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짐 부려놓고
화선지 앞에 앉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먹을 간다 가슴을 간다
붓매에
머무는 눈길 물소리만 들린다
흘러라 구비 구비
지구 휘돌아 흘러라
공해 오염 씻어내고
맑게 맑게 흘러라
낙관도
공해 같아서 그냥 두고 나왔다
이명자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2가 220번지 성모어린이집>
[차상]
무명의 새
상흔(傷痕) 짙은 덤불 속에
외눈박이 무명의 새가
옥잠화 겨울 나듯
시어(詩語)를 쪼고 있다
헤집고 또 헤집어 봐도
모이 한 톨 없을 것 같은
문무열 <경남 진해시 풍호동 우성A 102-707>
[차하]
폭설, 오두막 한 채
무차별 눈부신 공격 시작된 지 오래다.
떨어진 은빛 파편 가리가리 흩날리어
세상의 모든 혈관들 야금야금 조여 온다.
그것은 반란이다. 분별 없는 대항전이다.
분노를 잠재운 그 순백색 언어들이
바람에 온몸 날리며 타전하는 메시지.
폭설에 묶인 발목 휘청거리는 오후 한 때
각질을 벗겨내던 내 사랑의 뒷자리는
눈 덮인 작은 요람인가 오두막집 한 채.
김정연 <서울 서대문구 홍은 3동 338-96>
<심사평>
응모한 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시조의 율격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시조는 율과 격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전통시라고 한다.
따라서 율격은 기본이라는 생각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어린 학생들의 작품이 오래 전부터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시조가 젊어져야 한다는 명제와 부합하는 일로서, 그들의 시적 성장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정 수준에 오른 여러 작품 가운데서 이 달에는 장원으로 이명자씨의 `묵화` 를 뽑았다. 우선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노래한 점이 좋았다. 거기다가 마지막 종장 "낙관도/공해 같아서/그냥 두고/나왔다" 는 결구는 아주 뛰어났다. 모름지기 시란 이렇듯 막힘 없는 흐름에 그 나름의 시적 안목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차상에 오른 문무열씨의 `무명의 새` 도 빼어난 단수였다. 군더더기가 없는 표현에다 무리없이 잘 갈무리한 점이 돋보였다. 이 작품 외에도 연작을 보내왔지만 중언부언 첨삭이 많아서 단수를 택했다. 역시 좋은 시는 불필요한 언어를 마치 곁가지 치듯이 과감하게 전지하는 시작(詩作)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
차하에 뽑힌 김정열씨의 `폭설, 오두막 한 채` 도 잘 짜인 작품이었다. 상을 가다듬는 솜씨나 언어를 다루는 역량이 이미 아마추어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어느 시에서 본듯한, 발상의 독창성은 떨어진다.
좋은 작품을 읽고 또 뽑는 재미가 선자들만의 즐거움이 아닐진대 독자들께서도 함께 시 읽기의 행복을 나누게 되리라 확신한다.
낮이면 햇빛 아래 잊혀져 버렸어도
밤잠 못 이루는 사람들 곁에 켜져서
졸리운 눈을 비비며 환해지면 좋았다
꼬리쪽이 검어진 어느 날 그 저녁
껌먹이다 껌먹이다 끝내 죽고 말아도
한 생애 빛이였다고 기억되면 되었다
권보희 <충남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1구 162-1>
* 심사평---------------------------------------------------------
학생들의 투고 작품이 늘고 있어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시조의 율격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우리 학교의 국어 내지는 문학 교육이 아직도 시조에 대해서는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한 방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럼에도 어린 학생들이 우리 시인 시조를 습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원으로 뽑은 황정희씨의 `겨울나무` 는 한마디로 단아한 작품이었다. 율격도 잘 지켰고, 상의 전개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셋째 수 마지막 종장 "다듬고/ 깨우친 숨결/ 봄을 틀어 올린다" 라고 하는 다소 평이한 점이 없지도 않지만 이 결구가 없었다면 아마 선자의 눈에 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에 수없이 많은 겨울나무를 대상으로 삼되, 화자만이 볼 수 있는 겨울나무의 어떤 한 모습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시의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차상에 오른 하현진씨의 `파스 한 장` 은 연작 중에서 한 수만을 취했다. 아픈 노동의 현실을 노래한 이 작품은, 자칫 연작에서 빠지기 쉬운 상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일련 숫자를 달아 처리했지만 역시 단수의 완결미를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낳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직설법의 호소력에 시를 전부 맡기게 되면 너무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앞서 말한 학생들 작품 중에서 권보희의 `형광등` 을 차하에 올렸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당한 결과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제목처럼 어둠을 몰아내는 밝고 환한 빛이 될 예비 시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쁨을 잠시나마 누리게 해준 화자에게 새삼 박수를 보낸다.
