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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 이사 58,7-10
제2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마태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살맛나게 하는,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가톨릭 신문을 읽던 중 다음 세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라는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사진전 제목입니다.
이어지는 글도 좋았습니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 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내 희망은 단순한 것, 내 믿음은 단단한 것, 내 사랑은 단아한 것. 돌아보면 그랬다.
가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고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고독이 나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참으로 한 결 같이 깨어있는 살아있는 매력적인 삶입니다.
참으로 희망할 때 단순한 삶이요, 참으로 믿을 때 단단한 삶이요, 참으로 사랑할 때 단아한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이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자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과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입니까?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세상이 없는 소금과 빛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요, 세상속의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녹아 스며들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이요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세상에 살맛을 내는 소금 역할을 하는 신자들인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쓸모가 없어 버리게 됩니다.
“맛이 갔다!” 종종 듣는 말입니다.
음식은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 가면 버릴 수도 없다는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사람이 변질變質, 변절變節, 변심變心, 변덕變德으로 맛이 갈 때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이런 삶이라면 너무 비참합니다.
아무리 풍족한 의식주의 외적 삶이라 해도 제 맛을 잃은 이런 내적 삶이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어떻게 변질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처럼 제 맛을 잃지 않고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화두처럼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다음은 소금에 이어 빛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듯 세상속의 빛입니다. 세상이 없는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평상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 듯 까맣게 잊고 지내지만 없으면 당장 필요로 하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세상은 날로 부패하고 세상은 날로 어두워지는 절망적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임을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바로 ‘산위에 자리 잡은 고을’의 빛 같은 존재가,
집안을 밝히는 ‘등경위에 놓여 진 등불’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과 빛은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우뚝 자리 잡은 여기 정주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선교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부터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한결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소금이요 빛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빛이 되기 위한 일차적 과제는 말씀 공부와 실천에 있습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과 일치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주님과의 깊어지는 일치로 우리는 썩지 않고, 어두워지지 않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기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로 다음 고백을 통해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의 일치에 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소금인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곧 부패하게 되고,
빛이신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마음도 몸도 온통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고
온갖 해로운 영적 바이러스들이, 더러운 영들이 우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만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합니다.
하여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약하고 두려움이 많고 많이 떨었던 약한 바오로가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갈 때 어눌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자의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재간이 번지르한 달변에
안색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는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될수록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 진복팔단의 참 행복 선언이 있습니다.
참 행복의 진복팔단,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이루는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가 되고 하늘 나라는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참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참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영원한 롤모델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단식이란 주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예언자들 통해 쏟아내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이사야서 제1독서를 통해 제시됩니다.
통째로 인용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정의, 공정을 살 때,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천이 없는 우리의 유약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네 가운데에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리는 것,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것,
그러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 힘차고 고무적인 하느님 말씀인지요.
사랑은 감상이나 낭만이 아닙니다. 구체적 오늘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단식이요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구체적 사랑 실천의 처방입니다.
녹아 스며드는 소금처럼, 자기를 태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실천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새삼 끊임없이 녹아 스며들어 사라지는 소금의 원천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빛의 원천이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 안에 정주할 때 영원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인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영광이요 복음선포의 선교가 됩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나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도록 부단히 격려하고 자극합니다.
살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어둠을 환히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빛과 세상의 소금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말씀의 주제는 빛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빛과 소금이라니, 엄청난 찬사임에 틀림없지만 그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뿌듯함보다는 오히려 부담이고, 한편으로는 은근슬쩍 부끄러움도 느끼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데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서 소금과 빛으로 살고 있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렇습니다.
빛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복음 환호 송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요한 8, 12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태양처럼 세상을 밝히는 빛은 분명히 주님이시지 우리는 아니지요.
만약 우리가 빛이라면 우리는 다만 작은 촛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썼던 사진 묵상집, [자연: 산, 들, 호수, 그리고 하늘]이라는 책에서
‘사제는 빛이 아니라네. 다만 빛을 비추어주는 수면이어라.’고 썼었지요.
