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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 12,1-8.11-14>
그 무렵
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3,1-15>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6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11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1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 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전에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끝까지 사랑하는>
오늘 성 만찬 미사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의 첫 번째 뜻은 당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묵상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며 사랑의 동력이 점점 떨어져 그저 자기 사는 것에 급급한 우리 보통 인간을 생각할 때, 그리고 저를 성찰할 때, '내 생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사랑은 없고 고통과 고독만 있을까 봐 걱정이 됐습니다.
그렇지요.
고통만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고, 고독만 있다는 것은 주님도 없고 이웃도 없다는 것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였다는 것의 진짜 뜻은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 뿐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이며,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칠 것을 아셨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다 도망간 뒤 홀로 십자가에 계실 때도 사랑하셨다는 뜻일 겁니다.
배반.
이것은 당신 사랑을 거부한 것인데, 그런데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겁니다.
제자들의 배반은 당신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으신 것인데, 이것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실패한 게 아니라 사랑을 포기할 때 실패한 것이고, 아무리 내 사랑이 거부돼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랑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랑만 사랑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실패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한 것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당신 살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발 씻음은 더러운 발인 죄를 씻음입니다.
제자들의 죄는 배반의 죄요 주님을 버리고 떠난 죄인데, 제자들은 그 발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그 발을 씻어주심은 도망쳤을지라도 다시 그 발로 돌아오라는 초대요 관계 회복의 용서입니다.
나를 버리고 도망간 그 더러운 발로는 내게 다시 돌아올 생각 말라고 하지 않고 탕자의 비유의 그 아버지처럼 집 떠나 떠도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며 오히려 그 발을 뜨거운 물로 찜질해주시고 씻어주시는 용서의 퍼포먼스입니다.
인간의 그 수많은 연극이나 행위 중에 이보다 더 감동적인 퍼포먼스는 없습니다.
무릇 모든 감동은 사랑이 없으면 감동도 없고, 사랑 중에서도 배반을 넘어서는 사랑보다 감동적인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 씻음으로 관계를 회복시키신 주님께서는 이제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새옷을 입히고 양을 잡아 잔치를 베푼 아비처럼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식탁을 차린 뒤 그것을 나눠주십니다.
그런데 죄인인 자기를 받아들이고 식탁을 차려주는 것만도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는데, 그 빵과 포도주가 바로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며 앞으로 이 빵과 포도주를 같이 나눠먹되 먹을 때마다 당신 사랑을 기억하라 하시니 눈물이 앞을 가려 먹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발을 씻어주시면서도 서로 그렇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과제를 남겨주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인 우리에게 또다른 과제를 남겨주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이 성찬례를 같이 거행해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과제인데, 비유의 큰 아들처럼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닮지도 못한 우리라면 이 성찬례를 결코 같이 거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혼밥과 혼술 시대에 주님의 만찬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입니다.
이 도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피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께서 우리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발을 씻겨주는 일은 그 당시 하인들이나 하던 일인데 스스로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는데 바로 그 사랑을 오늘도 주십니다.
발은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곳을 닦아 주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더러운 곳을 깨끗이 씻어 주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말로나 혀가 아니라 손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허리를 굽혀 섬기고 봉사하는 아름다운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물로 씻어 주심으로 정화와 생명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더러운 발뿐만이 아니라 오염된 우리의 마음과 영, 추악한 죄를 씻어 주심으로 멸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3,15)하시며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겸손과 사랑,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바뀐 나의 모습을 살펴 부족함이 있다면 속히 채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 목요일에 애틋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사랑의 절정인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음을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들과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기에 앞서 가장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미사 안에서 그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성체는 주님의 사랑 자체입니다.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영적으로 풍요케 되고 또 하나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주님의 사랑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와 더불어 성품성사를 기억합니다.
주님의 온갖 은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성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살가운 사랑의 전달을 위해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허물과 부족함에도,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를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도구로 삼아 일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능력이 더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청합니다.
