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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뱀에 물린 사람들 (21: 4-9)
I. 불평은 난치병
부부 참새가 전기 줄에 앉았습니다. 부부 새는 "네가 앞에 앉아라. 네가 앞에 앉아라" 싸우다 아내 참새가 앞에 앉았습니다. 포수가 쏘는 총에 맞은 아내 참새가 죽어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자리에 꼭 나를 앉히더니 기어이 이렇게 나를 죽게 만드누만, 그럴판이면 마지막 아침 설겆이나 좀 도우시지. 벌레도 못 물어 오는게 애들이나 잘 키울지 모르겠네. 바보 같은게 새 장가 든다고 옆집이나 기웃거리지 않을지 모르겠네..." 계속 재잘대며 끝까지 불평, 원망을 늘어 놓았습니다. 남편 참새가 포수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총알 한방 남았나요?" "왜?" "남았으면 저 주둥아리에 한방만 더 쏴 주세요."
불평, 원망병은 죽을 때까지 잘 고쳐지지 않는 난치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평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불평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평에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나를 바꾸고 감사하며 사는 길, 감사를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II. 본문 : 광야길은 인생길
오늘 본문 민수기는 광야 여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죽음의 땅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러므로 민수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에나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길은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얼룩져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을 불러내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반석을 쳐 생수가 흘러나게 했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쯤되면 매일같이 눈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 것 같은데 저들은 눈만 뜨면 원망이요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참으로 그 은혜가 놀랍습니까?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십니까? 찬송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근심하고 염려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민수기를 공부해 가다보면 10장이후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 불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11장 -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 불이 떨어지는 사건입니다.
12장 -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나병환자가 되는 얘기입니다.
13장 14장 - 열 정탐꾼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 -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몰사합니다.
20장 - 마실 물이 모자란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21장 다시 불평, 원망하다가 불뱀떼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에 이르렀을 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을 돌아 홍해 쪽으로 가다가 그만 심신이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 내 광야에서 죽게하느냐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마실물도 모자란다고. 매일같이 먹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음식엔 넌더리가 난다고 불평했습니다.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떼를 보내 백성들을 모조리 물어 죽게 했습니다. 당황한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이대로 죽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시고 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종아 장대 높은 곳에 불뱀 모양의 놋뱀을 만들어 달아라. 누구든지 쳐다보면 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종함으로 놋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나았다하는 간단한 사건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III. 불뱀에 물린 사람① : 마음 상하여 치유받지 못한 사람
여기 불뱀떼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설교제목인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본문 4절 말씀에 보면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마음 상했으나 치유받지 못한 사람, 속이 상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나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이 불뱀에 물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속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부간에 살아가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있지요. 아이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 때문에 직장생활 때문에 이 세상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심지어는 신앙생활하는 교우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마음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치유되지 않은채 불평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나쁜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마음 상한 작은 상처 하나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예배도 무너지고 행복도 무너지고, 사역도 무너지고 좋은 관계도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상하여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고침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치료하는 광선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치료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깊어지고 커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청사진 - 우리 인생길을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거지요. 너무 멀다고 불평했습니다. 너무 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길을 설계하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만 가도록 내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저들과 동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종인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저들을 양떼처럼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향한 거룩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나는 페이브먼트를 자동차 타고 달려가고 싶은데 날 보고 걸어오라고 합니다. 나는 넓은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달려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이 못내 못마땅하다는 거지요.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불평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십니까? 당신의 인생길이 찬양의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불뱀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까?
4절 말씀처럼 당신의 인생길이 지름길이 아니라 "우회하는" 길처럼 보여 못마땅하십니까? 그래서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다면 당신 곁에 불뱀은 이미 가까워 있습니다.
IV. 불뱀에 물린 사람② : 원망하는 사람
두 번째, 원망하는 사람은 불뱀에 물립니다. 계속되는 5절 말씀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했습니까? 특별히 여기서는 본문 그대로 "애굽에서 인도해 낸" 사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백성들을 끄집어내 가나안으로 가게 해 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에서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생들을 끄집어 내 천국백성 삼아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백성들을 하늘 백성 삼아 주신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에 대한 짜증과 원망입니다.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신앙생활에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자칫 원망하게 되고 원망하면 불뱀에 물려 죽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불평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더란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원망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만 되겠습니까? 불평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초등학교 일학년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언제 엄마가 가장 고맙게 느껴지는지를 글로 적어 오도록 했습니다. 땡칠이는 숙제장에 이렇게 적어 왔습니다. 「그저께」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서 불평원망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을 예정해 놓았다가도 거두어 가십니다. 원망은 성경에 보면 전염성이 또 대단히 강합니다.
어떤이가 두마리 앵무새를 각각 다른 새장에 길렀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찬송을 배우고 한 마리는 욕을 배웠습니다. 주인은 두 마리 앵무새를 함께 두면 노래를 배우리라 생각하고 함께 새장에 두었지요. 얼마후 주인이 문열고 들어갔더니 두 마리가 똑같이 "주인 새끼 온다" 그러더랍니다. 욕을 배우고 말았던 게지요.
불평과 원망은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는 못된 성질이 있습니다.