저는 은근히 예수께서 분명히 너희는 빛이라고 하셨는데
‘사제는 빛이 아니라네.’라고 썼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을 각오를 했는데
아직 항의한 사람은 없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해 주었어요.
저는 제가 썼지만 다 못 외우는데
그 사진에 대한 묵상 글을 전부 외우시는 수녀님들도 몇 분 만났었지요. 정말 놀라웠지요.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아주 큰일을 하거나 위대한 인물이 된다든가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늘 제 1 독서, 이사서의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요.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이사 58, 7-8)
단순히 우리가 지닌 것을 이웃과 나누고 마음을 써 주면 우리 안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고 합니다.
독서의 마지막 부분인 10절에서 다시 한 번 예언자는 강조합니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 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 준다면,
너희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
이 시대의 소금이며 빛이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선 지율 스님이 떠오릅니다.
오래 전 뉴스에 크게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의 도롱뇽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무기한의 단식을 하면서 기꺼이 생명을 내어 놓고자 했던
그 생명의 나눔은 그야말로 우리의 어두움을 비치는 한 줄기 커다란 빛이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세상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에게 살맛을 나게 하는 소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도롱뇽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 놓고자 했던 스님의 정신은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도롱뇽이 죽으면 인간도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지금 당장의 편의만을 생각하여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죽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큰 뜻도 담겨 있지요.
지닌 것을 나누는 것이 빛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스님은 지닌 것이 하느님이 주신 생명뿐이었고 바로 그 생명을 나누고자 하셨기에
우리에게 큰 빛이 되신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 그것이 인류를 비추는 큰 빛이 되신 것입니다.
부산 마리아 수녀 회에서 하는 구호병원에 최충언이라는 제가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나눔을 일부 여러분과 나눕니다.
“끝까지 함께 한 분들은 환경을 생각하는 작은 모임의 사람들, 초록에 공명하는
‘도롱뇽의 친구들’이었지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도롱뇽과의 약속. “내가 너희들을 지켜 줄께.”라고 한 약속을 정말 동화처럼 지켜내셨지요.
‘일상생활은 습관이고 욕망의 거미줄’이라는 말이 있지요.
지율스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욕망의 절제’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생명의 태반이라 할 수 있는 지구는 유한하지요.
지속적인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생명계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도
인간들의 무한히 팽창하는 욕망을 줄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일상의 삶 속에서 자본의 논리, 경제의 논리, 개발의 논리에서 생명의 논리,
환경과 생태의 길로 구조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전제조건으로 뭇 생명들과의 공생관계는 회복되지 않겠지요.
내 자신부터 욕망의 거미줄을 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최 선생님은 <인간의 시간에서 대지의 시간으로>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일부를 나눕니다.
“<녹색평론>79호를 보다가 백무산 시인의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꼬리치레도롱뇽의 모습을 기막히게 묘사했다.
뭉툭한 입엔 변변한 이빨 하나 없고
퉁방울눈은 겁을 먹도록 진화한 기관 같고
적은 보아서 어쩌랴 시력도 형편없고
날을 세운 발톱도 날카로운 귀도 없고
튀어 달아날 뒷다리도 몸 색깔을 바꾸거나
죽는 시늉을 하거나 털을 곧추 세우거나
냄새를 피우거나 혐오감을 주거나 위장을 하거나
혹은 노래를 잘 부르거나 예쁜 귀를 가졌거나
그런 힘도 잔꾀도 배짱도 노리개도 못 되는 것이
어떻게 대대손손 대를 이어 왔을까
습지에는 초일급수에는 저들만이 누리는
상생의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땅 위의 생명들을 떠받치고 있느라
저리 납작하게 엎드린 것일까
- ‘누군가를 밟고 있었다면’, 부분
꼬리치레도롱뇽처럼 별 볼일 없고, 그늘진 곳에서 있는 둥 없는 둥
궂은일을 묵묵히 하는 눈이 맑은 사람들이 ‘초록의 공명’을 느낄 것이고,
겨울나무처럼 벌거벗고 깨어있는 자만이 마음 안 깊숙이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떨어진 꽃도 함부로 밟지 않았고, 미물을 의식해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함부로 버리지 않았으며,
고시레와 까치밥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생활 속에 배어있는 생명존중 사상을 지녔던 우리가
지금에 와서는 사람을 돈으로 보고 권력으로 보고 상품으로 보는 세상이 되어 버렸을까?
