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거운 음악
멸(滅)에 가려네
낮밤이 없이
반음씩 내려가면
정적만이 남을 텐데
그게 바로
맑은 먼지
화엄도 도솔도 없는
어머니의 먼 실루엣
말갛다
멸(滅)한 자리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2025.03.09. -
허충순 시인의 이 시를 읽으니 기억은 찻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짙은 푸른빛이었다가 우려낼수록 점차 묽어져 종내(終乃) 연한 빛만이 찻잔에 보일 듯 말 듯 도는 녹차의 찻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흐릿해지는 기억을 “(음악이) 반음씩 내려가”는 것에 빗댄다. 생전 어머니의 형상과 삶의 음악과 기억도 시간이 물처럼 흐르면서 “낮밤이 없이” 희미해져 끝내는 정적에 이르고, “맑은 먼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만 그러하겠는가. 생멸(生滅)이 있는 모든 존재가 그러할 테다. 실루엣마저 어렴풋하고 아득해져서 맑은 고요 속에 잠길 테다.
허충순 시인의 시에는 “모시 깃 같은 마음결”이 배어 있다. 아마도 시인이 다도(茶道)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 ‘범어사에 내리는 눈’에서 “찻잎 냄새 나는 눈이 온다// 한 송이는 수세(樹勢)가 쇠약해진 도토리나무에 맴돈다// 노약하다고 해도 아리고 떫은 외로움”이라고 수일(秀逸)하게 노래한 것도 이러한 이력의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