고무공이 머금은
어느 꼬마 땀방울
잔디의 지난 겨울
꿈의 씨앗 뿌려 놓고
새로이 일어서 오는
가닥가닥 봄의 나날.
비었던 잔디밭에
4월이 차오르고
잔디 위 고무공은
여전히 비었지만
베란다 난간 파릇이
새로 돋는 희망 줄기.
때로는 텅 빔이
가득함의 계기되어
움켜진 것 놓는 여유
따뜻한 가슴된다.
구멍난 고무공 채운
탱탱한 탄력, 봄.
이정은<서울시 노원구 상계6동 주공아파트 324동 302호>
[차 상]
물안개 속살 보면
물안개 속살 보면
볕살이 곰실댄다
머리카락 흩던 바람 귓속말로 깨워낼 때
한 타래 여린 씨앗들
굳은 맘 파고 들고.
옹골진 저 의지로
돋아난 풀꽃더미
쪽빛 향기 아롱아롱 코 끝에 맴도는데,
얼마나 기다렸을까
꽃잎 한 장 그 떨림.
샛노란 길을 따라
콩콩 뛰며 딛는 걸음
스치는 옷자락에 다가서는 얼굴마다
아가의 방긋 웃음이
둥글게 번지네요.
김성환<부산시 북구 화명동 1314-3번지 23통 3반>
[차 하]
찔 레
옥양목 저고리 함초롬히 차려 입고
산과 들 외진 골짝
가시 총총 지켜 서서
인공 때 가신 이모님 손톱 길게 세웠나.
꽃잎 지고 붉은 열매 그 무슨 표상인가
굴뚝새 어린 짐승들
가시덤불 품에 안고
찔레꽃 월정리 넘어 남녘 안부 띄우네.
오균석<서울시 동대문구 휘경2동 286-25>
<심 사 평>
이 달에는 무르익은 봄에 어울리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시조는, 시조의 일정한 형식미를 마땅히 갖추었을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은 투고작이 태반이었다. 또는 시조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한편의 좋은 시조로 승화시켰다고 하기엔 모자람이 많았다.
아울러 많은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열일곱살은 열일곱살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 중에도,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요건을 대체로 만족시키는 세 편의 시조를 뽑을 수 있었다.
장원을 차지한 이정은의 '봄'은 호흡이 긴 것이 돋보였으나 더러 어색한 표현이 있고, 각 수의 종장을 모두 명사형으로 맺었다는데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잔디밭에 놓인 구멍난 공으로부터 꼬마의 땀방울을 기억해 내고 파릇이 올라오는 새싹에서 희망과 '탱탱한 탄력, 봄'을 읽어내는 신선한 상상력이 매력이었다.
