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2,14.22-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려 있게 하소서.
사랑을 보게 하소서.
늘 함께 동행 하시는 제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찬가, 생명의 찬가>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반복되는 얘기는 우리 인간이 죽인 주님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뿐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주님은 살리시는 분인 데 비해 인간은 죽이는 존재입니다.
주님도 죽이니 인간도 죽이고 모든 피조물을 다 파괴하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하면 지나친 얘기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고,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도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법자란 어떤 존재입니까?
율법이 없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이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무법이란 하느님의 법이 없고 사랑의 법이 없는 겁니다.
물론 그들도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고 얘기하고 원래는 그랬지만, 율법만 있고 사랑의 법이 없었기에 무법자가 되고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실로 사랑만이 생명을 보고, 생명을 보기에 생명을 살립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생명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소유하거나 이용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사랑은 없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그러하고, 사랑이 없이 욕심만 있는 사람도 그러긴 마찬가지입니다.
지지난 주 벚꽃이 한창 필 때 안양천을 자전거로 출근하다가 벚꽃이 참으로 아름다워 '참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에 취해 아름다움 관상을 하며 더 가는데, 문득 꽃이 아름답기로서니 사랑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하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노래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그러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꽃보다 아름다운 겁니다.
사랑할 때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게 보고, 생명으로 보고 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꽃을 꺾듯이 사람도 꺾겠지요.
어찌 어린애를 굶겨 죽일 수 있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찌 어린 소녀를 한갓 성적 욕망 때문에 꺾을 수 있습니까?
사랑은 없고 욕망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찌 인신매매와 장기매매가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로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 생명이 보이지 않고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생명이 보이고 존재가 보입니다.
사랑의 눈이 없으면 아무리 봄이 오고 싹들이 땅을 뚫고 나와도 볼 수 없고, 그것들의 신비로움을 경외의 눈과 신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모든 생명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시들시들한지 싱싱한지가 보이며, 시드시들하면 마음이 아파 물과 거름을 주고, 싱싱하면 생명의 찬가를 주님께 읊을 겁니다.
그러니 봄철에 부활절까지 맞이한 우리는 사랑과 생명의 찬가를 생명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주님께 읊어야겠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자>
어느 어린이집에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에 대한 설명을 하고 발씻김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5살 된 한 어린이가 너무슬프니까 예수님은 죽어도 수녀님은 죽지 말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려 수녀님도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답니다.
혹 수녀님이 죽으면 그 아이의 상처와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 수녀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코로나19를 핑계삼아 세족례를 생략한 전례를 거행한 곳도 많은데 어린이집에서 만찬예식과 세족례를 했다니 감사합니다.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마태 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두려움을 이겨 수 있는 기쁨이 되고,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거짓말이 됩니다.
전해 받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부활은 달라집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 인생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 마음을 울리던 그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징표들을 알아볼 줄 아는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열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분이 주시는 희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하고 걸어가기로 합시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기억은 찬란한 빛이어야 하며, 그 빛은 영원한 그 파스카를 향한 우리의 신뢰 어린 발걸음을 인도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은 건너갑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의 표징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여인들의 내면 상태는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습니다.
① 두려움
무엇보다도 여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천동지할 부활 사건 앞에 여인들이 느낀 두려움입니다.
일종의 경외감이랄까요.
동시에 스승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일이겠만, 혹시라도 자신들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 온 두려움입니다.
② 기쁨
꿈에 그리던 스승님께서 되살아나심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영영 이별인 줄 알았던 그분과 다시 재회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는 데서 오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고별사를 통해서 말씀하신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뺴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언의 성취로 인한 기쁨입니다.
③ 서두름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간직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 온 서두름입니다.
어서 빨리 사도들에게, 주님께 의지하고 따랐던 수많은 사람에게 이 은혜로운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조바심에서 오는 서두름입니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을 품고 달려가던 여인들 앞에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주 다가 오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바로 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마태오 복음 28장 9절)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던지 여인들은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 엎드립니다.
더 이상 그분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그분의 발을 붙잡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나머지 연신 그분께 절을 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혹과 불신으로 가득한 우리를 향해 마주 다가오십니다.
살아생전 그 인자하고 자상한 눈빛, 세상 따뜻한 목소리로 우리의 안부를 물어봐 주십니다.
“평안하냐?”
