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크리스마스용 영화들이 쏟아진다. 대부분 가족간의 화합을 강조하고 사랑을 절대가치로 내세우는 이런 영화들은 그러나 또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언제 개봉했는지 모를 정도로 기억 속에서 멀어져간다. 그 이유는 이런 영화들이 크리스마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거나 혹은 그동안 제작된 크리스마스용 영화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반복하고 답습하면서 상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러브 액츄얼리]는 영화 속의 크리스마스 풍경과 함께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사랑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어 우리들의 머리 속에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면 2004년의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영화가 있을까? [엘프]와 [폴라 익스프레스]는 가장 뚜렷하게 크리스마스 마케팅을 실시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우선 북극행 특급열차를 타고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 [폴라 익스프레스]는, 아카데미의 영웅 톰 행크스가 1인 5역을 맡아 목소리 출연한 애니메이션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워낙 유명한 동화책이 원작이기도 하지만, 톰 행크스의 따뜻한 이미지가 맞물리면서 개봉 전 관객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이기도 했었다.
더구나 감독은 로버트 저매키스다. 그는 톰 행크스가 아카데미상을 두 번째 받은 [포레스트 검프]를 감독했고, 톰 행크스와는 [캐스트 어웨이]를 연속적으로 찍었다. 그 이전에는 [백투더 퓨처]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 중에서 눈여겨봐야 할 영화 중의 하나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이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결합된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소년이 잠에서 깨어 산타클로스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소년 앞에 다가온 것은 북극행 특급열차. 사슴들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산타가 온 것으로 생각한 소년은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집 앞에 나갔지만, [탈거니?]라는 기차 차장의 질문에 [어디로 가는 거죠?]라고 묻고 [물론 북극으로 가는 거지]라는 대답을 들은 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기차에 동승한다.
1985년에 처음 출간된 원작 동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연결하며 아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터무니없는 비현실 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런 일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소년과 함께 북극행 특급열차에 동승하는 것이다. 소년이 타고 있는 기차는 성인으로 가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우리는 누구나 미성년의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어른이 된다. 자아에 대해 눈뜨고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하면서 상처도 받고 꿈의 소중함도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폴라 익스프레스]는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종착지인 북극에 가면 산타클로스들을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산타클로스를 직접 만나러 가는 여행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 원작이 갖고 있는 힘은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세상에 대해 눈뜨는 통과의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한 산타클로스도 북극의 마을들도 혹은 나의 꿈들도 허공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톰 행크스가 1인 5역을 연기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왜냐하면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그가 한 일은 단순히 마이크 앞에서 화면을 보고 목소리 연기만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로버트 저매키스 감독은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해서 영화를 완성했다. 종래의 애니메이션들과는 달리, 역할을 맡은 배우가 온몸에 예민한 전자감응 장치를 달고 움직이면 그 저장된 자료를 토대로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우 사실적인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법이다. 얼굴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톰 행크스는 기차의 차장과 소년, 소년의 아버지, 산타, 떠돌이까지 각각 다른 목소리와 표정 및 동작으로 1인 5역을 해야만 했다.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기차에 올라타겠다고 결심하는 거지]
새로운 모험 앞에서는 누구나 망설이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건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는 것보다 직접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열정과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의 상징이고, 크리스마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날이다. [폴라 익스프레스]가 더 큰 여운을 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주제를 자아 성찰의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북극행 특급열차를 통해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요동치는 기차 위에 올라탄 여러분들은 정말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같은 박진감과 흥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3차원으로도 만들어져 아이맥스 영화관에서도 개봉하는데, 아이맥스로 보면 기차가 북극에 도착하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장면에서는 대단한 흥분과 쾌감을 자아낼 것이다. 그러나 원작의 매력과 향기는 거대한 화면으로 옮겨지면서 많이 사라졌다.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의 단점은 우리들에게 울림 있는 환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실사 영화 존 파브로우 감독의 [엘프]는 말 그대로 요정들에 관한 영화다. 요정나라에서 성장한 엘프가 친아버지를 찾아 뉴욕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가족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상투적인 주제지만, 결말 부분에서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버디 역을 맡은 윌 패럴의 개인기가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의 양쪽에서 친아버지 역의 제임스 칸과 양아버지 역의 밥 뉴하트가 균형을 맞춰준다. 우스꽝스러운 초록색 엘프의 비현실적인 옷을 입고 가장 현실적인 공간 뉴욕에서 좌충우돌하는 그의 움직임은 삭박한 현대인의 내면과 부딪치며 고통 받는 순수의 상징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엘프]의 이야기는 지극히 상투적이다. 산타클로스가 고아원에 가서 선물을 나눠주는 사이,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가 산타클로스의 보따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북극의 엘프 마을까지 운반되어 그곳에서 성장한 뒤, 다시 친아버지를 찾아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공식처럼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 월터는 일 중독자, 그는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근무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혈육인 버디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DNA 검사까지 거치면서 결국 자신의 집에서 버디와 함께 살아간다. 월터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고 워커 홀릭에 빠진 현대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 스스로의 성공과 야망을 위해 몸을 던지는 뉴욕의 대표적인 인간형을 통해, 사랑이야말로 그리고 가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모든 이유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엘프]는 알려주려고 한다.
버디가 북극의 순수한 요정 마을을 떠나 현대사회의 비정함이 모여 있는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에 와서 부딪치는 일들은, 다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회전문에서 나갈 방법을 몰라 계속 빙빙 돌고 있거나, 지하철 계단 난간에 붙어 있는 껌들을 떼어 먹는 버디를 보고 그냥 웃을 수만은 없다.
[엘프]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우리가 너무나 낯익게 만난 이런 주제가 낯익게 펼쳐져 있지만 그 직선적인 솔직함에 의해 주제가 힘차게 표현되어 있는 라스트씬이다. 우리는 주위의 냉대 속에서도 초록색 엘프 복장을 하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고를 갖고 있는 다 큰 어른 버디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