사제는 영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로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권위만 내세우고, 무작정 따라오라는 식의 독선적인 아버지, 자기 중심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열린 아버지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처럼 허리를 굽혀 자녀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배반자까지도 품에 안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가슴이 넓은 아버지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섬김의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그리고 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입었으면 더 바람이 없겠습니다.
요한복음13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승이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하는 데 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확인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당신의 머리를 그 사람 발 밑에 놓으십시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날입니다.
베드로는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단지 몸의 더러운 부분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때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요한 13,11)라고 하십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왜 깨끗해질 수 없었을까요?
자신 발밑에 들어온 예수님의 머리를 밟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밑에 들어오실 만큼 낮아지셨기에 어떤 제자들은 자신의 발을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유다는 자기 발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밟은 것입니다.
발은 자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 13,18)
신랑은 신부를 정결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자기 머리를 아내의 발밑에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아내에게 주어 아내가 집을 나가라면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아내는 정결해집니다.
이것이 누군가를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물론 유다와 같은 아내는 그런 남편을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의 의무는 이것입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택배회사를 지원했을 때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유통업에 종사하는 정우철(30) 씨는 1년 중에 한 4개월은 너무 바빠서 5시간 이상 잘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항상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고 아내는 육아에 너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몰래카메라로 아내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먼저 아내를 카페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이 안 좋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9년 동안 열심히 해 왔고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할 거 같아?”
“자기 건강 때문에 그런 거니까…. 같이 있는 시간도 많겠네.”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
“모아둔 돈 있으니까 괜찮아. 일 바로 하지 말고 쉬고 생각해.”
자신을 배려하는 아내에게 오히려 미안해집니다.
아내도 남편이 건강검진 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온 것도 몰랐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남편이 잠깐 자리를 뜨고 택배회사에서 취직이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다시 자리에 돌아온 남편이 코로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남편 혼자 짐을 짊어지게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합니다.
아내는 울면서 말합니다.
“자기가 나한테 말하기까지가 힘든 거지. 수아 좀 더 크면 같이 일하자.”
“애 키우며 어떻게 일까지 해.”
“다 그렇게 해. 우리가 안 그랬을 뿐이야.”
남편은 자기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합니다.
편하게 해주겠다고 결혼했으니까.
아내는 지금도 아주 편하니까 쉬운 일 함께 나눠서 하자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 아내는 육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우울증은 무언가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런데 이제 남편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남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남편도 아내의 진심에 눈물이 터집니다.
아내의 산후우울증으로 아내가 자신을 조금은 원망하는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의 처신에 자신을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몰래카메라인 것을 알고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한테 신경을 못 써서 많이 미안했어요.
건강검진 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냥 다 미안했어요.
남편이 이렇게 우는 걸 처음 봐서.
'진짜 힘들었구나!'”
[출처: ‘갑자기 일을 그만둔 남편, 그리고 아내의 한마디’, 유튜브 채널, 엔스크린]
죽을 고생을 하고 아내에게 다 내어주어 자신의 처신을 아내에게 맡겨야 아내가 변화합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남편도 변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파스카’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방법이 이것입니다.
물론 요즘에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아내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혼했으면 남자는 아내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의무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돈으로 복종시키려는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버는 것도 다 가져다주고 재산 명의도 다 아내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생각합니다.
내가 남편을 밟을 수 있을 때 밟지 않게 되면 그것이 아내가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발을 씻어주는 것만도 대단한데, 이스카리옷 유다의 발에 짓밟히기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이렇게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발꿈치 밑에 당신 머리를 놓으시고 우리 처신에 당신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으면 말로만 상대를 바꾸려 하는 일은 멈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하였습니다.
남편이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내는 소리쳤고 심지어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천둥이 치면 비가 오는 법이지!”라고 하며 자신의 처지를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아내가 변하고 안 변하고는 아내의 몫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라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며 나라의 처신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충분히 도망쳐서 다른 나라에서 잘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처신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변하고 안 변하고는 나라에 달려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는 방법으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내가 깨끗해졌다는 말은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아내는 가정이 힘들 때 혼자 아르바이트하였습니다.
한 달 30만 원 월급으로 1년 이상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면 무능한 남편 탓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까지 된 것이 자신의 노력이라 여길 수도 있을 텐데 항상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아이들이 아빠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아이들을 순종하게 합니다.
