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화요일(루카 8,19-21)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비율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더 낫다고 감히 고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 안에서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우리는 형제입니다.’ 하고 인사하시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님께 인간적인 생명을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울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첫댓글 알브레히트 알트드로퍼의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는 그리스도>, 1520년경, 영국 런던 국립 미술관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떠나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 내용의 설명이 아닌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의 모자 관계에서 보이는 성모님의 정감과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사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구세주이시긴 하나 성모님에게는 더 없이 사랑하는 아들이시기에 성모님은 아들을 자기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해 떠나지 말길 바라고 있다. 성모님은 거의 실성 상태에 있기에 다른 세 여인들이 성모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방 오른쪽의 한 여인은 제자들에게 성모님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어 주시길 요청하는 모습이다. 작품 배경의 나무는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북구 작가들이 자주 사용했던 배경이며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예수님의 뒤편 하늘은 석양이다. 십자가를 향해 떠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 고맙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서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아멘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맞아드리고 믿는사람"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