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
귀양가면서
嗚馬遲回立水頭(오마지회립수두)-우는 말 물가에서 이리 저리 맴도는데
牟縣北路悠悠(모현북로유유)-중모현 북쪽으로 뻗은 길 하염 없구나
驛亭斜出秋風嶺(역정사출추풍령)-역정 너머 비스듬히 추풍령이 솟았고
山雨遙封矗石樓(산우요봉촉석루)-산중 비는 아스라이 촉석류를 에워쌓네
已誤此生輕許國(이오차생경허국)-이 인생 나라에 선뜻 바친 것이 잘못이라
不須良苦老知州(부수량고노지주)-괴로울사 늘그막에 수령될 것 없고말고
田間倚杖翁堪羨(전간의장옹감선)-밭고랑에 지팡이 기댄 할아버지가 부럽구나
閒遣諸男暮牧牛(한견제남모목우)-한가히 아들을 보내 석양에 소를 친다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손학규씨 강진 토굴생활 다산(茶山) 강진유배 흉내?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이 2014년 7월 30일
재·보궐선거 경기 수원 팔달에서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 뒷산 백련사(白蓮寺) 인근 토담집에
칩거(蟄居)하고 있는 것이 1년이 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2015.7.31. 동아일보 기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손학규씨는 이 토굴에서 자신의 정치 활동을 정리하는
저술을 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강진(康津)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나오니까 먼저 다산(茶山)선생의
자료를 몇 가지 간추려 보고자 한다.
필자는 1976년경에 전남 강진(康津)의 다산초당(茶山草堂),
해남(海南) 연동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녹우당(綠雨堂)을 여러 번 답사하였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강진 만덕산(萬德山) 남쪽 자락에 있다.
만덕산 허리위치에는 유서 깊은 백련사(白蓮寺:일명 萬德寺)가 있다.
만덕산(萬德山)은 야생차가 많이 있어 일명 다산(茶山)이라고 불렀다.
정약용(丁若鏞)의 호(號) “다산(茶山)”도 이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삼거리→무명봉→정상→금수암→초의 선사선사 일지암(一枝庵)토굴→동백나무숲→백련사→다산초당(茶山草堂) 이런 코스의 산길이 있다.
강진으로 유배(流配)온 다산(茶山)은 만덕산(萬德山) 자락에 초가집(草屋-다산초당)을 짓고 솔방울불로 차를 다려 마시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포(經世類表)” “흠흠신서(欽欽新書)”등 18년동안 8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그리고
한국역사에 영원히 빛날 그 이름 추사 김정희,
한국 차(茶)의 다조(茶祖)라 할 수 있고,
중국에 육우(陸羽) 다경(茶經)이 있다면
조선에 동다송(東茶頌)을 쓴 초의선사(草衣禪師),
이 두 명사(名士)와 교우(交友)하였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앞날이 창창한 엘리트 관료였던 다산(茶山)은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 생활로
전남 강진에 유배(流配)하게 된다.
1801년 음력 11월 22,23일경 역적(逆賊)죄인 신분으로 천리 고지(孤地) 먼 바닷가
강진읍에 도착한 다산의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서운 전염병 환자라도 만난 듯 모두 문을 닫고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잠잘곳은 물론 세끼를 제대로 먹을 형편이 안 되다.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보다.
강진 동네 한 주막의 늙은 노파가 다산(茶山)의 어려움을 보고 자기의 주막집에
거처할 것을 허락해 주었다.
구세주였다.
천추에 칭송받을 의로운 여인이었다.
강진읍 동문밖 샘거리에 있던 흙으로 지은 토담 주막집이었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주린 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천한 아전들의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잠을 자고, 책을 읽고, 밥을 먹었던 곳이 바로 흙담집 초가삼간
늙은 노파의 주막(酒幕),
다산은 4년간 이 주막에서 기거하며 “경세유표” 등을 집필했고
주막집에 “사의재(四宜齋)”란 당호(堂號)를 이름 지었다.
“사의재(四宜齋)” 뜻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집”이라는 뜻으로,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하였다.
