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것
김 난 석
正義의 사전적 정의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 하였다.
그 속성 또한 매우 추상적이어서 많은 학자들이 윤리학에서, 법철학에서, 정치학에서, 사회학에서
그 견해를 피력해왔다.
비교적 최근엔 미국 하버드 대학의 샌델 교수가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한 책을 펴냈지만
많은 부분이 사변적 이야기이다.
그래도 몇 갈래 실질적인 케이스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정의의 판단은 역시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정의가 많이 운위되고 있는 건 사회가 어지럽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어지럽다는 건 정치상황과 사회생활을 모두 망라해서
지도자와 국민, 생산자와 소비자, 각종단체의 관리자와 회원, 개인 간의 관계도 포함될 터요,
우리 카페의 관리자와 회원 상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와 같이 커다란 명제를 내걸고 말하기엔 역부족이거니와 가당치도 않다.
더구나 경청할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리 카페생활에 주목하여 정의를 말해보고자 한다.
1. 무엇이 중헌디?
몇 해 전에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이 상영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평화로운 마을에 괴이한 죽음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을 공포스럽게 끌고 갔다.
잘못 먹은 독버섯 때문이라거나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 때문이라거나 굿판을 벌여 잠재워야 한다거나
하는 등으로 허둥지둥만 할뿐, 사람이 괴이하게 죽어나가는 인과관계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때 대사 중에 나온 “무엇이 중헌디” 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이를 패러디하여 글을 써대기도 했는데,
삶아가면서 우선순위가 무엇이냐는 아주 소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이버 카페 <아름다운 5060>은 중년의 화목하고도 조화로운 생활을 모토로 2007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흘러 곧 5만여 회원들 앞에서 그 창설기념식을 갖게 되겠지만,
여기까지 온 데에는 많은 선배회원들의 참여와 노고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은 누구이며 누가 칭송을 받아야 하는가?
우문(愚問)이지만 차별 없는 모든 회원들이란 생각이다.
그 중 삶의 이야기방에 던지는 정의, 즉 회원들이 삶의 이야기방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와 공정한 도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곡성에서처럼 ‘무엇이 중헌디’를 떠올려보면 화목하고도 조화로운 어울림을 첫째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게 삶의 방에서 간단없이 추구해야 할 알파요 오메가일 것이다.
2. 당신들의 천국
작가 이청준은 70년대에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펴내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소록도 나환자 병원에 조백헌 대령이 새로운 병원장으로 부임해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야기해나가는데,
조백헌이 자기의 치밀한 계획 하에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독려하지만
주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동참하지 않는다.
원장이 자신의 공을 기리는 동상을 세우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바로 주민들이 바라보기에 주민들의 천국이 아니라 ‘원장 당신의 천국’ 일뿐이라는 것이다.
마침내는 서로 화해하여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지난 개발연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민주적 참여로 땀도 보람도 함께 나누자는 에스프리가 담겨있다.
삶의 이야기방에 몇몇만이 글 올리기를 독점한다면 그게 옳은 일일까?
몇몇만이 댓글 달기를 하면 보기 좋을까?
읽기만 하고 지나가도 될까? 몇몇 사람에게만 댓글을 달아줘도 될까?
모든 글을 읽고 모든 사람에게 댓글을 달아주는 게 가능할까?
댓글에 댓글, 또 그 댓글에 댓글, 이렇게 꼬리를 무는 건 옳은 일일까?
본글에 대한 다른 생각의 댓글은 달면 안 될까?
본글이 좋았다는 댓글만 달아야 할까?
이모티콘을 과다하게 달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까?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까?
어떻든 상관 말아야 할까?
표준어를 권장해야 할까? 그냥 놔둬야 할까?
교양 있는 삶의 이야기만 올려야 할까?
야살스러운 글은 올리면 안 될까? 그 한계는 어디일까?
유머러스한 글을 올려도 될까? 그런 글은 유머방으로 보내야 할까?