남편을 먼저 챙기고 남편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가 안아줍니다.
이렇게 한 것에는 물론 정은표 씨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바친 덕도 있습니다.
분명 그렇게 깨끗해졌을 것입니다.
요즘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면 큰일 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명을 바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그 신비 안에서 알려주신 관계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저절로 잘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삼위일체 하느님, 곧 아버지의 희생, 그리고 아드님의 순종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나라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세족례>
성삼일을 시작하는 오늘 성목요일,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분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느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 옛날 세족례를 주관하신 예수님처럼 형제들 앞에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일 년에 단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형제적 봉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동안 세족례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되고 원장이 되고 기고만장했을 때는 세족례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이도 먹고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지금...
여기 이 시골에 와서야 세족례에 담긴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결정적인 계기는?
깊이 있는 기도나 심오한 묵상의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 서적이나 탐구의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구체적, 실제적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감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 빨래를 낑낑대며 세탁실로 옮겨가면서,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으면서, 아이들의 잠자리를 하나하나 세팅하면서, 피정 오신 분들이 드실 한끼 식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면서, 마침내 세족례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주님 가르침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는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우리 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만 신자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일년내내 사시사철 무릎을 꿇겠다는 다짐과 함께 세족례를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매일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나 사건 속에서 실제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세족례만 거행한다면 그 세족례는 그저 일회용 이벤트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오늘 성 목요일은 참으로 복된 밤이며 은혜로운 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신 복된 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 그 한없는 겸손을 깊이 묵상하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는 말은 ‘극진히 사랑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모두 제자들(신앙인들)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아시면서도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그 일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5ㄴ)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하기 전에도 그를 사랑하셨고, 그가 배반한 후에도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유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실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심정이었을까?
루카복음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루카 22,21).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도, 발을 씻어 주신 일도, 돌아서 버린 유다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권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사탄의 힘이 예수님의 힘보다 더 셌던 것도 아닙니다.
유다 자신이 자기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했고,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잃은 양’이 아니라 ‘스스로 목자를 떠난 양’입니다.
9절의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을 정결예식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일은 ‘종’이 해야 하는 천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8절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라는 말은 ‘거절’이 아니라 ‘사양’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은 “나의 사랑을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는 “나의 헌신과 희생에 네가 동참하지 않으면”입니다.
예수님의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와 나의 관계가(일치가) 깨어진다.(끊어진다.)”입니다.
10절의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의해서 깨끗해진(정화된) 사람들이라는 선언이기도 하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정결예식이 아니라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22,25-27)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를 사랑한다면, ...을 해라.” 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반대입니다.
‘사랑’은 ‘섬김’이고 ‘낮춤’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소유욕’이나 ‘독점욕’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욕망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온 삶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사정에 따라서 세족례는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의 발을 한 번 씻어 주기만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한 번의 예식이나, 한 번의 행사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성체성사와 ‘발을 씻어 주신 일’과 십자가 수난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실상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요한 15,9).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요한 15,10).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한 13,34).
신앙인에게 사랑은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호흡해야 하는 숨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살리는 ‘하느님의 숨’입니다.
숨이 막히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 내쉬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할 수도 있고, 무감각해질 수도 있는데, 그런 느낌과 생각을 극복해야 하고, 항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 - 성체성사와 섬김의 사랑>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삶에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사람은 떠나도 길이길이 사랑의 추억으로 남아 살아갈 힘을 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저에겐 오래 전에 떠난 어머님이 그러합니다.
요즘 봄꽃 만발한 파스카 축제의 계절입니다.
오래 전 이맘때 쯤 써놨던 ‘꽃같은 선물의 삶’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않으면 순식간 사라져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의 나날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들 폈다지면 또 오늘의 꽃들 폈다지고
평생 하루하루 폈다지는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오, 주님 사랑합니다”
-2001.4
누구나 소망하는 이런 꽃같은 선물의 삶일 것입니다.