존경하는 송봉모 신부님의 부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 가지를 믿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는다.
둘째,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순례 여정을 이끌어주심을 믿는다.
셋째, 우리가 순례 여정을 마치는 날 우리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우리의 약하고 비천한 육신은 새로운 영광의 몸을 받을 것임을 믿는다.”
(송봉모, 요한복음산책7,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바오로 딸)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신 의정부 교구 전숭규 신부님의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길만 합니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경비병들이 매수되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경비병들을 매수한 이야기’도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박해자들을 향해서 “너희의 주장은 거짓이다.” 라고 반박하려고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에게 “박해자들의 거짓 주장에 현혹되지 마라.” 라고 말하기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은 마태오복음 28장 1절-4절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마태 28,1-4)
경비병들은 큰 지진을 경험했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그 천사가 무덤 입구의 돌을 옆으로 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닙니다.
또 바로 까무러쳤기 때문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한 ‘예수님 부활 소식’을(마태 28,5-7)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까무러쳤다가 깨어나서 천사의 말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여자들을 추궁해서 천사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사실대로 사제들에게 알렸는데, 사제들에게 가기 전에 무덤 내부를 들여다보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까지 사제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사제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4절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천사가 내려오기 전에 부활하셨고, 경비병들 모르게 무덤에서 나가셨습니다.
천사가 무덤 입구의 돌을 옆으로 굴린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가시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부활하셨는지, 또 ‘큰 바윗돌’로 입구가 막혀 있는 무덤에서 어떻게 나가셨는지,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경비병들이 본 것은 ‘부활 후의 상황’일 뿐입니다.
아마도 사제들은 “예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 라고 경비병들을 심문했을 텐데, 그들은 “저희는 모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자들 중에도 “혹시 사도들이?” 라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 순간을 본 사람도 없고, ‘빈 무덤’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들은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옮기지 않았다.” 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 라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인데,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라는 사도들의 주장도 역시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그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한 번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경비병들과 사제들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복음서 저자는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그것은 경비병들과 사제들 중에 누군가가 사도들에게 진실을 고백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사도 6,7)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제들 가운데에 ‘그 일’에 직접 관련되었거나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왜 경비병들을 매수했을까?
이 질문은 앞의 27장 62절-66절에 연결됩니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마태 27,62-66)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걱정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사도들의 예수님 부활 선포’였습니다.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천사를 목격했다는 경비병들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고, 또 예수님의 무덤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도 죄이고, ‘하느님의 힘’이 작용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짓말로 덮으려고 한 것도 죄인데, 사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제들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알면서도 그런 일을 한 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필요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믿는 여자들과 같은 체험을 했다는 증언을 전하는 것이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한 주목적일 것입니다.
사실 ‘빈 무덤’ 자체는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거짓 주장은 별로 효과가 없었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 여러 가지 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부활 증인의 삶 - 체험, 선포, 공부>
“알렐루야 노래하자 기쁜때가 왔도다.
온세상에 기쁜 소식 용약하여 전하자
우리 예수 부활하사 우리 죽음 물리쳤네
알렐루야 주예수 기쁘고 즐겁다 영화로이 사셨네.”
(성가 129장)
어제 흥겹게 부른 부활 성가가 기쁨을 가득 선사했습니다.
2019년 공동전례 후 코로나로 인해 만 3년만의 공동전례로 활기가 넘친 분위기였습니다.
몇 년만에 최고로 많이 참여한 공동전례였고 2시간 30분 동안의 부활 성야 미사 때도 조는 분 하나 없이 모두가 또랑또랑 초롱초롱 깨어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얼마나 힘차게 노래하는지 부활 대축일 낮미사 역시 참으로 살아있는 전례 분위기였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알렐루야 주님 부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꽃 피자 꽃 지고 또 계속 연이어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꽃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로운 연초록 나뭇잎들이 온누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신록의 기쁨 가득한 부활시기를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니 기쁘게 주님 부활을 증언하며 살아야 함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요 의무입니다.
파스카의 봄꽃들과 신록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된 주님의 부활시기, 과연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어떻게 빛과 생명, 기쁨과 희망, 찬미와 감사, 평화가 가득한 주님 부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주님 부활을 우리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경비병들이 수석사제들에 매수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빈무덤에 대해서는 두가지 소문이 회자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 부활하셨다”는 소문이고, 하나는 복음에서 보다시피 매수된 경비병들이 퍼뜨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라는 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로 볼 때는 어느쪽이 진실이고 어느쪽이 거짓인지 참 판단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 객관적으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더 믿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유언비어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유언비어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완전히 진위(眞僞)가 바뀐 모습입니다.
