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는데, 시상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나중으로 미루고 싶습니다.”
4월 18일. 한화 내야수 정근우는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그런 정근우를 보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근우의 사양엔 이유가 있었다.
다음날 대전구장에선 정근우의 1천 경기 출전을 축하하는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2005년 프로에 데뷔한 정근우는 지난 4월 9일 마산 NC전에서 프로 데뷔 10년 만에 1천 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터였다.
52경기에 출전한 데뷔 시즌(2005)과 부상으로 9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한 2011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110경기 이상에 출전한 정근우로선 1천 경기 시상식이 꽤 의미 있는 자리일 수 있었다. 가뜩이나 야구계는 “‘조금 아픈 건 아픈 게 아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정근우이기에 앞으로 2천 경기 출전도 가능할 것”이라며 1천 경기 출전 시상식을 2천 경기 출전을 위한 시작점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정근우의 1천 경기 출전 기록을 축하하는 시상식을 19일 대전구장에서 열기로 계획한 것도 정근우의 프로 정신을 높이 평가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정근우는 “KBO와 구단 뜻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세월호 사고로 많은 국민이 슬퍼하는 지금,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는 건 힘들어하고 계신 분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며 “시상식을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시상식을 생략한 채 감사한 마음만 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KBO와 한화 구단은 정근우의 뜻을 받아들여 19일 열릴 예정이던 시상식을 취소했다. 대신 경기 전 대전구장 뒤 체육관에서 KBO 관계자가 정근우에게 조용히 축하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했다.
“정찬헌의 사구, 모두 손에서 공이 빠진 것으로 믿고 싶다.”
정근우는 20일 대전구장에서 벌어진 LG전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플레이에 충실했다. 그러다 팀이 7대 5로 리드하던 6회 말 1사 3루. LG 투수 정찬헌의 속구에 등을 맞고 쓰러졌다. 정근우는 4월 2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정)찬헌이 속구에 등을 맞고 너무 고통스러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며 “그때까지 찬헌이 손에서 공이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근우는 1루로 걸어나가며 정찬헌을 바라봤다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6회 때 사구는 찬헌이 손에서 공이 빠졌다고 생각한다. 보통 허리 윗부분에 공을 맞혔을 경우 투수들이 타자들에게 ‘고의가 아니었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굳이 선수협(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합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선수들 간에 그런 암묵적인 합의가 있어왔다. 지금껏 많은 사구를 맞았지만, 상대 투수가 그런 제스처를 취하면 내가 미안해서라도 조용히 1루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찬헌이가 그런 제스처를 취하는 걸 보지 못했다.”
정근우는 “찬헌이가 사과하는 걸 내가 못 봤을 수도, 찬헌이가 위기를 맞다 보니 당황해 제스처를 취하는 걸 잊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며 “애써 사과를 받고 싶어서 쳐다본 게 아니라 ‘고의 사구가 아니었다’는 걸 찬헌이의 제스처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정작 논란은 정근우가 1루로 출루한 뒤 발생했다. 정근우의 다음 타자였던 김태균이 유격수 앞 땅볼을 치자 정근우는 병살을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이때 오지환의 스타킹이 정근우의 스파이크에 닿아 찢어졌다. 오지환은 2루 터치아웃엔 성공했지만, 정근우의 슬라이딩에 다리가 걸렸는지 1루로 제대로 송구하지 못하며 타자 주자가 세이프됐다. 만약 병살이 됐다면 실점을 막을 수 있던 상황이라, LG 벤치 입장에선 분명 아쉬운 장면이었다.
LG의 한 고참 선수는 “처음엔 병살을 막으려던 정근우의 슬라이딩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린 오지환이 실책을 범한 지 알았다”고 말문을 열고서 “그러나 슬라이딩에 오지환의 송구가 방해를 받았다는 점,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오지환의 스타킹이 찢어지고,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피가 나는 걸 보고 동료들이 격앙된 게 사실”이라며 “우리 선수단 입장에선 정근우가 사구를 맞고서 슬라이딩 플레이를 통해 보복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만 했다”고 밝혔다.
