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42] 민수기 13장-15장 묵상
★ 가데스바네아에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고 나치 정권에 저항을 하다가 추방되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친 폴 틸리히
(Paul Tillich) 교수는 「경계선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란 경계선상에 서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서있고,
이론과 실제 사이에 서있고,
타율과 자유 사이에 서있고,
교회와 사회 사이에 서있다.
이런 경계선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요구하고 계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은 경계선의 삶이므로
경계선상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늘 결정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나타난 가데스바네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경계선에 있었다.
이들은 더 앞으로 나아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뒤로 돌아가서 다시 애굽땅에서 노예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며,
아니면 계속 광야의 방황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가데스바네아라고 하는 경계선은 한 인간의 인생이나
한 가정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로가 아니고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로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유부단했고,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지만
그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했으며,
정체감의 혼란과 정서적인 불안으로 인해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가데스바네아라고 하는 경계선에서
믿음 없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계선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셨다.
“너희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전진하라.
가데스바네아의 경계선을 넘어가라!”는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경계선상에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뒤로 돌아가고 방황을 계속하는 실패를 겪게 되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다.
12정탐꾼들이 40일 동안 탐지한 후에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를 하였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민수기 13:28절의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는 불신앙의 접속사이다.
이 ‘그러나’ 접속사가 한번 들어와 버리면
앞에 나온 모든 축복들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게 된다.
이들이 말하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분명히 크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장애도 거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장애가 있어도, 방해요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뚫고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지,
장애도 없고 방해도 없고 환란과 근심도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몇 가지 장애물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부정적인 태도이다.
민수기 13:31절 말씀을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태도가 부정적이면
“못하리라. 안되리라. 어려우리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강해서 이겼던가?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들의 힘이 강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과장도 잘한다.
민수기 13:32-33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었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이 “모든”이라는 단어를 과장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백성들이 다 신장이 장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인 몇 명 있는 사실을 가지고
과장해서 모든 백성이 다 거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할 때도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더불어 이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들이 메뚜기 같다는 자기 비하에 빠지고 말았다.
자기를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사실인양 생각했다.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뚜기처럼 생각하는지 알게 무엇인가?
실상은 그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남의 생각을 자기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둘째는 두려움의 장애물이었다.
민수기 14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참으로 불신앙적인 슬픔이다.
이들은 울면서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죽을까 봐, 그들의 처자가 죽을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시편 27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편 27편 3절에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다윗은 선언하고 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두려움의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인도에만 가면 부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도는 금이 많은 나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인도를 가기 위해서는 육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해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배로 인도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스페인 국왕에게 배와 선원을 지원해 달라고 8년 동안을 졸랐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먼 거리에 나가는 것을 꺼렸다.
바다 끝에 있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간신히 스페인 국왕을 설득하여 항해를 시작했을 때도,
선원들이 매일 같이 두려워하며 콜럼버스를 설득했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 10월 12일의 하루 전인
11일까지도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되돌아가자고
난동을 부렸다는 사실을 항해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선 콜럼버스는
결국 신대륙을 발견하는 신기원을 이루고 말았다.
두려움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믿음의 용기만이 경계선을 넘어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이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떨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선포하였다.
세상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밥이다.
밥은 먹는 것이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우리가 왜 메뚜기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 때 경계선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경계선을 넘어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부요의 축복을 쟁취해야 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경계선에 서 있는가?
- 1년 1독 성경통독 학교, 꿀송이 보약 큐티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 <2025년2월11일,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