후대의 우리들이야 전후 모든 일들을 일람(一覽)할 수 있기에 예수님 부활의 진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는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요 생명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주님 부활의 은총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주님 부활의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 부활을 전하며 몸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 체험은 순전히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주님을 애타게 찾았던 주님 사랑이 전제되고 있음을 봅니다.
누구나 자명한 부활 체험이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찾는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평안하냐?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생생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유언비어가 아닌 생생한 현실임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아마 여자들에게 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은 평생 삶의 활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으로 귀한 진리가 계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의 갈릴래아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가 상징하는 바, 우리 믿는 이들 각자의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 제자들인 우리를 ‘내 형제들’이라 명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 부활하신 주님의 형제답게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 주님 부활을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복음적 삶 전체로 말입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시기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주님 부활을 체험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룰 것입니다.
이젠 예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열화같은 오순절 설교를 통한 주님 부활의 선포로 매수된 경비병들이 전한 가짜 뉴스, 유언비어가 거짓임이 탄로되는 통쾌한 순간입니다.
참으로 진정한 내적변화로 참나를 살게 하는 주님 부활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용감한 고백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체험한 사실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주님 부활의 위대한 증인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공부가 얼마나 깊은지 배웁니다.
주님 부활의 체험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 바 렉시오 디비나, 성경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시편 16,8-11절의 다윗의 고백을 통해 이미 주님 부활의 예언되고 있음을 깨달은 베드로입니다.
전문이 참으로 깊고 은혜로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사도 2.25-28; 시편 16,8-11)
다윗의 고백이자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이요, 또 베드로 자신의 고백으로 사용한 시편입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는 우리의 고백으로 사용해도 참 은혜로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고마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주님 부활을 선포하며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렉시오 디비나 성경공부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주님 부활의 증인의 삶에 주님 부활의 체험과 선포, 성경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충실히 주님 부활의 증인의 삶을, 날마다 주님 부활 축일을 살게 하십니다.
한 주간 내내 계속되는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참 좋습니다.
날마다의 이날이 부활 축일입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2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빈무덤이 되신 주님 안에 푹 잠겨 사랑을 나눕니다.
그분은 내려가고 약해지고 목숨까지 내어주시어 죽으심으로 완전히 비워지셨습니다.
온전한 없음, '무(無)'가 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빈 무덤을 당신의 없음으로 꽉 채우고 계십니다.
무덤은 빈 것이 아니라 없음, 비움이신 예수님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시면서 육신의 옷을 입으셨던 그분은 죽음과 부활로 더 이상 물질의 한계에 갇혀 계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평안하냐?"
(마태 28,9)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 무덤에 왔던 여인들에게 인사하십니다.
아직 부활을 못 알아듣는 인간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들이 아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살아계실 때 분명 일러주었지만 그 말씀을 아직 기억해내지 못한 채 슬픔과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을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평안하냐고 물으시는 주님께서 평안하십니다.
이 인삿말을 듣는 우리도 배시시 입꼬리가 올라갈 듯 평안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첫 인사는 물음이라기보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진짜 안녕한지 안한지 답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방금 여인들이 만났던 천사가 한 말을 예수님도 똑같이 하십니다.
"갈릴래아!"
그곳은 제자들 대부분이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하던 근거지이기도 하고 예수님과 첫 만남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로 언급되듯 예루살렘같은 정치 종교의 요충지가 아니라 그저 변방에 불과하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근원으로 돌아가서 만나자고 초대하십니다.
뿌리는 우리를 첫마음에 대한 기억으로 열정을 새롭게 해주고, 부르심 받았을 때의 처지를 상기시켜 겸손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여기까지 온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다시 거기서 새롭게 출발하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각 개인의 존재와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대목입니다.