차상에는 능숙하게 시조 가락을 타면서 봄의 환희를 섬세하게 그려낸 김성환의 '물안개 속살 보면'을 뽑았다. 고3 학생으로서, '얼마나 기다렸을까/꽃잎 한 장 그 떨림'에 이르기까지는 시조공부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했으리라. 그러나 '한 타래'와 같은 표현이 적절한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차하에 오른 오균석의 '찔레'에는 긴 세월이 녹아 있다. 하얀 찔레꽃에서 화자(話者)는 '옥양목 저고리 함초롬히 차려 입'은 이모님을 보고, 또 그 '붉은 열매'에서는 꽃다운 생을 전쟁으로 앗긴 이모님의 한을 떠올린다. 이 애잔한 아름다움을 차하에 올리기 위해 이 시조의 첫 수 종장을 다시 놓아야 했다.
가파른 비탈길 옆 고개 꺾은 가로등 밑
알량한 민모가지 꽃대 낮게 세운 저 것
4월은 또 궐기한다, 개나리꽃 마구 핀다.
김기철<서울시 동작구 상도1동 110-61호>
[차하]
별
하늘에 좀이 슬었나
잘 익은 검은 밤
퐁퐁 뚫린 구멍으로
별빛 언 듯 비치네
구멍난 어머니 속옷
따뜻한 별 숨었네.
우은진<경남 진해시 풍호동 우성아파트 106동 308호>
* 심사평
장원작 '스크래치' 시조성·현대성의 적절한 조화 돋보여
지상백일장은 현대시조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마련되었다.
굳이 '현대시조'를 내세우는 것은 명칭이 갖는 '현대성'과 '시조성'을 짚어보아야 할 필요에서다. '시조성'이라 함은 전통계승의 문제이고, '현대성'이라 함은 현대인의 미의식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시조성'에 치우친 나머지 띄어쓰기조차 무시한다거나 고시조의 어법을 흉내낸 투고작이 많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조형식에 대한 이해 없이 시조를 쓴다는 것. 현대시조집을 교과서처럼 여기시길 먼저 당부드린다.
이 달의 장원은 김보영의 '스크래치'가 차지했다. 누구에게나 미술시간에 잎맥이 도드라진 낙엽 위에 색종이를 올려놓고 4B연필로 문질러 무늬를 내던 추억이 있을 게다. '쉼없이 스치다가 무뎌지는 연필 끝'으로부터 부드러운 선으로 날아오르는 새를 보여주는 김보영은 시조성과 현대성을 잘 아우르는 힘이 있다.
차상은 기교가 우세한 김기철의 '난곡, 개나리꽃 피어나다'에 돌아갔다. 달동네의 봄을 묘사한 이 시조는 평시조보다는 사설시조에 어울리는 말투다. 평시조가 전아(典雅)한 아름다움을 담는 형식이라면, 사설시조는 직설·폭로·비속함·참신함 등으로 시정의 세속적 욕망을 담아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차하는 우은진의 '별'이 차지했다. 학생들은 이 시조를 모범 삼아 습작하는 것도 좋겠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신선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심사위원 : 윤금초, 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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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백일장 6월
「장원」
집열판
뻐꾸기 울음 속으로
기어오르는 등산로
잠시 쉬어 가는 시선
초록물 덧칠하면
촘촘히 부푼 봉오리
투명한 햇살 머문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
뒤이은 황사의 낮
어쩌다 나도 모르게
불룩한 배 알이 슬어
아찔한 담금질 뒤에
새 길 하나 닦인다.
이수윤<광주광역시 북구 문흥1동 현대아파트 106동 1404호>
「차상」
붉은 풍경
판자집 늘어선 거리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양철 지붕 붉은 눈물 하얀 벽에 흘러내리고
오래 전 멈추어버린 크레인 두 대 뎅그렇다.
녹슨 철근 쌓여 있는 넓은 부지 여기저기
찌그러진 기름통 몇 개 컵라면 그릇 나뒹글고
불꺼진 하남 주유소,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린다.
김혜진<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성원아파트 117동 1804호>
「차하」
그 분
그 분은 오늘도
빨래를 하신다.