꽃처럼 선물로 살다가 꽃처럼 선물로 떠나라는 가르침을 주는 무수히 폈다 지는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삶이 있는가 하면, 분열과 불화의 짐을 남기고 떠나는 아픈 추억의 삶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선물을 남기고 떠날까요?
아주 예전 어느 자매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남편의 마지막 임종어가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고 남편이 떠난 후에도 남편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살 힘을 얻게 되었다는 세 내용의 고백입니다.
1. 미안합니다.
2. 감사합니다.
3. 사랑합니다.
얼마나 적절한 고백인지요!
사람뿐 아니라 마지막 주님께 드릴 고백도 이 셋뿐일 것입니다.
오늘부터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오늘 지금 저녁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 시작되는 파스카 성삼일은 부활 주일의 저녁기도로 끝납니다.
오늘 주님 만찬 미사 중 말씀을 통해 온 인류에게 물려 주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 둘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첫째, 성체성사 미사의 파스카 축제입니다.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이 바로 지금 거행하는, 지금까지 거행해 왔고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끊임없이 날마다 거행할 파스카 축제 미사입니다.
이미 그 기원은 오늘 제1독서 이집트 탈출에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 때부터 시행된 파스카 축제입니다.
“그 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이 날이야 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그날이 바로 날마다의 오늘입니다.
신약의 새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를 통해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참 좋은 선물인 파스카 축제의 성찬례를 물려 주시고 세상을 떠난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게 해주시고 떠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랑의 선물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받은 성찬례의 선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늘 현재화하여 우리 모두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성체성사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매일의 미사경문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반복되는 내용이 아닙니까?
바로 이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꽃처럼 폈다 지는, 아름답고 거룩한 선물같은 삶과 죽음을 맞이하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날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성체성사 은총의 선물입니다.
둘째, 겸손한 사랑의 섬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늘 읽고 묵상할 때 마다 우리를 감사, 감동, 감격하게 하는 참 아름답고 거룩한 장면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의 섬김의 삶이 압축 요약된 장면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물의 장면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일정한 전례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섬김의 사랑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 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진짜 영성은 이런 섬김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입증되는 것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영성은 이런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런 겸손한 사랑의 섬김의 추억을 어찌 제자들이 잊을 수 있겠는지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는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유언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분이 세상에 우리 예수님 빼놓고 누가 있겠는지요!
참으로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슨 선물을 남기고 갈지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선물은 못되더라도 짐은 되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바로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는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정말 주님의 제자답게, 이런 스승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 섬김의 사랑을 보고 배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 베네딕도는 당신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주님을 섬기듯 주님을 닮아 서로 형제들의 발을 씻어 주는 마음으로 형제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평생 날마다 죽을 때까지 성체성사 전례에 '경敬'과 '성誠'의 마음으로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고, 일상에서 겸손한 사랑,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말 평생 하루하루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다면 참 아름답고 거룩한 선물의 삶이자 죽음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시편 116,12-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 성삼일에 들어섰습니다.
아프지만 참 귀한 시간입니다.
제게 올해 주님 만찬 미사 전체를 아우르는 말씀은 좀 생경스럽게도 '세례'입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 제2독서의 말씀은 '피'로 집중됩니다.
그리고 복음환호송과 복음에는 '사랑'이 부각됩니다.
구약 이집트 탈출의 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 집 앞에 바른 짐승의 피가 선택된 백성임을 증거했고 하느님께서는 그걸 보시고 재앙을 건너뛰셨지요.
또 사도 바오로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고 말씀하신 파스카 만찬을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어느 한 민족이 아닌, 온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파스카의 어린양이심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
(요한 13,3)
전부이시고 모든 것이시며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수난의 시간을 피하거나 미루실 수도 있고, 당신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 다른 방식의 구원도 고려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억지로 떠밀리듯'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 당신 피의 제사를 선택하십니다.
세족례의 장면은 제게 또 다른 세례식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종처럼 엎드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시지요.
당황해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고 선언하시고요.
정말입니까?
제자들이, 아니 우리가 예수님도 인정하실만큼 깨끗합니까?