톡톡 수다를 떠는 글을 올려도 될까? 그런 글은 수다방으로 보내야 할까?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로 가야 옳을까? 상향평준화를 꾀해야 할까?
본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지적을 한다면 그건 옳은 일일까? 안될까?
보통사람들의 평균수준에 밑도는 횡설수설의 본글이나 댓글은
지적을 해야 할까? 말까? 그 판단은 누가 해야 할까?
70대는 지켜보고 덕담만 해야 할까?
50대는 내용이나 표현양식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걸까?
다 이해하고 받아줘야 할까?
글이 너무 안 올라오면 쓸쓸하지 않을까?
댓글도 너무 안 달면 냉랭하지 않을까? 그런 땐 어찌해야 할까?
방장이 없는 상황에서 빅 브라더(Big Brother) 노릇하는 사람이 나타나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그걸 그냥 뇌 둬야 할까? 말려야 할까?
분위기를 혼자 좌지우지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까?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까?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교통정리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나서야 할까?
그냥 지켜보면서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게 좋을까?
3. 정의 즉 사람의 올바른 도리
나도 삶의 방 활동에 대해 샌델 교수처럼 몇 가지 자문만 해봤지만
카페생활에서의 정의 즉 올바른 도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끔은 이웃으로부터 “왜 카페생활을 하느냐?” 란 말을 듣는데,
그러면 삶이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니 일단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카페도 세상이기 때문이란 생각에 이른다.
가끔은 또 “무엇을 위해 카페생활을 하느냐?” 란 말도 듣는데,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이니 스스로 알고 깨달아서 그 무엇은 각자가 찾고 정립해야 일이란 생각에 이르고 만다.
다음으로 ‘어떻게 카페생활을 살아가야 할까?’ 하는 문제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더불어’ 란 수식어를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흔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한다.
세계인권선언에 내포된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너와 내가 똑같은 권리 의무 내지 독립된 인격주체라는 걸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한 권리 의무 외에 상대방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거나 제약할 수 없으며,
단지 그런 틀 안에서 자신의 자유스런 행위를 제어해나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중국 위나라의 자공이 공자에게 “평생에 지켜야 할 한마디 말이 있느냐” 고 묻자
공자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己所不欲 勿施於人)” 고 했다.(논어 위령공 편)
서양정신의 두 기둥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 할 때 그 한 축이 되는 성경에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 했다.
동서양의 이 두 지혜를 한데 놓고 보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의 한계와 해야 할 일의 한계가
이론(異論) 없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행위의 도덕성을 근거 짓는 최고의 원리를 도덕법칙이라 할 때
칸트는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단언적 지상명령으로서 “그대가 하고자 의도하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했다.(칸트의 정언명령)
위에 든 유교정신과 기독교정신의 도덕률이 이 정언명령에서 만나고 있음을 미루어보면
양의 동서나 시대의 고금을 통틀어 남의 독립적 인격권을 해하지 않는 행위규범이
명확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수년간 면벽정진하기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그의 오도송(悟道頌) 첫 머리에서
평생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에 광분했다 한다.(生平欺狂男女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삼천 배를 한 뒤에야 친견을 허락했다든가 많은 법문을 전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했을 테니 그를 뉘우친 건 아닐까?
물론 사람답게 잘 살아야 한다는 취지이겠으나 삶의 가치관은 각자의 몫일뿐이요,
단지 더불어 살아나감에 있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은 고유하게 따로 있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걸 남에게 강요하거나 내가 이웃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한다면,
그리고 내가 의도하는 것이 남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면 옳지 않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세상살이도 카페생활도 삶의 방에서 어울리는 것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물건을 내다 팔 수도 살 수도 없고,
영화관에 관객이 들지 않으면 영화관은 사라지고 만다.
카페도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이름을 잘 지어 삶의 방이나 수다방이나 수필방이나 노래방 등등 마당을 펼쳐놔도
회원들이 모여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나는 사주경계하며 운전하듯 앞뒤 좌우를 살피며 카페생활을 하는 게 도리라 생각한다.