이른 새벽 얼음장 차가운 물 길어다가
고운 손 부르트도록
자꾸자꾸 헹구신다.
눈물과 좌절로
얼룩진 내 옷가지들
따뜻한 품속에 곡 안아 말리시고
구겨진 마음까지도
반듯하게 다리신다.
이수용<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275-2번지 안양빌라 가동 402호>
『심사평』
장원作 '집열판' 무리없는 전개 형식미 뛰어나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시조의 형식미를 갖추지 못한 것은 일단 논외로 할 수 밖에 없다. 이 지면은 '시조'를 위한 마당이기 때문이다.
단비 끝에 성장(盛裝)을 한 초목들이 푸른 바람에 일렁이는 6월, 시조의 가락을 잘 풀어놓은 세편의 당선작을 내게 되었다.
장원은 이수윤의 '집열판'이 차지했다. 이수윤이 열어주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뻐꾸기 울음'소리가 깊어가고, 그 깊어가는 새 소리를 따라 '촘촘히' 부푸는 '봉오리'를 만나게 된다. '봉오리'는 '집열판'인 동시에 시적 화자이다. '집열판'은 '폭풍우'와 '황사'의 시절을 건너 '알이 슬어' '불룩한 배'가 된다. 화자는 '나도 모르게'라고 시침 떼고 있지만, 그것은 '새 길'을 닦는 '담글질'의 시간 뒤에 오는 '집열판'의 소출이다.
차상은 풍경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해석을 보여준 김혜진의 '붉은 풍경'이 차지했다.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서 무분별한 개발의 이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시조에는 '불꺼진 하남 주유소'가 환경을 파괴한 인간을 그래도 '기다린다'는 긍정의 시정신이 깃들어 있다.
차하는 '빨래'를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해 낸 이수용의 '그 분'이 차지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 분'이라는 대명사를 썼지만, 이 시조에서는 감추어지지 않는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이 오롯이 드러난다.
<심사위원 : 윤금초·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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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앙시조백일장(7월)
[장원]
한 천년 눈감고 살면
- 신라 토우를 보며
귀 있어도 듣지 않아 세상물정 모름인가
벗기고 벗기어도 잘 익은 황토 속살
깨지고 상처 났어도 밝게 웃는 얼굴이다.
입 있어도 말없이 초롱 눈빛 가득해
그 먼 날 바람자락 낭랑하게 밀려오고
차림새 어설프다만 흥에 겨운 저 몸짓.
갖고도 더 가지려 배만 나온 내 오늘은
짜고 또 쥐어짜도 땟국 물만 돋아나니
한 천년 눈감고 살면 노란 흙빛 될 거나.
이승현 <부산시 해운대구 좌동 한일아파트 110동 301호>
[차상]
비
점과 선 선과 면은 서로 닿아 하나된다
낮은 곳 흘러들어 1급수를 퍼 올리고
구겨진 삶의 속내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도심의 창가에 와 새(鳥) 로 앉은 빗방울
흑백의 기억들을 한 장 한 장 클릭하면
뇌리 속 화면에 뜨는 변두리의 맑은 서정.
