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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훈련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 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
-51년 1월 20일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 윤근의 기자회견중에서-
1. 천인공노할 만행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정부는 11월 20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방위군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그 주요 내용은 ①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 국민 병에 편입 시킨다 ② 제 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 시킨다 ③ 육군 참모 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 방위군을 지휘 감독 한다 등이었다.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어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무려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전쟁사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기막힌 사건이 벌어진다.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도 ‘9만 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기록할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을 어떻게 후송하느냐 였다.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이 제공되기는 커녕 혹독한 추위에 몸을 가릴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2명당 한명씩 지급된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지옥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와 도망자들이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죽음의 행렬’혹은 ‘해골들의 행렬‘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죽음의 천릿길 행군 끝에 이들 거지부대(?)들은 경남북의 교육대와 제주도에 옮겨졌지만 거기에서도 제대로 수용이 되지 못했던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신세가 되어 해골의 형상을 한 채 차례로 죽어나갔다.
이의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구타였고, 심한 경우 빨갱이로 몰아 맞아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 이들의 참상을 목격했던 통역장교 시절의 리영희 교수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 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그날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국민방위군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는지 그 수는 지금 기억 못하지만 만 명은 훨씬 넘었다.
진주 시 내외의 각종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해골 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느닷없이 끌려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릿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헤어져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었다.
혹시 몇 가지 몸에 지녔던 것이 있었더라도 굶주림 때문에 감자 한 알, 무우 한 개와 바꾸어 먹은 지 오래여서 몸에 지닌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교실 안에 수용된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이 작은 틈도 없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 몸에 걸친 것 하나로 새워야 했다. 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도 씌워지지 않은 채 끌려 나갔다.
시체에 씌워줄 거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
2. 부패 무능한 권력의 추악한 진상 은폐 시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곳곳에서 참혹한 죽음의 행진을 목격한 야당의원들에 의해 국회는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러한 진상규명 움직임을 불순분자와 제5열의 책동이라며 은폐를 시도한다.
국민 방위군 참사는 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게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대한 청년단장인 김윤근은 이등병 경력조차 전무한 민간인이었음에도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등 청년단 간부들 역시 대령중령 등으로 임명되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서둘러 구성된 군사법정을 통해서 재판 개시 3일 만에 김 윤근에게는 무죄가, 윤 익헌에게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으나, 여론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그 와중에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마저 겹쳐 다급해진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와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장관 김준연을 해임하고 내각을 개편하면서 국회에서의 국민방위군사건 중간발표의 중지를 요청,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진상조사위 서 민호 의원은 발표를 강행, 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상부의 명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이 보고에 따르면 50년 12월 17일부터 51년 3월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병력을 조작하여 모두 23억5천100여만 원의 현금을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방위군 고위층이 착복한 것으로 드러난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 무려 3억 1천755만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에 관련된 정파에 1억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중간 발표결과였다.
결국 보고 5일 만인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 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된다.
’죽음의 행진‘을 시켜 놓고 이제는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군인을 징집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아래 죽음의 행진을 강요하여 무수한 사망자와 거지 떼를 양산하는 동안 정권의 핵심부는 그 예산을 빼돌려 착복하고 정치자금으로까지 유용한 이 엄청난 희대의 사건은 한국전쟁사 그 어떤 사건들보다 추악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여론에 등 떠밀려 후임국방장관 이기붕은 사건의 전면재조사를 명하고 7월 5일 속개된 군사법정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산다.
이 대목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바로 정 일권이다.
한국전쟁 초기의 대패가 부적절한 인사에 의한 인재에 가까웠지만 국민방위군 참사 역시 제대로 된 인사가 이뤄지지 않아서 생긴 사실상의 인재였다.
군사법정에 출두한 정일권 전 참모총장은 군 경력이 전무한 김윤근을 장군으로 임명한 배경에 대해서 이승만의 지시였노라고 궁색하게 변명했지만 그 역시도 국민방위군의 부실한 운영에 대해서 지휘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당시 증언을 듣고 있던 전시 특명검열관 김석원 장군은 정일권의 구차한 변명을 듣다못해 ‘이봐,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라고 일갈한다.
육군중장 정일권이 고작 준장인 김석원에게 호통을 듣고도 어쩌질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것이다.
헌병들이 김석원장군을 만류하는 동안 정 일권은 말없이 사라졌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그는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육군에서 세 번째 사성장군이 되면서 승승장구한다.
이미 군은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출신들의 세상이었고 이승만에게 맹종하는 자만이 출세할수 있었다.
이종찬, 김홍일과 같은 올곧고 능력 있지만 이승만에게 아부할줄 몰랐던 군인들은 전시에도 찬밥대우를 면할 수 없었던 군대가 51년 대한민국 군대였다.
51년, 전선이 너무도 급박하여 미군마저 짐 쌀 궁리를 하는 와중에서 이승만 정권은 독립군 출신이자 시흥지구 전투의 영웅 김 홍일 중장이나 김 석원 장군을 한직으로 내돌리면서도 군경험이 전무한 김 윤근 따위에게 별을 달아주며 국민방위군을 모집하여 국민의 혈세를 착복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고 다치게 했다.
