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 황동규
- 2005년 8월 6일 오후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港 동편
성벽에 올라 비석에 망인의 이름 대신 자유인이라는
글발 몇을 적은 <희랍인 조르바> 작가의 무덤을 찾았다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했다.
오른팔을 약간 삐딱하게 치켜든 큰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 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 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떨치듯이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발밑에서 메뚜기가 튄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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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1883.2.28~1957.10.26)
그리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 크레타섬 이라클리온 출신이다.
아테네에서 법학을 배웠고, 파리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였다.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다. 당시 유럽의 철학·문예·사회사조 등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자연인의 본원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이러한 신념은 고향을 무대로 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
Vios kai politia tou Alexi Zormpa>(1947)에 잘 반영되었다.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자유...!
희랍인 조르바 작중 화자인 나는 우연히 교육을 받지 않은
늙은 노동자인 조르바를고용하게 된다. 세상사 근심걱정을 혼자
짊어지고 본능이 부르는 소리마저 애써 억누르려 하는 전형적인
'먹물'인 나에게 조르바는 계획에 매이지 않고, 성공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계속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질긴 생명력의 존재이자
술과 음악에 미쳐있고 여자만 보면 팔짝팔짝 뛰는, 도무지 앞뒤를
재는 법도 없고 당장 숨쉬는 그 순간에만 몰두하는 거침없고도
자유로운 인물이다. 도자기를 빚는데 손가락이 걸리적거린다고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버리기도 하고 모든 것을 투자했던 사업이
일 순간에 무너진 후에도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홀연해지는 이 매력적인 사나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글로써 세상에 조르바를 알리는
일이다. 그는 야성을 지키고 있는 자연인이다. 무당이기도 하고
진정한 의미의 승려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 손 안에
쥐고 산다. 그의 눈엔 매일 아침 뜨는 태양이 다르고 늘 보던
길마저 새롭다. 언덕을 구르는 돌멩이를 보면 "돌멩이조차 생명을
가지고 있구나"면서 아이처럼 탄성을 지른다. 세상 모든 것이
늘 신비롭고 즐겁다. 그가 술에 취해 추는 춤은 신들린 무당의
춤처럼 우주를 이야기한다. 그의 생은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보스, 당신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에서 멀어져 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약간의 광기(狂氣)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광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 당신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다분히 불교적이다.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는 붓다를 따랐지만 동시에
조르바를 동경했다. 붓다는 욕망의 불꽃을 끈 자다.
조르바는 야성의 욕망을 아낌없이 태우는 자다. 어떻게 이 둘을
한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그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런 물음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가 조르바를 바라본다.
화자는 물론 카잔차키스 자신이다. "어린 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어린 아이 같은 조르바가
애늙은이 같은 화자에게 묻는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붓다의 자유는 서늘하다. 조르바의 자유는 뜨겁다.
그렇다면 카잔차키스의 자유는 어느 쪽일까?
그의 자유는 헷갈린다. 붓다의 영혼과 조르바의 육체가 양쪽에서
끌어당긴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눠
헷갈리지 말고 둘을 합치라 한다.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가
되라고 한다. 조르바로도 부족하고, 붓다로도 부족하니 둘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total) 인간'이 되라고 한다. "조르바는 장님이다.
그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춤추고 노래할 줄 안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안다. 붓다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저 볼 뿐이다.
그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순수한 눈을 갖고 있지만 춤추는
재주가 없다. 그는 앉은뱅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할 줄 모른다.
이 삶을 즐기는 법을 모른다." 장님과 앉은뱅이가 불난 집에서
무사히 나가는 법!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뛴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어울리는 법도 똑같다. 조르바가 붓다를 엎고 뛴다.
'조르바 붓다'가 되어 조르바의 기쁨과 붓다의 평온을 함께 누린다.
조르바는 삶을 축제로 만든다. 붓다는 삶을 평화로 이끈다.
둘이 다투면 삶은 억압되고 분열된다. 조르바는 평화를 깨고
붓다는 축제를 망친다.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둘이 손을 잡으면 삶은 온전한 자유가 된다. 억압과 분열이 없는
통합이 된다. 조르바는 평화에 잠기고 붓다는 축제에 눈뜬다.
'조르바 붓다'는 오쇼가 그린 최고의 인간상이다. 신인류다.
그는 평생 '조르바 붓다'를 외치고 가르쳤다.
그는 "정신과 물질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양쪽 모두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이, 엄청난 주시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에
에피쿠로스일 것이다."
카잔카키스가 평생 구한 자유는 '조르바 붓다'의 자유였다.
그는 '조르바 붓다'가 되고자 했다. 정신과 물질을 가르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뛰어넘어 둘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는,
양쪽 모두의 풍요를 누리는 자를 꿈꿨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가 고백한다. 마치 조르바처럼 여인를 품고 돌아온 부활절
다음 날이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영혼과 육체는 다르지 않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미묘한 육체다. 육체는 눈에 보이는 거친
영혼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을 손에 쥐려면 '조르바
붓다'가 되라. 위대한 자유인 '조르바 붓다'가 되라. 조르바와
붓다를 합친 신인류로 살 때 누구든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 <그리스인 조르바> 468쪽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출처] 황동규 시인 1|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