김진순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1동 370번지 한라 아파트 105동 108호>
[차하]
용주사
눈 부릅뜬 사천왕이 에워싸는 산문(山門) 부터
윤나는 목탁소리 불그레한 향냄새에
두 손을 맞잡아 모은 보살님의 백배천배
때때로 연등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
켜켜이 쌓아놓은 이 세상사 바람들을
지그시 눈감으시고 가부좌한 모습이여
또 하나 탑돌이를 부처님께 바치는
뻐꾹새 저 혼자서 불공을 드리우면
암자 뒤 굴참나무숲 울음우는 윤사월
김혜경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성원아파트 202-201>
[중앙 시조 백일장 7월] 심사평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소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때 시조에는 청자.백자.초가집.달밤.석탑.목련꽃.황토.고향집.호롱불.휴전선 등 회한적인 느낌을 주거나 은일낙도를 상징하는 소재들이 아니면 시조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적 감성의 대상은 될지언정 작품으로서의 감동을 가져다주기는 매우 어려운 소재들입니다
최근 들어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시조는 시조〓옛것의 등식이라는 선입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이 달의 응모작들 대부분에서 소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이 작품의 참신성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장원으로 뽑힌 이승현 씨의 '한 천년 눈감고 살면' 은 신라 토우를 소재로 시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많은 응모작들 속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시조의 형식에 어긋남이 없고 고른 감성이 작품을 무리 없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차상의 김진순 씨의 '비' 는 기존의 낡은 언어가 주는 식상함에서 떠나 참신한 언어와 섬세한 표현이 장원작과 어깨를 겨루기도 했습니다.
특히 첫수 초장과 둘째수 중장은 수일합니다.
차하를 차지한 김혜경 양은 안양예술고 2학년 학생으로, 함께 응모한 조민경(서울신림고) , 임정민(서울염광여고) 두 학생과 함께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으나 서정성과 시조의 형식을 이해하는 모습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뒤늦게 몰려오는 시장기를 재우기 위해
끓는 물에 라면 넣고 잠시 한눈 판 사이
불꽃은 보이지 않고 넘친 허기만 흥건하다
맑은 물만 끓일 때는 아무리 센 불에도
제 속으로 졸아들 뿐 뒤집는 일 없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스프, 떨어진 꽃잎 같다
그래 어느 한순간은 시원스레 내 몰라라
토해내고 싶지 않은 그런 삶 어디 있나
소나기, 붉게 넘친 8월이 서서히 식고 있다
강경화<광주광역시 남구 방림 2동 광명아파트 215호>
【차상】
바다에서
1.
파도가 밀려와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지나온 기억들 잊어달라 하듯이
철 지난 모래밭에서 나 홀로 보았다
2.
하얗게 옷을 벗고 드러누운 백사장
수많은 사람들 떠나가면 그만인데
바다만 홀로 깨어서 기다림에 울고 있다.
김승봉<서울시 은평구 증산동 179의 3>
【차하】
귀가 길
그날도 해는 떠서 어둠을 비추었다
어느새 산 넘어 구석구석 비추었다
이제 막 바둑판 펴는 동네 어귀 아저씨들
그쯤에서 어머니는 나를 늘 반기셨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날 모른다
일년 전 미소로 맞던 어머니를 보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이 깔려 있다
구석구석 비추어도 못 미치는 그 곳
까만 돌 새하얀 돌로 바둑판은 메워지는데
김소라<서울시 서초구 서초3동 1521의 6 수정빌라 303호>
【심사평】
장원작품 '라면을...' 일상적인 소재 섬세하게 형상화
형식에 사랑 없이는 좋은 시조를 쓸 수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3장과 4음보 구조(습작 때는 3434/3434/3543에 바탕한 4음보를 내면화하는 단련이 중요합니다)를 존중하며 단어 하나를 놓고 고민할 때, 형식미를 갖춘 시조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달 장원 '라면을 끓이며'는 생활 속의 섬세한 관찰과 성찰이 돋보입니다. 라면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소재의 형상화를 통해, '소나기, 붉게 넘친 8월이 식고 있다'고 삶을 돌아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른 2편도 언어의 절제만 더 따른다면 좋은 시조가 되겠습니다.
차상 '바다에서'는 시조 형식의 맛을 살린 깔끔한 작품입니다. 얼핏 평이한 듯하지만, 적절한 응축과 그 속에 '바다만 홀로 깨어서 기다림에 울고 있다'는 표현 등이 철 지난 바다와 파도의 여운을 잘 보여줍니다. 차하 '귀가 길'은 고등학생(동덕여고 1) 작품인데, 시를 건져 올리는 안목이 만만치 않습니다.귀가 길의 어둠과 바둑돌의 흑백 대비, 그 속에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겹쳐 놓으며 시상을 아우르는 게 습작을 많이 한 솜씨입니다.
