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했던 책인데, 너무 실망만 안겨준 책이 되어버렸다.
혹시 이 책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이 책을 감명있게 읽은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를 안읽었으면 한다.
0. 미디어의 힘
몇년전 불교 경전을 관심을 갖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에 갔을 때도 불교서적 코너에 서성인 적이 많았다.
당시 불교서적 베스트셀러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던 책이
바로 이 <영원한 대자유인>이란 책이었다.
어떤 책인가 살펴보았는데,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본문의 글자가 대문짝만했다.
왜, 글씨를 이렇게 크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묵직한 가격이었다.
잠깐 서서 읽어봤는데, 쉽지 않은 불교 용어들이 날라다녔다.
나같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을 책이려니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이 베스트셀러까지 될 수가 있지?
그것은 바로 미디어의 힘이다. 바로 텔레비젼의 힘이다.
텔레비젼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드라마에 출현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소개해준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장악하는 등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이 시대를 장악했다.
이 책이 처음 소개된 것도 당시 부처님 오신날 특집방송에서였다.
부처님 오신날 특집방송의 주요 내용은
서울대 출신들이 이 책을 접하고 출가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나는 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이라고 번뇌가 없겠는가?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겠는가?
왜 '서울대'를 앞에 내세워야했나?
이 책을 두르고 있는 책띠에도
'서울대 출신 스님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책'이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있다.
더욱 맘에 안든다.
이런 문구가 없어도, 좋은 책이면 독자가 찾게 되는데 말이다.
그런 자극적인 광고 문구에 혹하여 구입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또 책 내용에 실망하여 '낚였다'는 생각이 들면,
출판사나 지은이는 기분이 좋을까?
다음에 동일한 출판사나 지은이의 책을 구입하려고 할때 선뜻 손이 갈까?
뭐든 멀리봐야 한다.
나는 왜 이책을 집어들었나?
나는 '서울대 출신~~' 문구에 낚인 것이 아니라,
헌책방 갔다가 싼 가격에 낚였다. ^^
그리고 이제는 이 책 정도는 천천히 정독함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있었다.
역시 자만심이었다.
1. 음... 음... 음...
이 책은 제가수행자인 지은이 강정진이라는 분이
직접 수행을 하고 깨달음에 도달한 과정을 바탕으로,
깨달음의 수행방법을 적은 글이라 간략히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불교용어가 아무 설명없이 계속 열거되고 있다.
다행히 한자로 적어 놓아 한자를 유추하여 뜻을 이해해갔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내가 알고 있는 뜻이 전부인가? 하면서 말이다.
아니, 이런 전문 불교 용어를 서술하면서 주석도 안달아놨단 말인가?
주석 달린 책을 볼때는 주석보랴 이야기 흐름 쫓아가랴 힘들었는데,
아예 주석없는 전문용어 날라다니는 책을 보다보니,
이것처럼 보기 힘든 것이 없고, 고행이 따로 없었다.
휴.. 한숨을 내쉬면서 책을 넘기기를 여러차례...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채 뒷부분을 향해서 달려갈 즈음...
헉!
'용어정리'라는 챕터가 나왔다.
앞에서 책을 보면서, 답답했던 불교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내가 책의 목차를 자세히 보질 않았던 잘못은 있지만,
이렇게 용어정리가 있으면, 주석을 달아서 찾아볼 수 있게 하거나
머리말에 어려운 용어는 책 뒷편에 정리해 놓았다고 언질을 두던지 했어야 했다.
내가 왜 책목차를 유심히 보질 않았을까?
책 목차를 꼭 챙겨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아무튼, 계속 의문을 가지거나, 뜻을 유추했던 용어들이 잘 설명되어 있었다.
가나순으로 이어지던 용어설명은 다시한번 '헉!'을 내뱉게 하였다.
왜냐면?
'진아'에서 그 용어설명이 끝났기 때문이다.
분명 책은 가나다순으로 이어졌는데, 'ㅈ'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번뇌에는 세번뇌와 추번뇌가 있다고 하면서,
세번뇌는 용어설명에 있지만,
추번뇌는 'ㅊ'으로 시작하는 바람에 용어설명에 나와있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의 하나인 행주좌와일여 또한 용어설명에 없었다.
의도적인 것인지... 귀찮아서 'ㅈ'까지만 적은 건지 궁금하다.
정말 원래 '진아'가 마지막이었나?
뭐야, 책을 만들다 만거야 뭐야?
순진한 나는 책이 파본인줄 알고 앞뒤 페이지를 확인까지 해 보았다.
쩝...
가뜩이나 시작부터 마음안들었는데...
2.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법.
앞서 이야기 했듯이 깨달는 필요한 수행방법을 적은 책이다.
