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필자(筆者)가 “온주밀감”(溫州蜜柑)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밀감류(蜜柑類)의 원산지(原産地)는 약3천만년전의 인도, 태국, 미얀마 근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것은 중국(中國)이었고, 기원전 22세기 문헌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감귤(柑橘) 품종(品種)의 개념도 역시 중국이 최초였고, 무려 약4천년전의 재배사(栽培史: “橘誌”)에서는 그 품종을 감(柑), 귤(橘), 등(橙)으로 크게 구분하고, 감(柑) 18품종, 귤(橘) 14품종, 등(橙) 5품종으로 나누어 특성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http://www.mint-j.com/fruit/03/3_02.htm]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밀감(蜜柑; みかん)이라고 하는 과일의 정식 명칭은 온주밀감(溫州蜜柑)이며,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과일이라고 한다.
그럼, 온주밀감의 원산지는 어디인가?
엉뚱하게도, 일본의 연구자들은 일본 카고시마(鹿児島) 현(県)의 나가시마(長島)라고 한다.
영어권 국가에서 온주밀감을 “サツマオレンジ”(Satsuma Orange), “サツママンダリン”(Satsuma Mandarin)라고 부르기 때문이라 한다.
카고시마(鹿児島) 현(県) 서부 지역의 옛 이름은 사츠마(薩摩; サツマ; 이른바 “薩州”)라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그 당시에 일본의 사츠마가 (중국)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온주밀감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일본의 연구자들은 감귤류(柑橘類)의 유명한 생산지인 중국 온주(溫州)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지어진 명칭이며, 온주밀감이라는 품종 자체가 중국 온주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출처=http://www.excite.co.jp/News/bit/00091202448927.html]
중국의 연구자에 따르면, 온주밀감은 ‘15세기 초엽’ 일본에서 중국 천대산(天台山)으로 유학한 승려가 귀국하는 도중에 중국 온주(지금의 浙江省 温州府)를 거쳤는데, 그곳에서 온주밀감과 ‘유사한’ 과실(果實)을 사서 돌아와, 나가시마(長島)의 절에 그 종자(種子)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연구자는 “그 당시 중국 온주에는 온주밀감의 유사품은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나가시마(長島)에서는 300년도 더 된 온주밀감의 고목(古木)이 300년전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큐-슈-(九州)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었다가 메이지(明治; 1868년~1912년)시대부터 일본 전국에서 재배되었다고 주장한다.
[출처=http://www.mint-j.com/fruit/03/3_02.htm]
또 다른 일본의 연구자에 따르면, 온주밀감(温州蜜柑)은 ‘17세기 초엽’ 즉 에도(江戸)시대 초기에 중국 절강성(浙江省)에서 전해진 조귤(早橘; ソウキツ)와 만귤(慢橘; マンキツ) 등의 감귤류(柑橘類)에서 우발실생(偶発実生: 자연교잡이거나 개량의 목적 없이 얻은 실생)한 품종이라고 본다. 여기서 실생(実生)이란 종자에서 발아하여 생긴 식물을 말한다. 그 후 약300년간 큐-슈-(九州) 지방에서만 재배되었는데, 메이지(明治; 1868년~1912년)시대부터 타이쇼-(大正; 1912년~1926년)시대에 걸쳐 다른 지방에도 전해졌고, 그 후에 여러 우량 계통이 만들어져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품종은 크게 나누어 극조생종(極早生種), 조생종(早生種), 보통종(普通種)의 3품종이라고 한다.
[출처=http://ebn.arkray.co.jp/disciplines/carotenoid/beta-cryptoxanthin-03.html]
일본 연구자와 중국 연구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일본산 온주밀감의 유래 시기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밀감(蜜柑)은 엄밀하게 말하면 귤(橘)이 아니고, 귤(橘)이나 감자(柑子)에서 변형된 과일이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는 귤(橘)과 감귤(柑橘)이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하는데, 온주귤(溫州橘)이라는 명칭은 세종 5년(1423년) 기사에 단 1건만 나온다.
일본의 구주 총관(九州 摠管) 원의준(源義俊)이 토산물을 바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언급된 ‘온주귤’은 ‘온주밀감’과 다른 것인가?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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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9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월 1일(계미) 3번째기사
구주 총관 원의준이 서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치다
구주 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니, 그를 접대하기를 명하였다. 의준이 예조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에 전 대왕(前大王)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놀라 애통(哀慟)의 극함을 견디지 못하였사오니, 창천(蒼天), 창천(蒼天)이여, 다른 이보다 만배나 〈슬픔이〉 더했습니다. 도리로서는 마땅히 소위(素緯)에 배례(拜禮)하여야 될 것이오나, 험한 물결이 아득하여 빨리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니, 이런 까닭으로 삼가 행인(行人) 성은(性恩)을 보내어 글을 올립니다. 상상하건대, 성려(聖慮)의 슬퍼하심이나, 경상(卿相)과 각로(閣老)들의 사모하며 고민함이 쉽사리 가실 수 없으리니, 답답히 앉아서 홀로 애만 탈 뿐이오며,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변변치 못한 정성을 미루어 성총(聖聰)께 아뢰옵기를 끝까지 비옵고 조그만 예물로 토산물을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수납(收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 조그만 예물은 뒤에 적사오니, 비록 변변하지는 못한 물건이지마는 전 대왕(前王)께 올리는 제공(祭供)에 바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진실로 밝고 참다운 마음이라면 시내와 늪에 있는 풀이나 빈번(蘋蘩)·온조(蘊藻)와 같은 채소라도 귀신께 드릴 수도 있고, 왕공(王公)께 바칠 수도 있는 것이옵기, 이로써 잠깐 신의(信義)만 표합니다. 조그만 예물은 소목(蘇木) 1천 근(斤), 서각(犀角) 3개(介), 곽향(藿香) 40근, 정향피(丁香皮) 20근, 유황(硫黃) 5천 근, 명반(明礬) 4백 근, 절부(折敷) 20매(枚), 소향유(蘇香油) 2근, 금란(金欄) 1단(段), 감초(甘草) 20근, 주분(朱盆) 2개, 당주(唐朱) 1근이고, 제공(祭供)의 조그만 예물은 소면(素麪) 30근, 갈분(葛粉) 15근, 침향(沈香) 2근, 납거(蠟炬) 50개, 온주귤(溫州橘) 1천 개입니다.”하였다.