응모작 중에 고등학생 작품이 상당수 있어 퍽 고무적입니다.
박종수(경복고), 양지숙(보문여고), 이용재(보성고), 정의진(상무고), 서다연(고창여고) 등 학생들의 작품을 보면서 앞으로 보다 많은 이들이 시조를 쓰고 즐기게 되기를, 그래서 시적 감수성이나 상상력이 사회 전반에 스미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강조 했듯이, 시조는 정형시입니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창작에 임해야만 형식의 맛을 우려낼 수 있습니다. 이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응모자에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독창적이고 참신한 시조를 기대합니다. <심사위원 : 유재영, 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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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앙시조백일장(9월)
[장원]
봉평비
솟는 해 바라보는 내 고향 봉평 언덕
흙은 바위를 묻고 바위는 세월을 묻어
이제야 드러나느니 다시 찾은 천년의 꿈
희미한 글자 속에 눈을 뜨는 억겁세월
그 모습 투박하나 장엄한 빛이 서려
가슴에 아리어 오는 눈물겨운 저 숨결
황량한 마을 들녘 북소리 들리는 듯
파도 되어 밀려오는 그 날의 그 함성
오늘도 하얀 달빛 속 우뚝 솟은 봉평비
*봉평비 : 경북 울진군 봉평 소재 국보 제 242호 비
신라 법흥왕 때(524년경) 세워짐. (화강석 높이 204㎝, 글자 398자)
전세중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강동소방서 지방소방경>
[차상]
풍경소리
물소리 자아올리는
쇠 물고기 몇 마리
산새 울음 물고서
깊숙이 내려간다
물 속에
한 채의 절을
짓고 있는 것이다
푸른 대숲 바람이듯
저리 맑게 울어도
온 세상을 어떻게
바꾸지는 못한다
저 물 속
한 채의 절이
산을 오를 때까지
이숙경 <경북 경산시 정평동 222번지 태왕귀빈아파트 105동 811호
[차하]
동자승
백담사 뒤쪽에는 동자승 한 분 있지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 두 손 모아
웃으며 따라주시는 까까머리 조각상
쉼 없이 바가지를 내미는 사람들과
두 무릎 꿇어앉아 공손히 약수 한 잔
햇빛이 암만 강해도 그 무릎은 안 말라
자기 몸 적셔가며 약수를 따라주는
말없는 돌동자승 웃음 속 가르침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내려앉아 싹트네
궂은 일 남 돕는 일 묵묵히 하라시던
할머니 말씀들이 저 모습 바랬을까
마를 줄 아예 모르는 두 무릎 위 기쁨들
조민경 <신림고 3, 서울시 관악구 신림 12동 594-9>
[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심사평
꾸준한 독서와 사유, 습작 없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이런 것을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지만, 좋은 책들을 옆에 두는 자세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요즘은 시조전문지와 현대시조집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좋은 작품들을 계속 찾아 읽고, 다시 그를 넘어보려는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시길 바랍니다(아직도 형식이 안 지켜지는 투고가 보입니다) .
이 달의 장원 '봉평비' 는 역사적 소재를 무리 없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 수에 고르게 앉힌 깊이와 무게가 다른 작품을 앞서는 점, 그리고 율격의 안정감이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 수 모두를 명사형으로 맺는 것은 재고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차상 '풍경소리' 는 감각적이며 이미지가 참신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어 무리 없는 시상의 전개를 보여줍니다. 시조 3장의 구조적 특성과 율격을 잘 살리지 못하는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차하 '동자승' 은 고등학생 작품으로, 시조의 가락뿐 아니라 시상을 끌고 가는 호흡도 듬직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어느 정도 시조를 숙지한 율격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호흡이 긴 시조는 조금 풀어진 경향을 보이니, 좀더 응축을 시도해보면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습니다.
