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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3,11-26>
그 무렵 치유받은 불구자가
11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이 주시는 믿음>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어제 베드로의 기도로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몰려오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죽인 예수께 대한 믿음의 힘이 이를 낫게 했다고 얘기하면서 베드로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
그러니까 믿음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고 주는 것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때 믿는 것은 우리가 믿는 거지만, 우리는 사람에 따라 믿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은 믿음을 주고, 어떤 사람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간다는 표현도 쓰는데,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가냐 하면, 믿음을 주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 갑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는 믿음을 잘 받아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잘 믿지 않는 것이 쉽게 속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미덕인지 모르지만, 의처증처럼 중증은 아닐지라도 심각한 문제이고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잘 믿지 않는 것은 불신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만 누구보다 자신에게 손해이니 말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고, 아무하고도 소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잘 믿는 것은 하느님을 잘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 사기꾼은 잘 믿으면서 정작 믿어야 할 주님은 잘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인간 사기꾼이 주님보다 더 믿음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가 믿음을 주는 것은 내가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그가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그가 믿음을 줘서가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이런 헛믿음을 거친 다음에 옵니다.
사도들이 좋은 예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도들은 죽임당하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왕이 되실 것이고 자기들은 한 자리 차지하게 될 거라고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었지요.
그렇게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가 그 믿음이 헛된 믿음임을 안 뒤 비로소 믿어야 할 것을 믿게 된 것이고, 믿어야 할 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곧 주님을 믿게 된 것이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것만 있고 나쁜 것은 없다는 놈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은 없고 즐거움만 있다는 놈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고, 영원한 것에서는 더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과 수난을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는 말을 믿어야 하고, 수난을 무릅쓰는 사랑을 주시는 주님만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직자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보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사랑은 셈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증인,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네 단계>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시고 심지어 생선토막까지 먹어 보이시자 그들이 믿게 됩니다.
믿으면 일어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성경에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고 하듯 기쁨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사실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의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으신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4-45)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사실 모든 성경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아담’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아담은 옆구리가 뚫려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갈비뼈를 봉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납니다.
당연히 당신 옆구리에서 물과 피로 교회를 창조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새 아담은 이제 새 하와인 교회를 당신 신부로 삼으십니다.
에사우’는 어떨까요?
야곱에게 당신의 의로움의 가죽옷을 입혀주고 자신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에사우가 메시아의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 판’은 어떨까요?
우리 자아인 황금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한 번은 깨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십계명 판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의 모범이요 법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이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에게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시각으로 구약을 보기 때문에 비로소 구약이 그리스도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믿는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성경 해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다음 변화는 ‘소명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루카 24,47)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 부활을 믿으면 우리가 선포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를 수 없습니다.
만약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는 우리로서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을 그는 선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전능한 힘 중에 하나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할 때,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은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고 다닙니다.
생각의 에너지를 옷 고르는 데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 생각을 사로잡는 세상 것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세상 집착을 끊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면 누구처럼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회개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죽으면 영원히 부활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분으로부터 힘을 받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 곧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루카 24,49)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힘을 어디서 받는지 압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양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로서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오십니다.
유튜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엄마의 밥’에서는 엄마들이 직접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몰래 집밥을 해 주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의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며 힘겨운 유학 생활의 힘을 얻습니다.
엄마는 자녀가 있는 곳에 갑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우신 하나인 교회는 가톨릭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알면 어쩌면 그것 자체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 어디로 오시는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JTBC Voyage, ‘엄마의 손맛 재현에 감동한 스타들 모음’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쯔이와 바다, 그리고 박철민 씨가 셰프들이 재현한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내용입니다.
그냥 음식이지만 지금은 함께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음식만으로 큰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힘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자녀들이 모인 곳에 당신 음식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사로 내려오시는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살아갈 성령의 에너지를 얻을 줄 안다면 그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것이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산 사람만이 힘을 줄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인들, 그리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단에 직접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른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발현 등 일련의 사건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인사는 가장 필요한 인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반가워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광경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부활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착시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그대로 간직한 채 발현하셨습니다.
목소리도 예전의 그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전과는 다른 존재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구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드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진실로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여 주시고자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당신께서 그들과 똑같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분, 틀림없이 바로 그분이셨다. 우리는 분명히 그분을 만났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을 보면, 죽은 사무엘의 혼백을 사울 왕이 불러내서 자신의 앞일을 물어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1사무 28장).
그 이야기처럼 사도들이 예수님의 혼백을 만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사실 오늘날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입장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는 것과 자기들이 유령을 본 것도 아니고, 환시를 체험한 것도 아니고, 영적인 존재를 만난 것도 아니라고 증언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긴 했는데 예수님의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서 무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유령이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갑자기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셨을까?
