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
저희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복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복희 씨의 삶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윤복희 씨는 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의 내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쫓아 떠돌게 되며 윤복희 씨 형제들은 고아처럼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던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윤복희 씨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유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출소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혼자 삶을 극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는 말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워낙 천재적인 무대 기질이 있었던 터라 열여덟 살부터 미8군 무대에 섰고 때마침 세계적 톱스타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른 루이암스트롱이 방한하였습니다. 루이암스트롱은 한국에 자신보다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윤복희 씨를 찾았고 윤복희 씨의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로 합니다. 이렇게 윤복희 씨는 소속사에서 집을 세 채씩이나 사 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랑도 찾아옵니다. 서울대 출신이자 독일계 혼혈 가수인 유주용 씨와 결혼합니다. 유주용 씨는 자신보다 윤복희 씨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벌어집니다. 유주용 씨가 윤복희 씨와 당대 최고 가수 남진 씨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을 벌이던 끝에 윤복희 씨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그 소문이 맞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정말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그 결혼이 유주용 씨에게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기에 남진 씨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윤복희 씨는 자기 남편이자 부모의 역할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유주용 씨도 자기를 부모처럼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윤복희 씨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무대에서 혼절하는 때도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고 치매만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혼자이기에 치매가 걸리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누군가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라는 게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복희 씨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와 같은 사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사람을.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부모처럼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니 그 빈 곳만 바라보며 계속 누군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행복을 바랐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나 돈, 명예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랑 받으려면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 받기 위해 사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싶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인지 찾는 것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다”라고 원해야 그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누가?”나 “무엇?”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배제되고 그러면 줄 것이 없어져서 얻을 것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게 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 주려면 부족한 게 없어야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https://youtu.be/1vmB5-F_atw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