뒤가 밀리고 앞이 터졌으면 과속으로라도 앞으로 빠져나가고,
앞이 막혔으면 답답해도 멈춰주고,
때론 교통법규를 어겨서라도 차선을 바꾸거나 좌회전 우회전 하여 소통에 도움을 주고,
차량 소통량이 많으면 아예 집에서 쉬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게시판이 헐렁하면 글 올리고 댓글 달고, 넘치면 지켜보고,
어지러우면 좀 무거운 글을 올려보고, 심심하면 우스갯소리가 섞인 글을 올려보곤 하는데,
언제나 자율관리가 잘 안 되는 곳엔
외부의 강제(카페지기의 제재나 방장의 관리)가 작동하게 되어있음도 알아야 한다.
첫댓글 선배님의 뜨거운 글을
존중합니다 ㅡ
그렇습니다 ㅡ
본말의 전도된 경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ㅡ
정석적인 선배님의
글을 후생가외의
표본으로 삼겠습니다 ㅡ☆
고맙습니다.
더 좋은 의견도 첨가했으면
좋았을텐데 요.
대한민국 일등카페의 얼굴이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방의 운영지침에 대한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회원 모두가 주지하고 실천하여
명실공히 일등카페의 품격과 자존심을 지켜나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카페에 대한 애정어린 충언에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경의를 표합니다~^^
5060의 정신적 지주로서
오래토록 저희들 곁에 머물러 주시길 앙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이 참 매끄럽습니다만
채찍도 한 마디 해주셨으면
더 좋았을걸 요.
전에는 몰랐는데
요즘 느낍니다
이 카페가 명품카페가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 하고...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저기 조물조물
분위기 돋우시는 모습이 참 촣아보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낭주님이 말씀하시고 걱정하시는 뜻
잘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건 카페지기가
9월 10일까지 펼치는 토론이벤트이고
저도 그에 참여하여 한 번 올린 글이니
이점도 이해해주시고요
같은 말을 앞으론 안 할 겁니다.
정치판에도 분위기를 좌지우지 하는데는
불과 1% 정도되는 열성당뭔입니다
모든 조직은 1%의 열성적인 구성원이
여론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형성하는데
조직의 모멘텀속성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어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구경이나 하다가
늦게 나타나서 젓가락 들고 밥상에 대들면서 밥맛이 있느니 없느니
이러쿵 저러쿵하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요.
좋은말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동감입니다.
함께 살아가려면 말없이 지켜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헤아려야 합니다.
석촌 선배님의 글은
생각을 하게 됩니더
깊고 넓고 포괄적이지만
새겨 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이구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서로 함께 생각을 해봐야겠지요.
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
대접받고 싶은데로 남을 대접하라...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넣어놓고 행동을
하게되는 격언 입니다.
어떤 모임이든 단체든 그 테두리 안에서는
하나의 국가라 생각이 듭니다.
쉼없이 고민하고 룰을 만들고 지켜야할
도리를 알게해주는 수장과 참모가 있습니다.
내자신이 예의를 갖추고 룰을 지키면서
오래오래 함께 하고픈 울 카페입니다.
네에 고운 글 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불가에선 수처작주란 말도 하던데요
저마다 주인의식도 있어야 할겁니다.
극장에서 처음 뵈었을땐
용산구의 이선희 의원이 아닌가 했다네요. ㅎ
가수이기도 하지만요.
@석촌 윽~
푸하하하.
예전20대 때
리버사이트 나이트 클럽갔는데...
누군가 싸인 해달랬어요 ㅋㅋㅋ
가수 이선희 아니냐고....그이후
40년이 흘러 또 들었습니다..
@이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카페생활이 조심스럽데요.
계속 댓글을 주고 받고 싶거든요.
젊고 지성미가 엿보이고 글이 좋고 예쁘니까요.ㅋ
잘지내세요.
석촌님의 말씀은
학창시절에 공부에
갈피를 못 잡고있을 때
정석이란 책을 읽은 느낌 입니다
아이구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이천에 있는 세라기타문화원과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