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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를 조명한 책이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본문은 아테네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중국까지 지구촌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세계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 시대의 문화와 역사의 반영으로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2010년 기준으로 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26개국, 불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53개국, 혼합 정체는 33개국, 권위주의 정권은 55개국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고달픈 경제 현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강요하려는 시도 등이 민주주의의 이상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 원인이라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왔으며,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는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저자 : 로저 오스본
저자 로저 오스본은 맨체스터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과학, 의학, 기술 분야 출판에 전념하다 1992년 전업 작가가 되었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역사 작가 중 한 명으로, 특유의 통찰력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한 안목을 넓혀 그 교훈을 현재에 투영할 수 있게 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 《지질학의 탄생The Floating Egg: Episodes in the Making of Geology》, 인도차이나에서 두 인생을 살며 사기꾼이라는 오명에 맞서 싸운 지질학자 자크 디프라의 인생을 다룬 《자크 디프라 사건의 전모The Deprat Affair: Ambition, Revenge and Deceit in French Indo-China》, 무적함대의 패배와 펠리페 2세의 죽음 등을 꿈으로 예언한 16세기 에스파냐의 신비 소녀 루크레시아Lucrecia의 이야기 《루크레시아의 꿈The Dreamer of the Calle San Salvador: Visions of Sedition and Sacrilege in Sixteenth-Century Spain》, 그리고 제국과 예술, 철학, 과학 및 정치의 역사를 색다른 시각으로 엮은 《문명Civilization: A New History of the Western World》 등이 있다. 특히 《문명》은 균형 잡힌 시각과 참신한 서술 방식으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가디언The Guardian> 등의 매체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역자 : 최완규
역자 최완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와 통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YTN에서 방송통역사로 활동했으며 영어 전문 포털 네오퀘스트의 대표를 역임했다. 미국 Wiley & Sons의 기술전문 출판부Wrox의 기술 저자 및 리뷰어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이 땅에 태어나 영어 잘하는 법》(공저), 《동사를 알면 죽은 영어도 살린다》 등이, 옮긴 책으로 《확신하는 그 순간에 다시 생각하라》, 《차이의 붕괴》, 《기업, 마음을 경영하라》, 《그들이 위험하다》, 《콘텐츠의 미래》 등이 있다.
프롤로그
1장 아테네와 고대 세계_ 참여하는 시민
2장 의회와 집회_ 대표되는 시민
3장 중세 도시와 도시 공화국_ 부르주아 시민
4장 하이 알프스의 민주주의_ 공동체 안의 시민
5장 영국혁명_ 지배당하는 시민
6장 아메리카의 민주주의_ 유권자 시민
7장 프랑스혁명_ 운동가 시민
8장 라틴아메리카의 공화국들_ 억압받는 시민
9장 19세기 유럽_ 거부당한 시민
10장 포용과 후퇴_ 이상에 빠진 시민
11장 인도_ 독립한 시민
12장 전후 서방 세계_ 소비하는 시민
13장 민주주의와 탈식민지화_ 착취당한 시민
14장 유럽 공산주의의 몰락_ 승리한 시민
15장 1989년 이후의 민주주의_ 눈뜬 시민
주
참고문헌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
프랑스ㆍ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중국까지
세계를 정복한 민주주의의 역사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이는 의심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얼마나’민주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하는 책이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여태껏 채택했던 모든 제도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체제다.’이 책은 이와 연장선상에서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두말할 것 없이 인류 최고의 업적이다.’