도대체 사람이 없어서 김 윤근 같은 자에게 별을 달아줬다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자 이승만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7월 19일 정일권이 미국으로 가던 날,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 윤근과 그 휘하 참모 4인이 서둘러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이 것 역시 공병감 최 창식 대령의 총살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이승만의 술책이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이들이 착복한 막대한 자금이 정치권 특히 이승만지지 세력에 흘러들어간 정황증거를 포착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너무 일찍 처형되는 바람에 결국 숱한 의문을 남긴 채 사건은 종결된다.
국민 방위군 사건 역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대형 인재참사였다.
당시 방위군에 징집되어서도 약간의 뇌물을 바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죽음의 행렬에서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돈 없고 빽 없는 힘없는 백성들만이 또다시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3. 사실상의 민간인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 방위군 참사는 세계 전쟁사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매우 희귀하면서도 비참의 극을 치달았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세계 전쟁사 곳곳에서 적의 포로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후방으로 후송 하면서 온갖 비참하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태평양 전쟁 중 필리핀에서 벌어진 죽음의 행진과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지만, 전황이 위급한 상황에서 후방예비군을 양성한다는 구실아래 이토록 처참한 대우와 부실한 관리로 자국의 소중한 예비 병력들을 말살한 경우는 사실상 국민방위군 사건이 유일하다.
이 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초기 서울 시민을 기만하고 한강철교를 폭파하면서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친 후 다시 돌아와서는 과오를 사죄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기는커녕 빨갱이 사냥을 명분으로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잔혹하게 보복학살 하는 만행을 자행한 것도 부족했는지 또다시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이용당할 소지가 있는 청장년층을 사전에 먼저 징집하여 오직 남으로만 끌고 오려고 국민방위군을 조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리나 실질적인 훈련이 전무한 상태로 방치했던 것은 아닐까?
국민방위군 징집자들이 국가권력에 의해서 직접적인 학살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리의 실태를 보면 사실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 다른 형태의 민간인 학살이라고 해도 될 만큼 국민방위군 참사는 그 규모가 크고 끔찍했다.
단 한달여의 행군 끝에 9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아무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던 희대의 사건 국민 방위군 참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김윤근을 포함한 5명의 고급장교들은 이사건에 연루되어 총살당하는걸로 이사건의 진상이 덮어지게된다.
실제로는 고급장교들사이에서 부패한장교들은 그 처형된 5명보다도 훨씬더 많이 연루되었을거라는건 당연히 추측할수있을것이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사건 사령관 김윤근은 본래 씨름꾼 출신이며 군관련과는 상당히 무지했다. 단지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위라는 이유로 국민방위군 사령관직책을 맡게된것인거다.
이런 부패한 자유당 정부가 1960년 4.19혁명으로 무너질때까지 자기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온갖 많은 비리와 부패등 버텨왔다는사실 얼마나 비열하고 썩어빠졌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첫댓글 아아 구국의 영웅 이승만은 그래서 오늘도 조중동의 찬양을 받으며 뉴라이트가 국부(?)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많은 분들이 이러한 사건들의 진실을 배우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하면서 대한민국은 오늘도 이렇게 유지되는 군요 -ㅅ-
이승만은 군대를 단지 권력을 지키기위한 수단으로 만주, 일본, 중국출신의 장성들 대신에 북한공산주의에 반감가지고있는 북한지주출신의 장성들을 임용했는데 결론적으로 정일권과 백선엽의 관동파 관서파였나? 이렇게 경쟁하다가 정일권이 김창룡 암살사건에 개입되가지고 축출된걸로 기억..
국민방위군사건 + 거창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 대통령재임가능 투표 부결 -> 서민호총격사건 발생 -> 야당의원 때려잡음 -> 자유당창설 -> 대통령재임가능 투표 가결 -> 독재체재 -> 개놈.
6.25때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미군은 한때 대한민국을 장제스의 타이완처럼 제주도로 옮길생각도 했었다는
호이로 치면 10개 사단을 이벤트로 해체(물론 인력 못돌려받음)하는 꼴이군요. 이뭐 인간막장 -_-;;;;;;
한가지 사족. 국민방위군 예산편성 때 동계피복비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현금을 동원해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따위 편성해서 무엇하냐" 입니다. 참 멋진 이유죠. 또하나, 국민방위군 부사령관이던 윤익헌은 받은 예산을 가지고 자기 집에서 펑펑 써댔는데, 그를 조사하던 조사관이 윤익헌이 돈쓴 꼬라지를 보고는 이런 말을 했더랍니다. "난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쓰듯 해봤으면 좋겠네"
신동엽시인의 전기를 읽다가 알게 되었습니다...아주 초기 군대의 부패 크리로 불치병에 걸려 돌아가셔서....아시나요?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대표작이랍니다...
저때부터 나라가 막장의 조짐이 보였던 게죠..
그리고 지금은 제2의 이승만이 등장할 조짐이 보이죠.
김두한씨가 그거 맡을번햇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