이밖에 끝까지 놓기 아까웠던 작품이 여럿 있었음을 밝힙니다. 그 중 신은주.심석정.김명숙 세 분의 작품은 다음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달에도 고등학생 투고가 많아 즐거웠는데, 정한나.권진필(학성여고) .김지선(정의여고) 등의 작품에서 시조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더 많은 습작을 권합니다. <심사위원 : 유재영.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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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앙시조백일장(10월)
<장 원>
들길에서
바구니 하나 가득 옥수수 따는 들녘에
하루치 노동이 은총의 배경 되고
토담집 자지러진 능소화
지는 해보다 붉었다.
생떼같은 가시넝쿨 낫으로 쳐내며
양손에 가시가 박히는 줄 몰랐던
어머니, 풀물 든 발등 위로
여문 별빛이 내리고
열꽃처럼 개망초 피고 지는 들길에서
한지에 물 스미듯 꽃향기에 젖는 일은
내 생에 저녁이 오는 소리
빗금을 긋는 소리
손영희 <경남 진주시 하대동 105번지 진주직업전문학교 아파트 2동 205호>
<차 상>
옹기를 보며
모진 세월에도
금가지 않은 그대
디디고 섰던 비탈
그 숨결 보듬어 안고
밤이면
맑은 울음이
물소리를 내고 있다
끝내 지우지 못할
목숨의 푸른 길을
뜨거운 탯줄 잘라
저리 불 밝힌 아침
그 숱한
상흔들은 곰삭아
말갛게 뜨고 있다
윤채영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초등학교 교사>
<차 하>
유성을 보았다
밤하늘 총총 이고 있다.
깨알처럼 파묻힌 별들
시커멓고 광활한 게
가늠할 수 없는 무게
그 무게 더 보태느라
별 어깨에 짐을 얹는다
내 관절염 좀 가져가슈
빌고 비는 할머니
안을 수 없는 소원의 부피
이겨내지 못하고
멀리 쿵-, 나가 떨어지는
소리없는 나의 별
황인희<서울 강남구 개포동 173 개포고등학교 2학년>
<<심 사 평>>
장원작 '들길에서' 타인의 고통 껴안는 건강한 삶 드러나
시조의 걸음걸이에는 우주율이 살아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시조의 절묘한 묘미는 바로 이 점에 있다.
한국의 명시 반열에 누구나가 손꼽는 조지훈 선생의 '승무'의 가락이 시조인 것은 무엇을 애기해 주는가. 미당 서정주 선생의 '문둥이'도 그렇고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도 그렇다. 이 분들은 시조를 알지 못했다.
다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던 시인들었다. 만들어 놓고 보니 그것이 시조라니! 그러나 다달이 발표되는 자유시 중에 절제된 시형의 거의 모든 작품은 시조의 형식 장치와 그리 멀지 않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인들이여 시조를 모르고 어찌 자유시를 쓰려 하는가.
이제 바야흐로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손영희씨의 '들길에서'란 작품은 여백에 맑게 스미는 회색 물방울과는 같은 은은함이 있다. 어머니의 거친 발등 위에 내리는 여문 별빛을 읽어내는 삶은 그만큼의 고통을 함께 해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다.
윤채영씨의 '옹기를 보며'에도 그 아픔은 잘 형상화 돼있다. 우리의 그릇인 옹기가 갖는 상징성에 의미를 애써 부여하는 자세가 믿음직 스럽다. 두 자품 다 낡고 오래된 풍경이긴하지만 거기서 오는 아픔은 건강하게 떠받치는 진정성에 선자들은 신뢰를 얹기로 하였다.
