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시경준비를 하며]
어제는 건강검진을 했지요.
다른 사람들은 40을 넘어서면서 주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했다고 하데요? 그런데 저는 특별히 이상을 느끼지 않으면 그럴 필요가 없는 줄로 알고 이제껏 위내시경만 했지요. 위내시경은 해마다 받았는데, 그것도 몇 년 전부터 - 건강검진을 통해서 암수술을 받는 직장동료를 보면서부터였지요.
대장내시경, 받아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전날 저녁을 가볍게 먹고서 무슨 알약을 두 알 먹으라고 미리 주데요? 오래 전 아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 변비가 심해서 ‘둘코락스’인가 하는 노르스름하고 조그만 알약을 사다 준 적이 있는데, 약을 먹는 목적이 같다는 생각에서 그런지 몰라도 그 ‘둘코락스’일 거라는 생각이 들데요? 그렇다고 뭐 확실하다는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약국에 가지고 가서 대조할 필요까지야 없어서 그쯤에서 접었지만, 왠지 20여 년 전에 한 번 보았던 그 ‘둘코락스’가 내게 준 이미지며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있더라고요? 아마도 변비만큼 고통스럽고 해소가 절실한 것도 드문 증상이라는 반증일 수 있겠네요? 게다가 첫아이를 갖자마자 엄청난 입덧으로 시위(?)를 하느라 - 병원에서 링거로 연명한 아내의 변비에 대한 기억이니 앞으로도 평생 기억되고도 남을 그 알약이 아니겠어요?
아마도 입덧과 아이의 성별이며 용모며 키며 능력이며 나아가 효도가 비례한다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일부러라도 입덧을 선택적으로 증폭시키며 노골적으로 시위할 터이지만, 뱃속에 있을 때 오로지 제 녀석만을 위해서 생존에 허덕였을 정도로 애먹이던 아들 녀석의 무뚝뚝함 때문에 요즘의 아내는 그때의 입덧을 무르고 싶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한편, 그 입덧으로 인한 변비 때문에 둘코락스를 아직도 기억할 정도인 저도 방법만 다를 뿐 녀석의 입덧을 한 게 틀림없으니만치, 나이 늘자 말수 적어지는 녀석에게 느끼는 것이 어찌 아내만의 서운함이겠어요?
이거, 대장내시경 얘기를 하다가 곁길로 갔네요? 그렇게 ‘둘코락스’인가 싶은 알약을 먹고, 한 시간 후에 노란색의 물약(장 세척제?)을 주스에 타서 마시고는 5분마다 한 컵씩 4리터의 물을 마시라고 하데요? 아마 맥주를 그렇게 마시라면 사양할 사람이 드물겠지만, 아주 고역이데요? 왜 같은 물인데 맥주처럼 소변으로 바뀌는 시간이며 양이 그리도 다른지, 걷기라도 해야 대사가 되겠다싶어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물을 채워 들고, 빵빵한 배를 내려다보며 동네 공원으로 나갔지요.
여름날 저녁의 공원풍경이 다들 그렇듯이, 혼자서 뛰는 사람, 손잡고 걷는 사람, 먹고 마시는 사람, 보채는 아이마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노부부며, 자전거며 롤러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이 아주 제철을 만났데요? 나뭇잎이 살랑거릴 정도로 알맞게 부는 산들바람이며, 롤러스케이트장이며 가족단위의 야외식사를 할 수 있는 탁자며, 잘 조경된 공원풍경 속에서 그야말로 초여름날의 저녁을 만끽하고들 있더라고요? 문득, “여름날 저녁어스름의 한 시간은 천 냥의 값을 한다.”던 소식(蘇軾)의 말이 생각나서 콧노래가 흥얼거려지데요? 그러나 그런 풍류도 순간이더라고요. 갑자기 아랫배에 통증이 온다 싶더니, 한 100여 미터 앞에 있는 화장실까지 갈 형편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지요. 그건 과거의 유사했던 경험이 가져오는 예측처럼 다소의 시간적 여유를 동반하는 게 아니라, 이미 통제력을 잃은 괄약근의 탄성한계이자 항복점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리는 즉각적 감각이었지요. 순간의 좌절과 낭패감이 주는 반동과 이성과 의지로 극복할 상황이 아님을 납득하는 동시에, 저의 생애에서 가장 재빠른 판단과 동작으로 근처의 도랑으로 뛰어들었지요. 마침 가까운 주위에 가로등도 행인도 없었고, 도랑을 따라 아이들 키 높이의 관목이 늘어서서 당시의 위기를 모면하기엔 그만한 장소가 없었지요. 물론, 옆에 그 누가 있었거나 가로등 바로 밑이었거나 몸을 가릴 관목 따위가 없었다 해도 제가 취할 다른 도리는 없었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헐렁한 고무줄을 넣은 반바지를 입었기에 그나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채 앉기도 전에 그야말로 나이야 가라는 듯이 쏟아지더군요. 물론, 평소에 있음직한 배설의 쾌감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지요. 또 좌절과 낭패감을 느낄 겨를도 상황도 아니었지요. 그건 아마도 설사를 대비해서 괄약근만을 집중적으로 단련한 인도의 어떤 요가수도승일지라도 불가능한 통제였을 겁니다.
이성이나 의지나 특별히 단련된 신체의 특정부위로 극복할 상황이 아님을 납득해야만 할 때 뻔뻔스러움의 의미가 얼마나 상대적이며 선택적이고 자의적 판단에 기초한 것인지를 알 것 같데요?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형법에 뻔뻔스러움을 처벌할 조항이 없는지도 모르지요? 말하자면 세상에 싸대기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뻔뻔스러워 못 봐줄 일들이 많지만, 온 백성들에게 두루두루 형평성 있게 적용할 수 없는 ‘뻔뻔죄’ 처벌조항을 만든다면 그 적용에 있어서 그 얼마나 많은 논쟁과 비용이 따르겠냐는 것이지요. 즉 경찰이나 변호사나 검찰, 법관이며 부수적 인력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날 것이며, 죄형법정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국가예산의 낭비가 심할 거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요? 그런데 어찌됐건 제가 도랑에 뛰어들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그 뻔뻔스러움을 관통해버린다는 것은 평소의 행동원칙과 행동양식을 통제하는 의식의 껍질을 돌파(Breakthrough)했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일단 무의식적 본능으로 급한 불을 끄고 보니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순간적으로 엄청난 낭패감을 느꼈다는 것이 오히려 창피하게 여겨질 정도로 제 스스로가 대범(?)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 참......
첫댓글 수고하셨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계속 읽어주시기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