시인이 노래한 꼬리치레도롱뇽의 마음을 모을 수 있다면, 지율스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련만…….”
최 선생님의 나눔처럼 정말 도롱뇽의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고 ‘너희들을 도와 줄께.’라고 했던
그 약속을 생명을 내어 놓으면서 동화처럼 지켜내고 계시는 지율스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분처럼 큰 빛은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지닌 작은 것을 서로 나눔으로서
어두움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어야 함을 다시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기며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작음 나눔을 하기로 다짐해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터넷에서 제 관심을 끌 만한 영상 하나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제목 하나만으로도 곧바로 클릭하게 했습니다. 영상의 제목은 ‘글씨 잘 쓰는 법’입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저로서는 관심이 아니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제시하는 글 잘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로획을 길게 써야 시원하게 보인다.
2) 세로획은 똑바로 써야 바르게 보인다.
3) ‘ㄱ,ㄴ’ 의 경우는 각이 없이 부드럽게 써야 글씨가 예뻐진다.
4) ‘ㅇ’은 예쁘게 쓴다. 너무 작아서 무슨 글씨인지 모르게 써서는 안 된다.
모두 맞는 말이었고 왜 제가 글을 잘 못 쓰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기억하며 신경 써서 글을 쓰는 데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악필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쓰면 빨리 쓸 수가 없다 보니 다시 예전처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쁜 글씨가 나오지 않습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알고 그 앎을 내 몸으로 살아야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제맛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믿음과 거룩한 지혜를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주님 곁에서 머무를 수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필요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빛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서 다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냥 주님의 말씀만 기억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스스로 그렇게 소금과 빛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따라야지만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목격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진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려 빛(“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8,12).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빛과 소금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뱣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 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10).하고 기록한 대로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명절에 서로의 만남을 위해 모였지만 얼마나 많은 다툼이 많았는지....상처를 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모함하는 말을 내려놔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말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한답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소금이 쉴까”라는 속담을 아세요?
어떤 일에도 절대로 굽히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틀림없어 매우 미더움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미더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8,10).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관심을 두면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깔지게 하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도 절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발휘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 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맛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해서입니까?
과학이 미발달해서입니까? 학문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삶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 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 수는 줄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 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열흘을 입원했대요.
특별히 아프지도 않은데 일행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답니다.
이쪽, 저쪽 보험금을 받게 되었는데 치료비를 제외하고 1백 여 만원씩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신자가 이정도인데.....
사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어두움, 정신의 어두움, 마음의 어두움을 비춰야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에게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까만 밤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이 있습니다.
‘제 3한강교’라는 노래가 있었듯이 예전에는 다리가 3개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여개 이상의 다리가 있습니다.
한강 북쪽의 사람은 다리를 건너 강남으로 갑니다. 한강 남쪽의 사람도 다리를 건너 강북으로 갑니다.
명동에서 살던 저는 주로 한남대교를 이용했습니다.
오늘도 서울의 다리는 허리가 되어 경제, 문화, 예술, 사랑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뉴욕도 북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허드슨 강이 있습니다.
아직은 이름을 다 모르지만 조지워싱턴, 링컨, 로버트 케네디, 부르클린, 화이트 스톤으로 불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퀸즈에 사는 저는 주로 화이트 스톤 다리와 조지워싱턴 다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뉴욕 시민들이 다리를 건너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뉴욕의 문화, 경제, 멋과 맛을 즐기고 있습니다.
