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도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은 그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기억될 만하다. 여성이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던 시대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라면 그의 위치와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어서 서양사에서도 여성의 이름은 세기를 통틀어 고작 한두 명 정도 밖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남성의 곁에서 활동한 인물이 아니라 독자적인 활동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드문 여성 가운데 하나가 히파티아(Hypatia)다.
400년 무렵, 그러니까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활동한 히파티아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라고 할 만하다. 그의 부친인 테온은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주석서를 붙일 정도였다. 히파티아는 개화된 부친 덕분에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고작 40여 년을 살다 간 그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 무렵 로마제국에서는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철학이 단순히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앙이 담당해야 할 분야에까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적이고 이교적인 신플라톤주의에 기울어 있는 히파티아 같은 철학자들은 기독교인들과 갈등을 조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수학과 철학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히파티아는 그 무렵 무세이온이 설립되어 학문의 중심지로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다. 그가 무세이온에서 수학 강의를 하는 날이면 온 귀족들의 마차가 무세이온을 향했고, 길에서 히파티아를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젊고 아리따운 여성에게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 여러 사람의 구혼을 받았고 그때마다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했습니다.”라는 말로 비껴갔지만, 그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 외모 덕분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디오판토스의 《수론(數論, Arithmetica)》, 아폴로니우스의 《기하(幾何, Conics)》,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설에 대한 부친의 해설서를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디오판토스의 천문규칙에 관하여》라는 저서의 일부분은 지금까지 전해 온다.
그런데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412년 키릴로스라는 인물이 주교로 임명되면서 좋은 시절은 막을 내렸다. 새 주교 키릴로스는 이단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매파 성직자로서, 모든 철학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人性)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공격했고,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은 단순히 네스토리우스파의 해체에 머문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의 학문적 전통이 무너지고 우리가 암흑기라 부르는 중세 기독교 중심 세계의 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 세계의 도래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이 히파티아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중심인물이던 히파티아의 존재가 주교 키릴로스에게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상의 자유를 설파하고 과학과 학습을 형상화하는 등 이교도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키릴로스가 부임하기 전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그럴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415년 베드로라는 수도자가 이끄는 키릴로스의 무리는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히파티아를 납치하여 마구 때린 후 머리카락을 마차에 묶어 케라레움이란 교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학자들이 자유라는 학문의 연료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는 예로부터 전해 오던 학문의 중심이라는 명칭을 다시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편협한 종교의 공격을 받아 채 피우지 못한 사상과 여성의 자유를 훗날 자신의 죽음을 발판으로 되살리게 된다. 근대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재조명되기 시작한 그녀의 삶은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며, 탁월한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 인정받았으며, 페미니스트 철학계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다.
첫댓글 존나 못됏노 ;;
키릴로스쉑 열등감에 미쳤나
심지어 화가인 라파엘로 본인이 사랑했던 여자로 알고있는데! 그래서 이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단 두명의 인물이 저분이랑 본인 라파엘로(맨 오른쪽에서 두번째 남자)라고...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지만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근데 라파엘로가 사랑한 여자는 히파티아가 아니라 저 그림의 얼굴을(외모를) 사랑하는 여자의 형상로 그린거 아니였나? 기억조작인가..ㅠㅠ
@쿵다다닥 맞을듯
동시대 사람이 아니니까 그림 속 얼굴 모델이 라파엘로가 사랑한 여자일듯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사람이니까
그림 속에 소크라테스도 미켈란젤로랑 닮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빈치보고 그렸다는 설처럼..
여담으로 저때 교황이 라파엘로 보고 히파티아 빼라고 했는데 라파엘로가 히파티아 빼면 자기 그림 안 그린다해서 그리게 해줬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