2012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외친다.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또 민주주의의 진보와 후퇴를 가늠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 번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이상화하고, 변용하고, 왜곡하고, 또 놀리고 조롱한다. 처음 민주주의가 태동했던 아테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지만,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란 무엇이다’라고 섣불리 정의하지 않는다. 또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과 분석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대신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 시대 문화와 역사의 반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오롯이 보여준다. 이 책은 아테네 이후 프랑스, 영국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중국까지 전 세계 역사 속에서 함께했던 민주주의를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속에서,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또 오늘날과 같이 대다수의 국가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 나라가 ‘얼마나’ 민주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은 2006년 처음으로 ‘민주화 지수’를 발표했다. 2008년 발간된 두 번째 판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민주화 추세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확산이 중단되었다.” 2010년 판의 평가는 더 암울하다. 요약된 내용의 제목은 ‘후퇴하는 민주주의’였고 “2008년 이래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위축되었다”고 천명했다.
책은 보통 다섯 가지 부문에서 관련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60개 질문을 통해 전문적인 평가를 하고 민주화 성과를 분석한다고 설명한다. 이 5대 평가 부문은 첫째 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주의의 존중, 둘째 시민의 자유, 셋째 정부의 기능성, 넷째 정치 참여, 다섯째 정치 문화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2010년 기준으로 살펴보면 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26개국, 불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53개국, 혼합 정체는 33개국, 권위주의 정권은 55개국이었다. EIU는 고달픈 경제 현실과 함께, 민주주의의 감소 원인으로 여러 가지 요인을 규명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강요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이상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어디쯤 왔을까?’‘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는가’이 책은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를 조명한 최초의 책으로 그 속에서 다양한 유형의 민주주의를 만나봄으로써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함과 동시에, 우리가 민주주의와 이 사회에 대해 고민할 때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민주주의 역사의 결정적 사건들
이 책은 아테네에서 시작해 19세기 유럽은 물론 지구촌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각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핀 다음,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요건들을 고찰한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던 프랑스나 영국의 민주주의는 물론 스위스나 인도의 민주주의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형태까지 살펴보고 있다. 책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을 짚어보자.
영국혁명과 퍼트니 논쟁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주목받는 사건 중 하나인 퍼트니 논쟁의 배경은 무엇일까. 1647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군대는 국경 북쪽으로 물러난 후였고, 국왕은 가택 연금 상태였으며 의회파 군대가 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잉글랜드의 주력 부대가 된 신형군이었다. 당시 의회는 병사들에게 280만 파운드를 빚지고 있었다. 상원이 신형군을 해체하기 위해 병사들의 급료 지급을 차단한 것이다. 신형군은 이에 반발하여 밀린 급료 지급은 물론 향후 왕이 복위되더라도 반란 혐의에 대한 면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로써 왕과 타협하고 군대를 해산하자고 목청을 높이는 장로파와 이제 독립파라고 불리게 된 급진파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독립파는 수평파와 결탁했는데, 이들은 병사들의 급료를 모두 지급하고 왕은 국정 운영에서 제한된 역할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반 사병들의 행보는 오늘날 같으면 민주적 제도를 수립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인민을 대신해 발언할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그들의 의견과 우려를 전달하는 정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10월 9일에는 수평파의 뜻이 담긴 ‘진정한 군대의 진술’이라는 문서가 발표되어 10월 18일, 군부 총회의 페어팩스에게 제출되었다. 군 지도부는 반감을 표시했지만, 결국 이 문서를 10월 28일 총회에서 토의하기로 했고, 그 자리에 문서의 주창자들과 민간인 지지자들을 초대했다. 퍼트니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벌어진 열띤 논쟁의 주제는 사실상 ‘군대의 진술’의 골자라 할 만한 ‘인민협약이라는 문서였다. 그리고 10월 28일, 신병을 이유로 불참한 페어팩스를 대신해 첫날 토론의 의장을 맡은 것은 크롬웰이었다. 건의 요강을 작성한 헨리 아이어턴이 군 고위 사령부를 대표하는 연사로 나섰다. 반대편에는 수평파이자 사병 대표로 선출된 에드워드 섹스비 대령, 다른 연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신대리인 로버트 에버라드, 크롬웰의 숙적인 토머스 레인버러 대령이었다. 사병 대표들과 함께 민간인인 존 와일드먼과 맥시밀리언 페티도 대동했다.
