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마음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필요한 그 한 가지만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제1독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이것부터 연습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실천법으로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법입니다. 원수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심판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면 심판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3-4.8-9)
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로는 L.A.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흑인 학생이 도둑이고 그가 총을 꺼낸다고 여겨서 총을 쏴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면 나도 분명 차별 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차별 받지 않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크래쉬’(2004)는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도로 한 복판에서 울리는 총성. 젊은 백인 경찰관 핸슨이 한 흑인 청년을 쏴 죽입니다. 핸슨이 흑인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흑인 청년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위협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총으로 그 청년을 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흑인 청년은 둘 사이에 꽤나 재미난 공통점을 공유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흑인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것은 단지 작은 성 크리스토포로스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 청년을 쏴 죽인 이 ‘핸슨 결찰관’은 불과 36시간 전의 대낮에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선배 경찰관인 라이언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상관에게 근무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극도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차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차별과 편견의 굴레에 살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라이언 경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 핸슨이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차별의 굴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이 영화에서는 아랍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은 한 사람이 멕시코인 열쇠 수리공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차별 받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차별 받는다고 느끼면 그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천대 받던 시절, 수학 천재 라고 불리던 흑인 소녀가 수많은 차별 속에서 결국 NASA에서 인정받기 까지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6학년인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교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인정받음으로 견디기 힘든 인종차별을 견뎌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때 교수가 백묵을 주며 문제를 풀어 달라는 청을 받은 것처럼, 나사에서도 그를 지지해주는 백인 상관으로부터 백묵을 받아 정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차별 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인정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당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차별 받지 않는데 누구를 차별하겠습니까? 차별하지 않고 차별 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https://youtu.be/7WeFty0j4SI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가 제일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지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 버스 운전사, 음식 배달원, 요양 보호사 등등…. 이들도 코로나의 위협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막 부려 먹는 종으로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갑질의 모습이 들려왔고, 실제로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자기 삶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로 어루만져주듯 하나하나 손을 대 치유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있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을 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늘 약자였습니다. 주변 국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글귀.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라면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소중한 자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행은 과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불행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에머슨).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