다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꿈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지친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Bridge of Troubled Water'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고 번역 되었습니다.
제목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내용에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지치고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 줄게요. 내가 당신편이에요.
세상이 거칠어지고 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뉘어 줄게요.
당신이 우울하고 지쳤을 때, 거리를 헤맬 때, 저녁이 너무 힘겹게 내려올 때
내가 당신을 위로할게요. 내가 당신편이 될게요.
어둠이 오고 고통이 가득찰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뉘어 줄게요.
계속 항해하세요. 은빛 그대여! 당신이 빛날 시간이에요.
당신의 모든 꿈이 다가오고 있어요. 보세요. 어떻게 반짝이는지,
만약 친구가 필요하면 내가 바로 뒤에서 항해할게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 마음을 위로해 줄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원로 사목자인 노 사제께서 후배 사제에게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도 깊이 공감하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다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교황을 뜻하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 설치하다를 뜻하는 파체레(Facere)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교황님을 다리를 놓은 분이라 칭했습니다.
사제 역시 ‘다리’를 놓는 소명을 지닙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이웃과 이웃 사이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께 백성의 청원기도와 다짐약속을 전달해 드리기도 하고,
또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백성의 잘못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백성을 위해서
신뢰와 놀라운 담대함으로 하느님께 탄원을 드렸듯이,
또 탈출기 32장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너의 백성’을
모세는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이라 분명히 고쳐 말씀드리며 탄원했듯이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사제는 하느님 앞에 설 때 하느님 편에 설 게 아니라 백성의 편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제는 봉헌의 다리, 희생의 다리, 인내의 다리, 용서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리가 되어 줄 때 시련과 아픔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 시련과 아픔까지도 감수하는 것이 다리의 삶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다리가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이것이 다리가 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인가?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프라 윈프리, 다이에나 황태자비 등
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고,
베스트셀러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책으로
수많은 세계 독자의 삶을 바꿔놓은 토니 로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를 물었을 때
만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토니 로빈스는 넬슨 만델라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문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말로 사람들 안에 있는 거인을 깨우려합니다.
분명 만델라에게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의문하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 낼 수 있을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의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그 오랜 세월을 이 감옥에서 견디어낼 수 있을까?’를 의문하겠지만,
믿음이 있었던 만델라는
‘분명히 건강하게 걸어 나갈 것인데 그러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하지?’를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70이 넘어 감옥에서 나와서도 건강하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유일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며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라고 말합니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빛이라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될 수 있느냐고 의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믿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겠습니까?
그것에 따라서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합니다.
소금의 짠 맛과 빛의 밝음은 생겨날 때부터 가진 ‘본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만 밖으로 나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자신이 늑대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을 가지게 되고 늑대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 아이가 인간의 본성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그 전에는 인간의 행위가 절대 안 나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걸으려고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걸음마도 하게 만들고 옹알이도 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와서 이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믿음에 도달할까를 질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나지.”, 혹은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면 절대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 내가 예수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이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나오는 행동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 슈퍼맨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이렇습니다.
슈퍼맨은 자신이 슈퍼맨으로서 가진 힘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어떤 사람이 “네가 슈퍼맨임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슈퍼맨이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높은 곳에서 세 발짝을 뛰고 밑으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슈퍼맨은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오자
그 스승이 알려준 대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더니
밑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게 되고 세상을 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때 드러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 그 전에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일단락됩니다.
오직 하느님만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들은 겉으로는 선행 같아보여도
그것은 원숭이의 사람 흉내 내기에 불과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고 말한 것은 의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습니다.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했더니 성모님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믿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에 빛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의 믿음은 앞으로 내가 변하게 될 목적지와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분의 본성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계속 본인은 원숭이라고 믿으며 사람 흉내만 내다 죽습니다.
우리는 믿고 오늘 빛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아 ‘저희가 정말 빛이 될 수 있을까요?’만을 의문하다 어둠으로 끝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하셨으면 이미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믿고 의문하는 삶이 아닌 질문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