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눈을 즈려밟고
이월 둘째 수요일은 을사년 대보름날이다. 새벽에 잠을 깨 어둠 속 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새하얀 눈이 쌓여 갔다. 우리 고장 남녘은 눈 구경을 못 하고 겨울을 넘기는 해가 있기도 하다. 올겨울은 지난 입춘 이후 닥친 한파에 낮 시간대에 일시나마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은 도서관에 머물렀는데 열람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이번에는 적설량을 제대로 기록할 만큼 쌓이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눈은 진눈깨비가 되었다가 비로 바뀔 듯했다. 눈을 포함한 강수량은 많지 않을 듯했다.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고 바람이 세지 않아 아침 식후 산책을 나섰다. 마음에 둔 행선지는 두 군데였는데 일단 마산역 앞으로 나가야 했다. 눈은 금방 녹으면서 길을 빙판이 되지 않아 차량 운행은 어려움이 없어 보였으나 노면이 젖어 있어 평소보다 출근길이 더 혼잡해 보였다.
101번 시내버스로 충혼탑 사거리를 통과할 때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지로 가는 농어촌 버스는 놓치게 되었다. 본디 칠서 이룡 강나루 생태공원에서 둔치 보리밭을 지나 창녕함안보 강변을 거쳐 오려던 마음은 거두었다. 그다음 차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대체 행선지를 물색했다. 진동 방면으로 나가 여항산이 서북산으로 뻗친 임도를 걸을 셈이다.
마산역 광장 모퉁이에서 진전 상평으로 가는 75번 버스를 탔다. 마산 시내를 벗어나 밤밭고개를 넘어간 현동을 교차로를 지나자 새벽에 내린 눈은 녹아 설경은 볼 수 없었다. 진동 환승장에 들러 곧장 진북면 소재지에서 진전면 오서로 향해 옛길 2호 국도를 따라 양촌에서 대정과 상촌을 지났다. 거락을 지날 때 천변에 줄지은 노거수와 응달 산자락은 눈이 덜 녹아 깊은 산골다웠다.
평암 저수지를 지난 종점을 앞둔 미천마을에서 내리고 남은 한 할머니는 상평까지 가는 듯했다. 차에서 내리니 기온은 포근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 산행에 어려움이 없을 듯했다. 미천에서 부재골로 오르니 일전까지 추웠던 날씨에 개울에는 녹지 않은 빙판과 고드름이 보였다. 새벽에 내린 눈은 거의 녹고 안개가 번져가는 즈음이었다. 몇몇 전원주택을 지난 깊숙한 골짜기로 들었다.
현직 시절 시내 학교에서 먼저 퇴직한 지인의 농장을 지났는데 주인장은 농막에 머물지 않은 때였다. 지난해 늦가을 그곳을 지나다 지인이 뽑아준 무는 여태 남았고 무청은 말려 시래기로 만들어 잘 먹었다. 농사를 잘 지어 나는 신농씨로 불러주는 이다. 전정을 마친 매실나무는 봄을 기다렸는데 해발고도가 높아 꽃이 늦게 피고 어떤 해 추위에 꽃이 얼어 결실을 보지 못하기도 했다.
전원 택지와 텃밭을 지나 버섯을 키우는 산중으로 들어 부재고개로 올랐다. 새벽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곳이라도 얼어붙지 않아 등산화 바닥에 와 닿은 촉감이 좋았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숫눈에 맨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겼다. 멧돼지나 노루가 있을 법한 숲이 무성한 산임에도 네발짐승이 지난 흔적은 없었다. 부재고개 갈림길에 닿아 서북동이 아닌 의림사 방향으로 향했다.
가을에 북향 임도를 지나면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수를 놓는 언덕은 눈이 쌓였다. 수리봉과 인성산으로 나뉘는 등산로가 아닌 임도를 따라 내려서니 골짜기는 운해가 펼쳐졌다, 날씨가 맑은 날엔 광암바다와 거제섬이 드러나는데 운무가 앞을 가렸다. 굽이진 임도 산기슭에 자생하는 삼지닥나무는 꽃망울이 달려갔다. 의림사에 닿으니 법회를 마친 불자들은 오곡밥 점심 공양 때였다
객도 공양간에서 대접으로 배식받아 잘 먹었다. 지난날 유서가 깊은 절이었으나 전쟁 전란을 겪어오면서 폐사지나 다름없었는데 근년에 중창해 일주문과 법당이 새로워져 위엄을 갖추었다. 의림사는 범어사 말사로 경내에 고려 초기 석탑이 있고 수형이 잘 잡힌 고목 모과나무는 도지정 기념물이다. 법당을 향해 손을 한 번 더 모으고 산문을 나와 시내로 가는 74번 버스를 탔다. 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