많이 응모된 학생 작품 중에 황인희의 '유성을 보았다'를 선정한다. 각 장의 연결에 신경을 써주기 바라며 가급적 단어의 중복을 피하면서 뜻을 살려 써보기 바란다. <심사위원 : 박기섭. 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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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앙시조백일장(11월)
[장원]
봉평비
솟는 해 바라보는 내 고향 봉평 언덕
흙은 바위를 묻고 바위는 세월을 묻어
이제야 드러나느니 다시 찾은 천년의 꿈
희미한 글자 속에 눈을 뜨는 억겁세월
그 모습 투박하나 장엄한 빛이 서려
가슴에 아리어 오는 눈물겨운 저 숨결
황량한 마을 들녘 북소리 들리는 듯
파도 되어 밀려오는 그 날의 그 함성
오늘도 하얀 달빛 속 우뚝 솟은 봉평비
*봉평비 : 경북 울진군 봉평 소재 국보 제 242호 비
신라 법흥왕 때(524년경) 세워짐. (화강석 높이 204㎝, 글자 398자)
전세중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강동소방서 지방소방경>
[차상]
풍경소리
물소리 자아올리는
쇠 물고기 몇 마리
산새 울음 물고서
깊숙이 내려간다
물 속에
한 채의 절을
짓고 있는 것이다
푸른 대숲 바람이듯
저리 맑게 울어도
온 세상을 어떻게
바꾸지는 못한다
저 물 속
한 채의 절이
산을 오를 때까지
이숙경 <경북 경산시 정평동 222번지 태왕귀빈아파트 105동 811호
[차하]
동자승
백담사 뒤쪽에는 동자승 한 분 있지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 두 손 모아
웃으며 따라주시는 까까머리 조각상
쉼 없이 바가지를 내미는 사람들과
두 무릎 꿇어앉아 공손히 약수 한 잔
햇빛이 암만 강해도 그 무릎은 안 말라
자기 몸 적셔가며 약수를 따라주는
말없는 돌동자승 웃음 속 가르침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내려앉아 싹트네
궂은 일 남 돕는 일 묵묵히 하라시던
할머니 말씀들이 저 모습 바랬을까
마를 줄 아예 모르는 두 무릎 위 기쁨들
조민경 <신림고 3, 서울시 관악구 신림 12동 594-9>
[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심사평----------------------
꾸준한 독서와 사유, 습작 없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이런 것을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지만, 좋은 책들을 옆에 두는 자세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요즘은 시조전문지와 현대시조집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좋은 작품들을 계속 찾아 읽고, 다시 그를 넘어보려는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시길 바랍니다(아직도 형식이 안 지켜지는 투고가 보입니다) .
이 달의 장원 '봉평비' 는 역사적 소재를 무리 없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 수에 고르게 앉힌 깊이와 무게가 다른 작품을 앞서는 점, 그리고 율격의 안정감이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 수 모두를 명사형으로 맺는 것은 재고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차상 '풍경소리' 는 감각적이며 이미지가 참신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어 무리 없는 시상의 전개를 보여줍니다. 시조 3장의 구조적 특성과 율격을 잘 살리지 못하는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차하 '동자승' 은 고등학생 작품으로, 시조의 가락뿐 아니라 시상을 끌고 가는 호흡도 듬직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어느 정도 시조를 숙지한 율격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호흡이 긴 시조는 조금 풀어진 경향을 보이니, 좀더 응축을 시도해보면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습니다.
이밖에 끝까지 놓기 아까웠던 작품이 여럿 있었음을 밝힙니다. 그 중 신은주.심석정.김명숙 세 분의 작품은 다음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달에도 고등학생 투고가 많아 즐거웠는데, 정한나.권진필(학성여고) .김지선(정의여고) 등의 작품에서 시조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더 많은 습작을 권합니다. <심사위원 : 유재영.정수자>
첫댓글 해마다 당선작을 잡지를 통해 접했는데 몇 해 걸렀었는데 님 덕분에 또 글의 흐름을 배웁니다. 항상 고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