이와 함께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가 다루어졌다. 첫째, 종교의 자유, 징병과 전시 행위에 대한 면책권 문제는 새로 구성되는 의회의 권한 밖이라는 결정을 내려 1648년 9월 이전에 이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병들과 수평파로서는 괄목할 만한 승리였다. 둘째, 의회가 알아서 투표 자격을 결정하기로 했지만, 전쟁에 어지간히 이바지한 모든 이와 네이즈비 전투 이전에 입대한 모든 이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의회와 맞서 싸운 이들은 세 번째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투표권을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십일조 역시 아직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다른 공정한 과세 체제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 퍼트니의 사병 대표들과 수평파는 역사상 최초로 민족국가 차원에서 대의정부를 주장한 이들이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현실적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운동가 시민의 등장, 프랑스혁명
18세기가 되자 프랑스 사회는 이미 분열상을 드러냈다. 왕은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국고는 바닥으로 드러내고 흉년이 거듭되었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고, 농촌의 하층민들은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행동들이 잇따랐다. 급기야 국민의회는 ‘8월 법령’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루이 16세는 이를 수용하길 거부한 것은 물론 왕실 군대로 하여금 국민의회를 공격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끼어들었다.
이후 1792년 9월 19일 입법의회가 해체되고 새로 선출된 국민공회에 자리를 내주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792년 중반까지만 해도 혁명을 통해 전제 정권에서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한 헌정 질서로 비교적 순탄하게 이양했다 말할 수 있다. 이는 1792년, 사상 최초로 오로지 하인들을 제외하고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입법의회가 통과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득력 있는 견해다. 1972년 9월 21일 공회는,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이제 권력은 국민공회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혁명 후기는 루소 이상주의의 승리라 할 수 있지만, 초기만 해도 피에르 벨, 몽테스키외, 볼테르, 드니 디드로, 올바흐 남작 등 실용주의를 주창했던 이른바 ‘급진적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존 로크, 토머스 페인, 매리 울스턴크래프트 등 해외 저술가들의 영향이 컸다. 이들 사상가는 저마다 견해가 다르긴 했어도, 군주제의 원리와 사회계층, 종교적 차별 및 교회의 권한 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쟁에 불을 지폈다.
프랑스혁명은 절대군주제에서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정치 체제로 이양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유럽 공산국가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1980년대 들어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공산주의라는 성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을 알린 것은 폴란드였다. 경제 위기로 치닫던 같은 해 여름, 그단스크 조선소와 실레지아의 노동자들은 잇달아 파업을 벌이고 공장을 점거했다. 9월에는 레흐 바웬사라는 전기공의 탁월한 지도로 자유노조라는 이름의 전국적인 단일 노조가 결성되었다. 엄청난 회원수를 자랑하며(1981년에는 1,0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자유노조는 민주정치 개혁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981년 계엄령이 선포되고 자유노조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지만, 폴란드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의 경제 혼란을 이겨낸 서구 진영은 소비자 주도의 호황을 누렸지만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역시 경제적으로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면서 1980년대 내내 교착 상태를 지속했다. 1988년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800달러에 그쳤다. 프랑스의 1만 8,000달러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치였다.