정근우는 “슬라이딩 보복은 있을 수 없다”며 “병살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슬라이딩을 시도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한 야구해설가는 "각종 국제대회 때 정근우의 적극적인 슬라이딩으로 한국 대표팀이 많은 위기에서 벗어났다"며 "슬라이딩 자체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듯 오지환이 다치자 LG 선수들이 발끈한 것도 동료들로선 당연한 반응이 아니었겠는가 싶다"고 평했다.
정근우는 “더그아웃으로 오면서 (오)지환이의 스타킹이 찢어진 걸 보고 LG 김민호 코치님께 ‘지환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십시오’라고 사과를 뜻을 전했다”며 “8회 초 지환이가 볼넷으로 1루로 출루했을 때 지환이 쪽으로 다가가 ‘지환아, 미안하다’는 사과의 뜻을 직접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정근우의 슬라이딩 플레이는 조용히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8회 말 1사 무주자 상황에서 정근우가 정찬헌의 시속 145km 속구에 다시 등을 맞으며 일이 커졌다. 두번 연속 같은 투수의 강속구에 등을 맞은 정근우는 정찬헌에게 다가갔다. 이때 양팀 벤치에서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며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했다.
정근우는 “강속구가 머리 쪽으로 날아와 맞았다. 그것도 한 경기에 같은 투수에게 두 번이나 맞았다. 첫 번째 사구는 손에서 공이 빠졌다고 치자. 그러면 ‘두 번째 사구는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최소한 찬헌이가 이때라도 사과 제스처를 취해줬다면 ‘고의사구가 아니었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LG 고참 선수는 "찬헌이가 '고의가 아니다'라는 제스처를 취하지 못했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스처를 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해와 오해가 겹쳐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한 만큼 시간이 흐르면 선수들끼리 만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찬헌은 전화기가 꺼져 있어 통화하지 못했다.
정근우 “프로야구가 상처받은 분들께 위로가 됐으면…”
정근우는 “두 번의 사구에 멍이 들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경기에 못 뛸 정도는 아니다”라며 “내일 경기에서 열심히 뛰다 보면 아픈 것도 잊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정근우는 “난 몸이 아프지만, 찬헌이는 마음이 아플 것”이라며 이번 벤치클리어링으로 혹여나 정찬헌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했다.
“난 베테랑이라, 이런 경험이 많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찬헌이는 젊은 투수인데다 제대하고 맞는 본격적인 풀타임 시즌이라, 이번 일 때문에 자칫 다음 투구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논란이 빨리 끝나서 ‘정찬헌’이라는 좋은 투수가 다음 투구에 지장을 받지 않고, 씩씩하게 던졌으면 좋겠다.”
정근우는 그런 의미에서 “찬헌이의 두 번째 사구도 손에서 공이 빠진 것이라 믿고 싶다”며 “벤치클리어링 중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도 서로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하려고 했던 행동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정근우는 “전국민이 슬픔에 빠졌을 때 프로야구가 상처받은 분들께 위로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럴 때일수록 프로야구 선수들이 힘을 합쳐 더 많은 분께 위로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LG 베테랑 선수 역시 “벤치클리어링도 야구의 한부분이지만, 전국민이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만큼 선수들이 지혜를 모아 전국민에게 힘을 되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번 일로 선수단이 더 똘똘 뭉쳐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 21일 오전 정근우는 “정찬헌이의 두 번째 사구도 손에서 공이 빠진 것이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KBO는 사구로 퇴장당한 LG 정찬헌에게 대회요강 벌칙내규 제4항에 의거하여 제재금 200만원과 출장정지 5경기의 제재를 부과했다. LG 베테랑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고 대구로 이동한 뒤 머릴 짧게 깎은 것으로 알려졌다. LG 코치는 “베테랑 선수들이 ‘팀이 어려울 때일수록 고참들이 모범이 돼야 한다’며 자진해 머릴 짧게 깎았다”며 “선수들이 결의를 다진 만큼 22일 대구 삼성전부터 팬들께 좋은 플레이를 보여드리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