깨달음이란,
중생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럼, 중생과 부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중생은 무기와 번뇌라는 속성이 주체인 자성을 망각하고 어둡게 하여,
속성이 삶을 주재하는 존재를 말한다.(이 책의 설명임, 중생도 참 어렵게 설명해 놓음)
번뇌란 말은 어릴때부터 많이 들어왔는데,
무기(無記)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처음에 설명이 없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도 제대로 된 뜻을 찾기 어려웠다.
책 뒷부분에 나와 있는 것도 모르고....
무기(無記)란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때의 멍한 상태로,
무기에는 두터운 무기와 엷은 무기가 있다고 한다.
...
그리고 부처란,
중생이 수행에 의하여 무기와 번뇌를, 망각하지 않음인 불망과
어둡지 않음인 불매로 그 속성을 바꾸어, 주체인 자성이 삶을 주재하는 존재를 말한다.(이 책의 설명)
쩝..
아무튼, 중생이 부처를 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수행방법의 단계는 책 전체에 걸쳐서 몇번씩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 수행단계는 다음과 같다.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몽중일여(夢中一如) →
숙면일여(熟眠一如) → 세번뇌(細煩惱)의 평정(平定) → 돈오(頓悟)
그 용어에 대한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어묵동정일여 :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이어감이 행주좌와에 한결같음에서
더욱 나아가 말을 할 때에도, 남의 말을 들을 때와 같이 침묵할 때에도, 일을 할 때와 같이 몸을
움직일 때에도, 사고할 때와 같이 고요히 있을 때에도 수행이 한결같아지는 경지를 말한다.
숙면일여 :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시에서 어묵동정시, 몽시까지는 거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공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숙면시는 무기 관성만 미치는 영역이어서 그렇게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에는 수행자의 공부가 행부좌와일여하고 몽중일여함에 이르기까지 삼매의 힘으로
생기게 된 삼매관성을 무기관성만 미치는 영역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숙면시에도
삼매관성으로써 공부가 이어지게 하는 것을 수행의 숙면일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숙면일여는 호흡관을 터득해야함 가능해진다.
세번뇌 : 수다원과(부처님이 말씀하신 네개의 수행 단계 중 첫번째 단계)에 이른 수행자가 갑작스런
경계(갑자기 누가 뒤에서 등을 탁 친다는지 벼락이 치는 때 등)에 접하게 되면 삼매가 순간적으로
깨어져 무기에 빠진 다음에 그 경계가 번뇌로서 생주이멸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일어난 순간적인 번뇌를 말한다.
...
그런데, 수행한다는 것이 이와 같은 단계를 꼭 거쳐야 한다는 것이
마치 무슨 공식 같다는 기분이 들어 안좋았다.
지은이가 말에 따르면, 다음 단계로 바로 넘어가는 것은
한단계 한단계 거쳐야 된다고 한다.
내가 이런 수행을 직접 해보질 않아 이론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그의 의견을 비판할 수 없지만,
수행방법이 이렇게 공식화되어 있다는 것은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깨닫는 것이 운전면허 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공식화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3.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선불교의 수행방법에 있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오랫동안 이어온 논란거리였다.
고려시대 지눌 스님에 의해 정립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단박에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이야기 하고,
성철스님이 강력하게 주장한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단 한번에 불심의 이치를 알아 구극의 깨달음에 도달하여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없는 것을 뜻한다.
깨달은 후에 계속 수행하는 것을 주장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오돈수의 핵심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것이 옳은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돈오돈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돈오점수를 몇차례 비판하고 있다.
나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비판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이들도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부터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깨달음 후에도 더욱 수련해야 하는 돈오점수를 그동안 더 옳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일반생활에 적용할 경우 돈오점수가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슨 시험을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100점을 맞았다고 하자...
그럼 그걸로 끝인가?
아니다. 그 100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돈오점수의 원리 아닌가?
단지 개인적인 생각이다.
4. 그나마....
그래도 이책을 건질만한 것이 있다.
바로 책 가장 뒷쪽에 자리잡고 있는 수행 37문 37답이다.
텔레비전에서 방송하기 위해 준비한 자료들이라고 했는데,
방송 준비용인지 본문과 달리 이해가 쉬었다.
나의 기준, 나의 불교 상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었다.
5. 비판 <영원한 대자유인>
예전에 성법스님이 쓰신 <이판사판 화엄경>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을 뜻하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은 원래 불교용어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은 화엄경에 나온 말로,
이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에 대한 판단이고,
사판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에 대한 판단을 뜻한다.
아무튼 <이판사판 화엄경>이란 책에서 지은이 성법스님은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란 책을 비판하였다.
<이판사판 화엄경>을 읽을 때는 <영원한 대자유인>을 읽지 않은 때라서 그냥 넘겼는데,
다시한번 <영원한 대자유인>의 비판한 내용을 읽어봐야겠다.
그 책이 어디 있더라...
지저분한 방을 한번 뒤져봐야겠군.
책제목 : 영원한 대자유인
지은이 : 강정진
펴낸곳 : 궁리
펴낸날 : 2003년 5월
독서기간: 2007.6.14 - 200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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