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오후
가을사랑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바라보는 파도는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바다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우리가 바다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시간에도 바다는 저 혼자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물의 생명이었고, 푸른 색깔의 것이었다. 파도의 것이고, 변화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파도를 보면서 생명을 생각했다. 물과 푸르름, 파도와 변화를 떠올렸다.
넓은 바다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끝도 없어 보이는 바다 조차 다른 존재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는 듯했다. 비 때문에 먼 바다는 뿌옇게 보였다. 아니 그 존재 자체가 가려 있었다. 나는 바다를 보면서 동시에 빗물을 보고 있었다.
점차 빗물은 선으로 연결되어 바다와 함께 하고 있었다. 두 존재가 일체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 같은 심장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이었고, 영혼이 통하는 지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뜨거운 사랑의 탄생을 숨죽이며 찾아내고 있었다.
빗물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서 안도하는 듯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다는 무한한 포용력으로 빗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동진의 오후 표정은 조용했다. 나는 정동진 바닷가에 있는 어부횟집 2층에서 바다를 보며 삶과 사랑, 그리고 그 색깔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정동진은 서울에 있는 광화문으로부터 정동(東)의 지점에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같은 이치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똑같은 씨줄과 낱줄에 위치해 있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서로가 이상이 맞고 성격이 맞고,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상대방을 간절히 찾을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면 구원이 된다.
비에 젖은 모래사장이 사랑을 흠뻑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그 모래위를 걷고 싶었다. 밤이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아주 멀리 걸으면서 고동소리를 듣고 싶었다. 파도와 함께 먼 바다를 걷고 싶었다. 가슴 속에 쌓였던 모든 삶의 고뇌들이 파도에 휩쓸려 떠나갔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썬크루즈 리조트로 갔다. 산 위에 만들어놓은 공원이 무척 아름답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9층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짜릿하다. 나무들의 파란색이 너무 강렬해 보였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서울과 강릉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오후 1시 반경 서울을 출발해서 정동진에 가서 식사를 하고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저녁 9시 반경에 도착했다. 중간에 몇 군데 고속도로 휴게실을 들렀다. 너무 판에 박은 듯한 휴게실들이다. 화장실과 식당, 같은 메뉴, 카셋트테이프도 대개 비슷하고 새로운 맛은 거의 없다.
최진희씨가 부른 카페노래테이프를 두개 샀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최진희씨 혼자 부른 것인데 너무 좋았다. 두개를 다 들었다. 드럼과 색스폰 반주에 최진희씨 특유의 구성진 음성에 빠져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때때로 내리는 비와 어우러져 무드음악의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정동진에는 신라 선덕여왕때 지장율사가 창건한 등명락가사라는 사찰이 있다. 하슬라 아트월드가 있다. 하슬라는 고구려 시대의 강릉의 명칭이다. 통일공원, 송담서원, 정동진역, 모래시계공원, 썬크루즈 리조트 등이 정동진의 관광코스다. 정동진역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이며 해돋이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라고 한다. 모처럼 먼 거리를 드라이브하면서 기분전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