1988년, 자유노조는 완전한 정치 개혁을 밀어붙였다. 여름 내내 파업을 벌여 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마침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신임 대통령도 그간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던 브레즈네프선언의 종말을 시사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소련권에서 전개되던 드라마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동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다는 가시적인 징후가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공산당이 참패를 맛보았던 1989년 6월 선거였다. 7월 3일 소련 특사는 폴란드가 자국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은 폴란드 공산주의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유럽 전역의 공산주의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민주주의 정의의 어려움과 후퇴하는 민주주의
이 책의 저자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연대기순으로 풀어나가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달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여기고 잘못된 가정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먼저 새로운 민주주의가 옛 민주주의로부터 무언가 배웠을 거라는 것, 또 민주주의의 전개가 개선을 뜻한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모든 민주국가는 제 나름대로 민주적 제도와 관례를 만들어내야 했으며, 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만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는 어느 모로 보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고도로 발달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에 따르면 아테네 민주주의는 특별히 그럴 만한 상황들이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인 우연’이다. 분산된 영토, 분열된 과두정, 비교적 강력한 소수 농민 병사 계급, 권력 공백, 자기 의존과 권력 분담의 문화, 번영의 원천이 된 은광, 시민을 결속시킨 외세의 위협, 다른 도시들과 문화를 교류한 덕분에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이주해 온 인재 등 우호적인 여건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아테네 역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결정적인 모범 답안은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 또한 민주주의를 쉽게 개념화하려는 충동을 경계한다. 물론 이러한 개념화를 통해 어느 사회에든 쉽게 민주주의를 적용하려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기 때문에 도식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주요 기능이 바로 변화와 적응이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지탱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제도와 민주적인 통치 관행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이를 구현한 사회와 공생 관계를 맺는다. 사회가 변화를 거부하면 민주정치가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민주적 제도와 관행이 억눌린 사회는 퇴화하고 만다.’
우리 민주주의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또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대한 역사적 밑거름을 제시한다.
책속으로 추가
1618년 발간된 <그라우뷘덴 강령Graubundnerische Handlungen >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우리의 정부 형태는 민주적이다. 우리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모든 영토의 모든 행정관, 법관, 공직자의 선출 및 해임 권한은 우리 평민common man에게 있다.” ‘민주적democratic’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17세기 이전 독일에서 민주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는 드물며, 라틴어 문서에서 사용될 경우는 대개 나쁜 정부의 사례를 가리킬 뿐이었다. 자신들의 주장을 펴면서 그라우뷘덴 시민은 정치 이론에 의존하지 않았다. 한 세기 동안 한 국가에 살면서 체험한 공동체적 정치 경험을 바탕으로 온 유럽에 정치권력과 정통성에대한 관념을 나름대로 들려준 것이다. ■ 4장 하이 알프스의 민주주의 pp.130~131
헌법은 1950년 1월 공식 선포되었다. 이로써 인도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국민주권을 강조하고 평등과 표현의 자유 등 특정 권리를 보장하는 등 헌법 전문은 서방의 전례를 따랐다. (…) 그렇게 신생국 인도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번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국민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안정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유와 질서의 균형 유지라는 영원한 숙제에 봉착한다. 영국 식민 통치하에서 억압받던 인도인들은 이제 자유민이 되었지만, 사회는 질서 있게 돌아가야 했다. 세 가지 요인이 안정 유지에 보탬이 되었다. 첫째,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켰고, 둘째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인도 문관제가 정치적 무질서를 바로잡는 완충 역할을 했으며, 셋째 독립 이후 초반 몇십 년 동안 국민회의가 독주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국민회의의 독주가 워낙 심해서 인도는 한때 일당 독재 민주주의라는 모순된 양상을 띠기도 했다. ■ 11장 인도 pp.365~366