직접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던 어부로 성급한 성격의 베드로의 입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구원 역사와 성부 성자 성령의 업적이 구약을 넘나들며 일목요연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사도 2,14) 하고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입을 여는 그의 모습을, 원래의 그를 이미 알던 이들이 봤다면 크게 놀랄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내용 행간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기를 비롯한 제자들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땠는지,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실 때조차 서로 무엇으로 다투었는지, 못 알아듣는 비유에 얼마나 난처했는지, 그분 사명을 정면으로 만류했다가 무슨 말까지 들었는지, 그리고 잡히셨을 때 두려운 나머지 어떻게 했는지...
이제 예수님의 스토리는 각 제자에게 자기의 스토리가 된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 역사가 자기 개인의 구원사가 된 것이지요.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루살렘까지 간 일들을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가 기억하고 성찰하고 인식하면서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사도 2,32)
이제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놀랍게 변모합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증인으로 나선 이에게 본 것만 말하고 심증이나 사적 느낌의 진술을 삼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활의 증인, 신앙의 증인는 과학적,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온 존재를 통틀어 체험하고 깨달은 모든 것이 증언의 내용이 됩니다.
우리가 인격신인 주님을 만나 여기까지 오면서 체험한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 죄와 용서 등 모든 은총과 부르심의 자취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재회, 해후를 통해 새롭게 정립될 때 우리는 진정한 증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갈릴래아로 돌아가 그분을 만납시다.
온도를 잃고 미지근해진 열정으로 의혹이 섞인 회색조의 중간 지대를 서성대고 있다면 이참에 각자의 갈릴래아를 떠올려 봅시다.
거기서 다시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도 엠마오를 떠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떠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그분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하느님 나라를 꿈꾸었던 곳,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고, 두려움 없이 꿋꿋하게 하느님 나라 여정을 다시 시작합시다!
그분께서는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대화 중에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매님 한분은 ‘아들’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도 믿지만, 아들을 더 믿는다는 말에 조금 놀랐습니다.
생각하니 남편은 유전적으로는 남입니다.
아들은 유전적으로 50%는 같습니다.
아들은 낳아서 길렀고, 자라는 모습을 온전히 보았기 때문에 더 믿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살아온 길이 달랐고, 생각도 다를 때가 있고, 때로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에 그 믿음의 깊이가 아들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저의 어머니도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나약해서 때로 넘어지고, 부족해서 앞가림을 잘 못할 때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믿으면 세상이 편하고, 걱정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의심하면 세상이 불안하고, 걱정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면 치유가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걱정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고향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곳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을 설교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소경을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세상이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갈릴래아의 호수도, 갈릴래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모두 그대로였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변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강한 믿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저에게도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제게 갈릴래아는 주교님께서 파견하신 신문사입니다.
코로나로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게 갈릴래아는 브루클린 한인성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공동체에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제게 갈릴래아는 신문 홍보를 위해서 가는 성당입니다.
가는 길이 멀고 힘들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홍보를 해야 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의 마음입니다.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부정한 돈을 받고,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분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로또’가 당첨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일상의 삶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아픈 이들의 모습에서, 외로운 이들의 모습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침묵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평화는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시작합니다.
평화를 얻고 싶으시다면 봉사하십시오.
봉사의 기쁨을 알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기도의 샘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을 읽다가 강화도 화문석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화문석은 꽃 화(花)자에 무늬 문(紋)자를 써서 화문석(花紋席)입니다.
그런데 꽃 그림이 있는 화문석보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무문석(無紋席)이 더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장사꾼에게 강화가 화문석으로 유명한데 왜 아무런 무늬가 없는 무문석이 더 비싸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장사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만,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듭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런 변화 없이 사는 삶을 어떻게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렵고 힘든 일도 겪고 또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보람도 느껴야 신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면서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최고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냥 산다고 하면서 의미를 찾지 않는 사람도 변화가 없으니 삶이 고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를 이루는 삶을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변화를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이 큰 변화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큰 희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 희망을 통해 우리는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보고를 들은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감추고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는 낭설을 퍼뜨리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소문은 널리 민중들에게 퍼져 있었습니다(마태 28,11-15 참조).
그래서 사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 후 발현 사실이 복음서와 사도 바오로가 보고한 것을 모으면 모두 열한 번 나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부활 이후의 발현 사실입니다.
여자들이 빈 무덤을 뒤로 하고 급히 달려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평안하냐?”라는 말로 인사하셨지요.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아마 기쁨과 함께 처음 경험해 보는 부활 사건이기에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지요.
두려움이 생기면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진리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또 두려움을 가실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 자체가 사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부활은 감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