그 이유는 모릅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라는 말씀은 손과 발에 남아 있는 상처를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처들을 그대로 지닌 채 부활하셨고, 그 상처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신 것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상처들을 보고,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가 될까?
아닙니다.
또 그들이 유령을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가 될까?
아닙니다.
그것은 ‘증언’이지 ‘증거’가 아닙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도들의 ‘증언’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각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달린 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바쳐서 자신들의 신앙과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통해서 증명되고 전해진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은 아마도 부활과 승천 사이의 사십 일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요약해서 기록한 말씀들일 것입니다(사도 1,3).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은 차질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사도들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부활 전에는 사도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들과 일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는 가르침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선포 대상은 ‘모든 민족들’, 즉 ‘모든 사람’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예루살렘일까?
예루살렘은 구약시대 때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도시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과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주 임무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입니다(사도 1,22).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부활 증인의 삶 - 회개, 평화, 기쁨>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에 맞춰 봄철에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에 연초록 아름다운 초목들입니다.
일년 중 가장 많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새들도 참 많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평화로운 분위기의 요즘 봄날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참으로 부활시기 전례에 맞는 참으로 역동적인 생명과 빛으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유난히 샛노란 색깔의 봄꽃들이 많습니다.
여지없이 때되니 수도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예전 써놨던 검정 고무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
-1998.5.7.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을 체험할 때, 볼품없는 검정고무신같은 존재도 꽃신이, 하늘이 되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년 전부터 해마다 폈다지는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은 그대로인데, 그동안 세상 떠난 사랑하는 형제들이나 친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귀한 인생, 하루하루 새롭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현재에서 영원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파스카 축제의 주님 부활 시기의 매일 미사 말씀이 참으로 역동적이고 신바람 가득합니다.
어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와 합류하여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화를 나누는 중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입니다.
유령이나 귀신이 아닌 생전 그대로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이요, 제자들의 마음 역시 놀라움과 더불어 기쁨 가득한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에 이뤄지는 저절로의 회개요, 더불어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예전 수 차례 인용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한 수도형제가 어느 수도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다 갖췄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더라는 것이며, 뭔가 물었을 때, '기쁨!'이란 답변이었습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 다 갖췄어도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빠졌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명약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와 기쁨, 희망입니다.
이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 다음 당신 부활의 증인들로,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 신바람 가득한, 역동적인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되어, 선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됩니다!”
“폭풍이 변하여 미풍이 됩니다!”
“짐이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바로 주님 부활의 증인인 우리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솔로몬 주랑에서 성령 충만하여 열화와 같은 설교를 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된 주님 부활의 증인,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박진감 넘치게 와닿는 설교입니다.
예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베드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살렸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라 합니다.
새삼 믿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불구자를 살린 최고의 명약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어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입니다.
복음의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는 베드로입니다.
설교의 중요 구절을 정리합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도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참 은혜로운 말씀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설교의 핵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의 인간은 변함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의 양상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탐욕, 분노, 질투, 어리석음, 이념이나 종교에 중독된 광신등 끝이 없습니다.
극우, 극좌, 모두 무지에 눈먼 광신적 모습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으로서 참된 회개가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마음의 순수, 겸손, 지혜, 자비입니다.
어제 써놓은 지혜의 눈이란 글을 나눕니다.
“눈 있어도, 눈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혜의 눈’
거의가 제정신이 아닌 맹목의, 광신의 사람들이다
세상 공부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래서 악도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말씀공부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사랑하여라
주님은 ’지혜의 눈’이시다”
인간 존재의 고질적 현실인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회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이요,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과정이, 보잘것없는 한 영혼을 기도하는 영혼, 당신께 머물러 통교하고 일치하는 영혼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과 어찌 그리 흡사한지 경탄을 하며 머물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나고 서둘러 되돌아온 두 제자가 열한 제자, 동료들과 함께 모여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루카 24,36) 서십니다.
예수님을 잃은 날부터 시작해서 주간 첫날 여인들이 달려와 전한 빈무덤 이야기, 천사의 발현 소식,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증언 등으로 그들은 지금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누구는 믿고, 누구는 의심하고, 누구는 안심하고, 누구는 부러울 겁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십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승천 이후에도 그분 이름으로 모인 모든 공동체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중심에, 가운데에 계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사를 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6)
평화의 인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염원과 같은 축복입니다.
오랜 유배생활과 식민지 생활로 피폐해진 그들에게 평화는 곧 하느님 나라의 표지니까요.
