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춘殘春 / 박주병
시들마른 이 가슴이 설레는 봄밤, 오늘 밤이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것 같다. 로마에는 봄을 잡아가는 악귀가 있단다. 악귀를 쫓는 빨간 글씨의 부적도 있단다. 부적을 그리려는지 호텔 로비의 불빛이 경면주사처럼 붉다. 한 보름 쯤 객고와 여수에 겨운 나날을 보내고 나서 이런 오색 불빛 아래 발길을 들여놓아 보아라. 그대가 열아홉 살 현숙한 정녀라 하더라도 발바닥에서 얼음장이 찡 하고 금이 가지 않겠니?
일행은 태극기를 꽂으려 나간다며 술렁거린다. 맹해 있는 나를 본 눈치 빠른 한 일행이 내 어깨를 톡 치며 비시시 웃는다. 태극기를 꽂는다는 말은 외국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는 은어란다. 이끄는 손목을 간신히 뿌리치고 가슴을 누르며 나 홀로 벤치를 지키는 선수가 되었다.
일행은 열다섯인데 삼십 대에서 오십 대까지 섞였다. 나를 비롯해서 관리가 셋이고 나머지는 모두 정치단체의 간부들이다. 고국을 떠나온 지 한 열흘 쯤 되고부터 그들의 입에서는 듣기 민망한 음담패설이 간간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오늘 밤에는 기어이 실전에 돌입할 태세다. 이태리에는 가죽제품이 유명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잊지 않고 부인에게 줄 명품가방을 산다며 낮에는 ‘구찌’니 ‘팬디’니 하면서 그렇게도 수선을 떨어대더니만…. 삼십 대 젊은 동료 하나는 내일 아테네에 가면 부인이 좋아하는 나나무스꾸리의 LP 음반을 사야겠는데 돈이 똑 떨어졌다며 내게 돈을 꾸기도 하더니만….
텔레비전을 본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축구․농구․배구․탁구․골프 등에 대한 해설을 하는 모양이다. 그까짓 구멍에 공 넣는 짓이 뭐 그리 신이 날까. 갑자기 밖이 떠들썩하다. 경기를 끝내고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인 것 같다.
옆방에 들어서니 홍등가의 무용담으로 왁자지껄 웃음이 자지러졌다. 여장 남자를 만나 혼겁을 집어먹고 해웃값은 생각도 않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려왔다는 한 동료가 아직도 숨이 식식거린다. 그는 고혈압 환자로서 귀국을 서둘러야 할 처지에 있는데도 말이다. 이어 고스톱 판이 벌어진다. 야구경기의 룰도 몰라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이 고스톱의 룰인들 알 리가 있겠는가. 담배연기에 눈이 하도 따가워 더 머물 수가 없다.
이 밤도 깊었다. 이번 여행의 단장이라고 해서 나에게 굳이 독방을 쓰란다. 독방이라서 그런지 이 밤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 기내에서 구입한, ‘paris’라는 금박 글씨가 까만 가죽 바탕에 정교하게 압인되어 있는, 어린 여자들이 퍽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작고 참한 크로스 가방을 꺼내어 만져본다. 가방은 문득 연인의 허리처럼 내 손에 익고 손끝은 또 왜 이리 자리자리한지.
일편잔춘(一片殘春), 한 조각 이지러진 봄이다. 우리 동내 앞산엔 진달래가 다 지고 말았겠지. 두견이도 목이 메었겠지. 그리움을 만리에 두고 밤이 홀로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