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에도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투입돼었습니다
광주사태에도 공수부대가 투입돼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시기 같은 민주화운동인데 상황은 왜 달라졌는가 생각좀해볼필요가 있습니다
시위를하면 처음에는 경찰력으로 시위를 통제하다가 과격 폭력시위로 변질돼면
강력진압하게돼어있습니다
그런데도 시위대가 해산하지않고 더 거세게 폭력시위하면 그다음은 계엄령이 선포됩니다
계엄령이 선포됀이후에도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군인을공격하면 그것은 반란입니다
<부산.마산의 전투경찰>
<부산.마산의 진압군>
<마산에 내려온 공수부대 >
마산도 광주처럼 똑같이 공수부대를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왜 진압으로인한 부상자는 발생하고 사망자가 발생하지않았을까요 !!!!!
<계엄군에게도 투석전을 벌이는 무모함 > 광주지역
아직 전경이 없었던 시대에 광주시의 요청으로 공수부대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이틀 내지 나흘간 수행하였던 충정작전에 대하여 대검을 착검한 채 시위진압을 했다는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위 사진은 그런 유언비어와 관련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위 사진은 지난 7월 24일 KBS 영상물로서 분명 KBS 의도는 가장 과잉진압이라고 여겨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진압 장면에서도 대검착검은 하지 않았다. 총은 뒤로 메었을뿐만 아니라, 총이 자꾸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끈으로 묶어 고정시켜야 했다. 이처럼 뒤로 멘 총은 무더운 날 무겁기만 할뿐 전혀 시위진압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정작전이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던져도 오와 열을 흐뜨리지 않고 행진하여 몸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오늘날의 전경과 달시 당시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아무런 보호 장구가 없었다. 따라서 시위대가 던지는 돌이 얼굴에 맞아 안면이 함몰되는데도 방패는커녕 아무런 보호장구가 없었다. 부하들이 계속 부상을 입으니깐 진압봉이 지급되었다. 공수부대원들 손에 진압봉이 들려있으니 충정작전 중 과잉진압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겠으나 그럼에도 충정작전 때는 대검이 사용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사진 자료이다.
광주사태 당시 충정작전의 시작은 순경 구조 작전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는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었을까? 그 이유는 그날 6개 지역 파출서가 돌과 화염병에 의해 파괴된데 이어 순경 60여명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어 묶인채 각목으로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일보 민주항쟁 20주년 특집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오후 4시40분 시위대 3백여명이 지산동파출소에 투석한 뒤 방화하고(전교 사 작전일지), 오후 5시에는 전경 40여명이 시위대에 붙들리기도 했다. 경 찰관이 시위대에 붙들린 것은 光州항쟁 기간동안 이때가 처음이다.
시위대는 전경을 붙잡아두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는등 기세를 올렸다.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전후해 동명동.지산동. 산수동파출소가 잇따라 피습당하고, 흥분한 시민들은 光州시장 관사에도 돌 을 던졌다. 시민들의 분노가 어울린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全南大 총학생회 홍보부차장이었던 李광호씨(당시 21세)의 증언.
농장다리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40여명의 전경을 인질로 잡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등을 빼앗은후 그들을 앞세우고 약1km 가량 떨어진 장동로터리로 갔다.
이들을 넘겨주고 대신 연행학생들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로터리에 도착했을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 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인질을 놓치고 말 았다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편, 光州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 발췌) >
훗날 1991년에 보상금 2억여원을 수령한 뒤 곧 바로 월북하였던 대표적인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윤기권은 그날 자신도 순경 15명을 인질로 납치했음을 1989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천변을 통해 동명동에 있는 동산파출소로 쳐들어가 파출소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낸 다음 짓밟아버렸다. 파출소 안에서 근무하던 경찰 둘은 우리들의 기세에 눌려 뒷문으로 도망가버렸다. 4시경 우리는 다시 법원 쪽으로 갔다. 산수동으로 가는 도로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파출소를 깨부순 기세로 우리는 쫓아가 돌멩이와 각목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안에 타고 있던 10∼15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
이렇게 순경 60여명이 난동자들에게 인질로 납차되어 억류되어 있었기에 광주시는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 요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요, 광주향토사단(31사) 사단장 정웅 소장이 지역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그날 오후 4시 40분에 7공수 33대대와 35대대(전북 금마 병력)에 충정작전 명령을 내렸다. 난동자들에게 인질로 납치되어 꽁꽁 묶인채 끌려다니고 있던 순경 60명을 구출해 내는 작전은 신속한 행동을 요하였으나, 위 사진이 보여주듯이 그 작전을 수행하였을 때 대검을 착검하거나 사용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계엄령 선포이후 시민이 군에게 대항하면 그 결과는 전세계가 동일합니다
계엄군에게까지 폭력을행사하며 해산하지않으면 그후 결과와 책임은 참담합니다 |
첫댓글 영샘이한테물어보면아들이답할것
90년대초반 군생활할때 도 충정훈련 받았다.
이런 글 여기에다가 왜 올리시는지요.
전 이해가 안됩니다.
닉네임도 반공카페에나 우익카페에나 어울리구요.
솔찍히..이런글 마음에 안드는군요.../
자꾸 이런글 올리는 의도가 ..???
자삭 부탁 드립니다..!!
국민적인 공감대가 있으면 혁명....그래서 5.16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5.18은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박대통령 서거후 정권탈취를 위한 목적으로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만약에 광주시민들이 자 잘못이 컷더라면 ..평정후 군부대로 복귀하여 군인으로 삶을 살았더라면 역사가 제 평가를 하였을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정권을 침탈 전두환.노태우까지 이어지면서 멍때리는 영삼이까정 야합..역사의 큰 죄인이지만
TK에선 영웅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 참..아이러니 한 경우다.
만약에 군부가 TK를 희생양을 삼았더라면 광주가 영웅시하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다 같은 대한민국인데도 사고하는게 참 다르다.
광주만이 아픈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이 아프다라는 생각만이라도 갖은다면 오늘날 지역감정은 사라질 일이건만
지역 이기주의가 더 많아서 그런것인지.
지역차별.지역발전을 저해 한 결과로 전국에 흩어져 이산가족이라도 만나러 가는양
명절만 되면 인구 대이동 행렬을 만드는것은 참 많은 것을 생각케한다.
어찌하여 그들만이 이산가족이 되어버린것인지.....
저사람 가끔식 이런글을 올리더군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님 뭔가요...?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