제자들 안에 술렁대는 의혹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안팎으로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부활을 믿도록 한 계단 한 계단 접근하십니다.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루카 24,39)
'내'가 곧 너희와 지내다가 죽고 부활한 '그'임을 직접 체험하게 하십니다.
만지는 것, 살과 살이 닿고 감촉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감각하는 것은 참으로 친밀한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제자들에게 허용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과 더불어 예수님 몸에 흐르는 온기를 통해 그들 향한 마음의 사랑도 감지하길 바라시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청하시지요.
예수님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루카 24,42)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루카 24,23)십니다.
그동안 스승과 지내며 수없이 식사를 함께 했을 제자들은 드시는 모습만으로도 예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루카 24,45)십니다.
당신의 실재를 확인시켜 주신 뒤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근거인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8)
사실 아직 증인이 될 만큼 굳건해지지도 못했고 증거할 만한 일도 없었지만,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깨닫게 하시어 당신 증인으로 만드시는 과정은 이처럼 체계적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양성 과정 또한 그러할 겁니다.
피양성자인 우리가 그 순간에 미처 깨닫지 못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한계를 아시는 그분은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 차츰차츰 우리에게 접근하시고 침투하신 후 점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만드시는 이 과정은 흡사 기도의 여정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영혼의 인격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현존하십니다.
(사실은 갑자기 인생에 끼어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본래 계셨는데 어떤 계기로 당신 현존을 일깨우시어 의식하도록 하신 것일 겁니다.)
당신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선사하고, 직접 당신을 터치하게 허용하시는데, 이 신비로운 접촉은 영혼의 갈망을 부채질하지요.
또 그분은 기도 초심자에 맞게 처음에는 감각부터 시작해서 여러 경로로 당신이 살아계신 주님임을 드러내셔서 영혼이 주님과 인격적으로 더 가까와지게 끌어당기십니다.
그리고는 처음에 뭣도 모르고 주님께 이끌린 영혼의 눈을, 마음을 열어주시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인간적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출발한 신적 지식을 채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하는 영혼은 주님과 나누는 사랑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서지 않아도, 큰 소리로 드러나게 외치지 않아도 그는 사랑의 증인입니다.
그가 기도의 영혼, 사랑의 영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일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 기도하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진정 기도하는 영혼이야말로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부터 시작하여 부활 복음들에 담긴 표상들은 셀 수 없습니다.
그 출발은 단순합니다.
"치유받은 불구자가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사도 3,11)을 때, 온 백성에게 다른 증거나 증인이 필요 없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분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의 현존 자체가 증거이고 증언이 될 것입니다.
오늘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이 빌어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만져보고 느껴보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교를 나누었던 그 추억을 새롭게 함으로써 살아계신 그분의 참 증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외출할 때면 꼭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손수건입니다.
스마트폰은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지갑은 계산을 할 때 열게 됩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접어놓은 손수건은 제 몸에서 나오는 이물질을 받아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에 산보를 하면 콧물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손수건은 꼭 필요합니다.
손수건을 다 쓰고 빨래바구니에 넣으면서 한 번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하면서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손수건을 보니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땀과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주는 손수건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습니다.
베로니카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예수님 고난의 길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였고, 십자가의 길 6처에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은 육체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유령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 죽겠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표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용기 있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성찰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희망과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상처를 치유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높은가 혈당치가 어떤가 물어보는 일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나머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곱게 접혀진 손수건은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증인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구겨지고 지저분할지라도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손수건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옷에 진흙이 묻을지라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묻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8~90년대, 동네에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000원 또는 2,000원의 대여료를 내고서 테이프를 빌려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대신 화질이 좋은 DVD로 넘어가고 있었지요.
친한 선배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습니다.
공무원 생활로는 돈 벌기 힘들다면서 90년대 말에 대여점을 연 것입니다.
초반에는 잘 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이 사업을 접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남따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넷플릭스를 알 것입니다.
미국 콘텐츠 플랫폼 및 제작사로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입니다.
이 기업의 시작은 DVD 대여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기에, 현재 전 세계 2억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 따라 하는 변화보다 자기 본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변화를 원하시지, 남 따라 하는 변화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신 것이겠지요.
예수님 부활 소식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증언, 이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 보는 줄로 생각했다는 증언으로 볼 때,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한 전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잘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겠지요.
이런 제자에게 당신의 오상을 보여주십니다.
육신상의 부활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 역시 육신의 부활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영혼은 세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부활의 표징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에 구원을 위한 주님의 일을 계속하는 변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이 변화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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