(後略)
九州摠管源義俊使人進土物, 命饋之。 義俊奉書于禮曹曰:
爰承前大王登仙, 寸心驚動, 不堪哀慟之極, 蒼天蒼天, 倍萬于他者也。 誼合自拜素幃, 鯨波渺瀰, 阻於趨造。 是故謹命行人性恩奉書。 想見聖慮悼念, 卿相閣老攀慕荼苦, 未易排遣, 沓然坐感我私而已。 伏願台照, 推予區區之誠, 以達聖聰至禱。 小禮土宜, 在于別楮, 啓納幸甚。 又有小禮, 陳于後矣。 雖是輕薄之物, 用爲前大王祭供之資助者也。 所謂苟有明信, 澗溪沼沚之毛、蘋蘩蘊藻之菜, 可薦於鬼神, 可羞於王公。 是以聊表信爾。 小禮: 蘇木一千觔, 犀角三箇, 藿香四十觔, 丁香皮二十觔, 硫黃五千觔, 明礬四百觔, 折敷二十枚, 蘇香油二觔, 金襴一段, 甘草二十觔, 朱盆二箇, 唐朱一斤。 祭供小禮: 素麪三十觔, 葛粉十五觔, 沈香二斤, 蠟炬五十, 溫州橘一千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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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우리나라의 귤(橘)에 관해서는 18세기에 조선인(朝鮮人) 정운경(鄭運經; 1699년~1753년)이 작성한 탐라견문록(耽羅見聞錄)의 탐라귤보(耽羅橘譜)에 상품 5종, 중품 5종, 하품 5종이 나온다. (총15종)
약4천년전 중국의 귤 재배사(栽培史: “橘誌”)에서는 귤(橘)을 14품종으로 구분하였는데, 탐라의 귤은 무려 15품종이므로 거의 원산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하여 그 당시에 탐라는 (중국)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밀감류(蜜柑類)의 원산지(原産地)는 약3천만년전의 인도, 태국, 미얀마 근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사츠마(薩摩)나 조선의 탐라(耽羅)를 그 쪽으로 비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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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의 저서 '탐라견문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을 소개하면,
(前略)
탐라견문록은 전체 6부로 구성돼 있다.
정운경 자신의 저술이 아니라 기존 제주 관련 기록을 추려 뽑은 '영해기문'(瀛海奇聞)을 필두로, 제1차 탐라 기행문인 '탐라기'(耽羅記), 제2차 기행문인 '순해록'(循海錄), 제주 풍물에 관한 견문인 '해산잡지'(海山雜誌), 제주도 표류민 인터뷰 기록인 '탐라견문록'(耽羅見聞錄), 그리고 제주 귤감에 대한 종합 품평보고서라 할 만한 '귤보'(橘譜)가 그것이다.
이 중 제주를 '영해'(瀛海)로 기록한 것은 이곳을 봉래, 방장산과 함께 도교의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瀛州)로 간주했기 때문이며, 제주 귤감을 상ㆍ중ㆍ하 3등급으로 대별한 것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이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본초약물 3분법 체계에 따른 것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표류 경험이 있는 제주인 14명을 인터뷰한 탐라견문록. 정운경이 직접 그들을 탐문한 결과 이 중 해외 표류는 13건이었으며 나머지 1건은 국내 표류였다. 해외 표류지는 일본이 9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대만 2건, 유구국(현 오키나와) 1건, 그리고 머나먼 안남국(베트남)까지 표류한 사례도 있었다.
인터뷰 대상자 중 최연장자는 1679년에 일본 취방도라는 곳으로 표류한 적이 있는 관노(官奴) 우빈이었다. 정운경이 그를 인터뷰한 시점은 사건 발생 52년이 흐른 뒤였다. 1687년 안남국에 표류한 고상영이란 사람도 45년전의 사건을 회상했다.
이에서 일어나는 궁금증. 과연 이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귀국했을까?
안남 표류민은 중국상선을 통해 귀국한 반면, 일본 표류민은 워낙 이런 일이 빈발했기 때문인지, 그리고 대체로 표류지가 규슈였기 때문인지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일본 에도정부 당국에 의해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귀국 조치가 이뤄졌다.
유구국으로 표류한 김일남과 부차웅 일행은 표류 이후 무려 2년 2개월 9일만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後略)
[출처=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Print/YIBW_showArticlePrintView.aspx?contents_id=AKR200801151477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