세계 각국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깊어져,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영국 같은 강대국들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다. (…) 2001년 9월 직후, 유엔의 승인을 받지 않은 나토 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Taliban 정부를 축출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토는 국제안보지원군ISAF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아프간전쟁을 치른다. (…) 미국과 연합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겠다는 포부에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국을 아우르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지만, 이조차도 달성 여부가 불투명하다. ■ 15장 1989년 이후의 민주주의 pp.477~478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이주민의 후손이라 여겼다. 신화에 따르면 이들의 도시는 올림포스 신들의 은총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리스 반도와 섬들을 장악한 민족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남아 있다. 기원전 12세기 서쪽 유럽 대륙으로 대이동이 일어났을 때 이주해 온 것이다. (…) 이주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이주 사회는 사회 이동의 여지가 크다. 흔히 신분 계급을 꺼려 왕이나 군주, 귀족 등을 두지 않는다. 사회 권력이 토지 소유권과 연관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영토로 이동하면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구조가 무너져 더 평등한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연관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시대와 장소도 있지만, 대부분은 급속도로 권력을 독점하는 소수 집단이 등장하면서 이주민이 평등한 사회를 유지할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아테네인들의 업적은 이들 사회의 기본 얼개를 보전하는 체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 1장 아테네와 고대 세계 pp.29~30
그리스 사상가들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령 모두에게 자신들이 원할 때만 군역을 지도록 자유를 허락한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도시를 방비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자녀를 교육시키지 않을 자유가 주어진다면 미래 사회가 어떻게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시민이 제멋대로 투표를 할 수 있다면 그런 결정들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그(플라톤)의 정치 이론은 질서와 자유라는 폴리스의 욕구와 개인의 욕구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갈등을, 그 양단간 거리를 좁힘으로써 해결해주었다. 개인은 정부뿐 아니라 자녀 양육, 종교, 문화 등 삶의 모든 면을 규정하는 고도로 구조화된 체제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세계의 다른 정치 형태들을 살펴보고 범주를 나누어 분석했다. 모든 시민에게 발언권을 주고 참주들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 1장 아테네와 고대 세계 pp.48~49
유럽이 봉건군주들의 대륙이 되어가던 11세기와 12세기에는 장인, 노동자, 석공, 성직자, 상인들이 북적대는 도시들이 무역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봉건제도의 여파로 귀족 가문은 지방의 일정 지역에 대해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지역을 최대한 안전하게 다스려야 얻는 이익도 많았다. 마음 놓고 왕래할 수 있어야 영주들이 도로 및 강물 사용료를 넉넉하게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안전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다 보니 도시 간 무역이 성행했고 번영의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2세기 이후부터 유럽 전역의 도시에 수없이 많은 특허장charter(중
세 도시의 자치에 관한 여러 권한을 인정한 증서 - 옮긴이)이 하사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는 시장을 열고, 개인 소득자에 비해 무역업자들에게 더 양호한 조건을 내걸고, 물품들에 세금을 매길 권리를 얻었다. 농업 생산성 향상으로 유럽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가운데 부를 누릴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더 많은 도시가 생겨났다.중세 유럽에서 도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였다. 특허장에는‘자유free(봉건적 의무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영향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 2장 의회와 집회 p.77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도시들은 왕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왕국에 둥지를 틀었지만, 사실 그들은 도시 생활에 필요한 기본 문제의 해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까마득히 먼 곳에 사는 아득한 인물들일 뿐이었다. 도시 거주자들에게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교회였다. 교회의 구조 역시 구체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소교구 연합에서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보니 호미네스Boni homines를 선출해 교구 교회의 본바탕을 유지했고 이런 체제는 상수도와 공중 보건 등 다른 공동체 필수 여건들은 물론 이웃 간의 불화를 해결할 수 있는 비공식 재판소에까지 확대되었다. (…) 피렌체에서 보니 호미네스라 부르는 이들의 직업은 대장장이, 재단사, 종을 만드는 주종사 등 장인 계급까지 포함되었다. 1124년 문헌에는 시에나의 보니 호미네스가 교황에게 이웃 아레초 시와의 분쟁 해결을 호소하러 로마로 길을 떠나는 주교와 동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듬해 시에나에서는 집정관의 통치 기구와 보니 호미네스가 나란히 시정에 참여했다. 위로부터의 권력과 아래로부터의 권력이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 3장 중세 도시와 도시 공화국 pp.107~108
첫댓글 로저 오스본 지음 / 역자 최완규 옮김 / 역자평점 10.0 / 출판사 시공사 | 2012.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