글쎄요. 스스로 영육의 깨끗함을 자신할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지만, 선뜻 답하기 어려운 문제임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다가오시기는 하는데 당당히 머물기는 송구스러웠습니다.
제 꼴을 아는 까닭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너는 깨끗하다.
내가 너를 씻어 주었기 때문에 깨끗하고, 네게 나의 피가 발려있기 때문에 깨끗하며, 너에 대한 내 사랑 때문에 깨끗하다."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공덕과 마찬가지로 깨끗함 역시 주님께서 주도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 몰골과 상태를 세세히 따져본 뒤에 이리저리 깎아서 주시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물의 세례를 통해 깨끗해졌지요.
그리고 그간 삶의 질곡을 거쳐오면서 묻은 발의 먼지는 오늘 예수님께서 깨끗이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거룩한 피로 우리는 온전히 정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나에 대한 너의 사랑으로 너는 깨끗하다."
주님을 향해 타오르는 우리 사랑의 불이 우리 자신을 정화한다고 하십니다.
온전히 정화되고 나서 주님께 사랑을 드리겠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기에, 불결하고 불순한 채로 이글이글 힘껏 태워올리는 사랑의 불꽃, 분향처럼 올리는 연기는 그분께 봉헌하는 제물인 동시에, 우리 자아의 고질적인 아집, 탐욕, 분노, 정념, 이기심, 교만이라는 제물을 흔적도 없이 살라 재로 스러지게 해 줍니다.
그 사랑의 불꽃 위로 떨구어지는 우리 통회의 눈물은 놀랍게도 이 고약한 것들이 타면서 풍기는 악취를 향기로 바꿉니다.
사랑은 이렇듯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친히 우리의 발을 정성껏 닦고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 손길에서 우리는 물의 세례, 피의 세례, 사랑의 세례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벗님의 발을 씻어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깨끗하다."
"너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라."
그러니 힘내어 예수님과 함께 다음 여정으로 들어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로마의 바오로 대성당은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하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대성당에는 베드로 대성당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입니다.
1대 베드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교황님들의 초상화를 보면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대 교황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교황님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2000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경주의 최 부자집은 300년 동안 존경을 받으면서 부자로 잘 살았다고 합니다.
최 부자집에는 독특한 가훈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신앙인으로서도 지키면 좋을 것 같은 가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원하였던 요한과 야고보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하지만 신앙인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 것은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허세와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1년 중에 가장 거룩하고 뜻 깊은 성삼일의 첫날을 시작합니다.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는 오늘 ‘주님의 만찬 미사’를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또한 포도주가 든 잔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많은 이의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원형이고 미사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진정한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기에게 하는 일이요,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희생과 봉사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고, 권위를 내세우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기꺼이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미사입니다.
모든 이를 품어주셨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주셨으며, 스스로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믿어주며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확신으로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우며, 우리들 또한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씻어주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함께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군입대 후 신병교육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부식으로 건빵을 주었는데, 정해진 시간에 다 먹지 않으면 수거해가는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남은 건빵이 아까워서 몰래 숨겼습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건빵을 꺼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조교가 알게 되면 저 때문에 전체 얼차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 화장실에 가서 건빵을 몰래 먹었습니다.
이 화장실이 지금처럼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라, 냄새가 아래에서 풀풀 올라오는 재래식 화장실입니다.
배고프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아마 대부분 인상을 찌푸리면서 “더러워. 그렇게라도 먹고 싶을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현재 화장실에서 당연히 무엇을 먹지 않습니다.
더럽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장실보다 더 더러운 곳에서 음식을 먹고, 또 그 더러운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먹기도 합니다.
화장실 변기 옆에서 그리고 변기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이라고 하지요.
스마트폰에 붙어 있는 세균은 화장실보다 18배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은 우리 삶에 매우 유용하지만, 세균 덩어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유해성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인데도 이 죄의 유혹을 끊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사랑과 봉사의 나라이지 권력과 통치력으로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과 사랑의 일치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닦아 주시지요.
이들은 아직도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말싸움하기도 하고, 실제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겼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세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권력 지향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14.15)
예수님의 이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쫓는 삶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쫓아야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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