함으로 결단력이 부족한 것을 이르는 말을 우유부단(優柔不斷),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듦을 일컫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어미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과 애통함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모원단장(母猿斷腸), 시작한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고 중간에 흐지부지함을 이르는 말을 중도반단(中途半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