이 흙담집이 다산문학의 요람이 될 줄이야 !
다산은 노파의 주막에서 4년을 보낸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었고,
그 다음해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제자가 된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마침내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이곳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橘洞)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橘林)처사 윤단(尹摶) 의 산정(山亭)이었다.
다산(茶山)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명문(名門)이며,
국보 240호의 자화상 주인공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저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니,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다산 정약용에게 외가 쪽이었다.
다산(茶山)의 유배생활 고초는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건강으로 고생한 글이 있다.
다산은 1811년 50세 때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입가에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마비 증상이 있고 혀가 굳어져 말이
어긋난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한국 의학사 전공인 신동원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글에서)
신 교수는 “지금은 의학 발전으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오는 고통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다산(茶山)은 귀양살이 처지에 건강에 도움 되는 영양가 있는 음식이 중요했다.
다행히 강진 인근에 살고 있던 다산 부친의 친구가 인근에서 가장 부호여서
도움을 받았고,
그리고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경제적인 도움이 있었다,
또 당대 최고의 학자가 강진 시골에 귀양 온 것을 알게 된후
인근에서 자손들의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줄을 잇게 되었다.
그래서 경제적 도움도 되어 여유 있는 생활과 함께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정지천 내과 과장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중년 이후의 남성은 건강을 위한 육식동물의 단백질과
남성호르몬의 적절한 배출인 성생활이 중요하다.
괴롭고 외로운 귀양살이를 오래 하는 다산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 또 있었다.
가까이 있는 표서방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표서방은 음식 솜씨 좋은 딸이 만든 음식을 다산에게 매일 날라다 주게 하였는데,
표서방 딸의 음식으로 다산이 입맛과 기력을 되찾은 낌새를 눈치 챈 주모는
아예 다산의 밥상까지 그녀에게 들려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녀가 끼니마다 정성껏 마련해 주는 음식은 보약이 되어 다산의 건강을 회복시켰다.
표씨 여인은 다산의 잔심부름까지 맡게 되고 귀양살이하는 다산에게 큰 위안과
도움이 되었다.
표씨 여인은 스물 두 살의 청상과부였다.
남편이 돌림병으로 죽자 자식도 없이 친정에 와 있었다.
밥상이 인연이 되어
표씨 여인은 다산의 첩실이 되었고, 다산과 그녀 사이에 딸이 하나 생겼다고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다산(茶山)선생의 당호(堂號)인
“여유당(與猶堂)”에 다산의 묘소를 포함한 유적지가 있다.
당호(堂號)인 “여유당(與猶堂)”은 다산 선생이 강진 유배전인 1800년(정조24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직접 지은 것이다.
당쟁으로 인한 노론(老論) 벽파(辟派)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어 낙향한 것이다.
다산은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 위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극히 몸조심하며 은신(隱身)하였다.
“여유(與猶)”는
노자 도덕경15장에서 따온 것이다.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조심하는 것이 얼어있는 개천을 건너는 듯하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다.
험악한 당쟁의 현실을 떠나 “코끼리가 살얼음을 건너듯” 조심해서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막내아들도 벼슬을 하지 말고 농사를 지으며 살라고 농아(農兒)라고
이름을 지었다.
우리 역사의 불행이라 할까
우리 역사 최고의 지성(知性)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갔지만 다산(茶山)의 향기는 코앞에 항상 있다.
손학규씨가 국내의 여러 곳을 두고
우리 역사 최고의 지성(知性)이며 개혁자(改革者) 유허지(遺墟地)에
토막집 생활을 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다산(茶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 지도자 시진핑도 16세의 청년시절 아버지의 정치 실각 이후
산시성(陝西省)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야오둥(窯洞·토굴) 3평되는 토굴에서
7년간 생활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치 철학을 다졌다고 한다.
(2014.6.28. 조선일보 기사)
정치인의 행보(行步)에 대하여 이래저래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다산 유배 18년을 흉내나 내는,
전시 효과의 토굴 체험이 아니기를 바란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