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마태20,1-16)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언제나 후하게 주십니다. 그 사랑에 한발 다가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위한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른 아침,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하고 물으니 “아무도 우리를 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딱한 처지를 배려하는 포도밭 주인의 호의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포도밭 주인입니다.
때가 되어“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고 품삯이 깎인 것도 아닌데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시기하고 질투까지 한 것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도와주지 못한 것을 주인이 헤아려 줬으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같지 않고, 너의 길은 나의 길과 같지않다...내 길은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55,8.9).는 말씀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을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구원 받는데 있어 먼저 선택된 유다민족과 나중에 선택된 이방인이 차이가 없듯이 세례성사를 먼저 받은 사람과 나중에 받은 사람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활동 내역의 크고 작음보다는 그 안에 사랑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볼 때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것 같아도 주님 앞에서는 가장 초라한 일꾼일 수 있고, 우리 눈에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한 것 같아도 주님 앞에는 가장 큰 일을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될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의 심판 때에 하느님 보시기에 첫째가 되길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두가 하늘에 초대받았음을 잊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지 않고 최선으로 부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렘브란트의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1637년, 패널에 유채,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그, 러시아
주인으로부터 품삯을 받고 있는 일꾼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인다. 찡그린 얼굴, 구부정한 자세, 게다가 손을 내밀고 있는 동작을 볼 때 하나도 고마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옆에 있는 다른 일꾼도 주인의 태도가 공평치 못하다고 투덜거린다. 한편 화면 오른편 구석에는 동그런 포도통을 굴리는 일꾼이 있다. 주인에 의해 기용되어 일터에 온 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다. 동료를 보기가 미안해서 인지 웃통을 걷어부치고 땀을 쏟는다. 어두운 뒷편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탁자에 앉아 웅성거린다. 그들이 받는 임금이 공정하지 못함을 토론 중이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환한 표정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과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으로 주인의 따뜻한 성품과 인자함을 한층 증폭 시킨다. 그에 비해 품꾼의 구부정한 자세나 쏘아붙이는 듯한 매서운 눈길은 대조적이다. 그는 주인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하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매괴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아멘
아멘!~~~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