V. 불뱀에 물린 사람③ : 신앙 권태기
세 번째, 불뱀에 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5절 후반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의 음식에 대한 권태가 온 것입니다. 만나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타날 수 없는 신비한 음식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먹고 살아가는 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서도 그것을 하찮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불만이 11장에 나오지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기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먹었던 생선과 수박과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난다. 이것들을 못먹으니 정력이 쇠하여 졌도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애굽의 과일,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신나던 것들이 아직도 맛있게 느껴지십니까? 세상에서 좋아하던 그 일들을 아직도 좋아하며 살아가십니까? 그리고 교회에 오면 설교 말씀이 맨날 듣던 하찮은 양식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불평합니다. 당신은 이미 불뱀에 물려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입맛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여겨지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신나야 합니다. 찬양하는 시간이 영광스럽게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행복해 져야 합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교회 생활이, 인생살이가 재미 없는게 저주더란 말입니다.
보십시요. 속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였으나 위로받지 못하고 치유받지 못하면 불뱀에 물립니다. 한없는 은혜를 받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 불뱀에 물립니다. 신앙생활에 권태가 찾아온 것 거기서 빨리 벗어나지 아니하면 불뱀에 물립니다.
얼마전에 미국의 한 연구소가 연구한 보고서를 보니까 "절망감에 빠진 사람, 권태기가 오래 계속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보다도 고혈압, 당뇨등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세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빨리죽고 싶은 사람만 불평하며 살라는 겁니다.
VI. 그러나 구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광야 여정을 살펴보면, 한 두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실패를 하면서도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평을 하면서도 천성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한번 하나님의 자녀삼으시고 천국백성 삼겠다 말씀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옥은 가고 싶어도 이제 못 갑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불안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냐? 하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 밖에 안되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온 것 아니었습니까? 나는 실패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오늘도 엎드려 기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구원시켜 놓았더니 감사대신 불평입니다. 바로의 손에서 건져놓았더니 찬양대신 원망입니다. 한심한 존재들이지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반역이나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행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분명히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구원의 행진을 계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승리의 행진을 계속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불평 꾸러기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치유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죽음의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불평꾼들은 감사꾼으로 바뀌어 집니다. 원망꾼들은 찬양꾼들로 바뀌어 집니다.
VII. 그 치유의 길 - 놋뱀
오래전 얘기입니다. 지리산 뱀사골에서 뱀을 잡아다 팔던 한 청년이 동물원 뱀 사육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취직 턱을 내느라 술에 만취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술에 취한 체로 동물원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산 코브라가 있는 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코브라 한 마리를 붙들고 목에 감아보기도 하고 품속에 넣어 보기도 하고 만용을 부리고 있습니다. 순찰을 돌던 사육사가 "코브라다! 위험하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러나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꼿꼿이 일어선 코브라 코에다가 입김을 쐬는 사이에 그만 코브라가 그 사람의 코를 꽉 물고 말았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긴급 구조반이 도착했을 때 이미 청년의 혀와 시력과 청각이 마비되었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의 몸에 독이 퍼져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뱀이 우굴거리는 불평의 인생터에서 불뱀과 더불어 놀지 말라는 말이지요. 불뱀 골짜기에서 뱀과 더불어 놀다가 독뱀에게 물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란 말입니다. 지금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이 청년에게 싸늘하게 식어져 가는 이 청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소식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놋뱀 =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무서운 뱀에게 물린 사람, 사탄의 독소에 온 피가 멍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어졌습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장대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될 죽음의 자리에 주님이 피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바라보고 앙망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두 살더라" 믿습니까?
<불뱀·사막>
광야의 뱀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독뱀이라고 할지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면 독이 빠지는데 여기는 광야요 사막입니다. 계속적으로 햇빛을 받은 뱀이라 아주 독이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뱀에 물리기만 하면 즉사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뱀에게 물려 신음하는 사람이 옆에 쓰러져 누워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이미 장례를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무서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얘기였습니까? 우리는 죄의 결과를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탄의 올무에 걸려든 사람, 이 불뱀에 물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세상에 어떤 길도 없습니다. 지식도 선행도 철학도 도덕도 저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원망의 광야"에서 불뱀으로부터 상처받은 심령들을 향한 구원의 소식이 있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여러분 이 확실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보는 것이 무슨 치유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독뱀에 물려서 고통과 비명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을 향하여 장대 끝을 쳐다 보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놋뱀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쳐다보면 살리라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 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대에 달린 놋뱀이 그 자체에 독소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불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으리라.
다음은, 성경을 잘 보면 백성을 상하게 만든 뱀은 "불뱀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6절 "불뱀들" 7절 "뱀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을 구원하는 놋뱀 불뱀은 단수로 되었습니다. 8절 "불뱀" 9절 "놋뱀" 단수입니다. 죄는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하나 놋뱀이지 여럿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장대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유사한 뱀을 만들어 곳곳에 세워두었다 해도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약을 발라도 소용없습니다. 살을 도려내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믿으면 살겠네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달려와서 그 뱀을 쳐다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려올 수도 걸어올 수도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등에 업혀서 왔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놈아 저거 안보면 죽는데~ 어머니 손에 질질끌려서 찾아왔습니다. 누구나 어떤 모습으로 왔든 장대 높이 매달린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가운데는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기 찾아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울며울며 달려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저들을 소중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지요.
그러지 못하고 억지로 찾아나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여기 끌려나오신 분이 계실 줄로 압니다. 무언지 알지 못하지만 가족의 손에 이끌려 여기 앉아 계신 분도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만 하면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이 시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가까이에서 그 놋뱀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까마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놋뱀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좋아서 뚜렷하게 놋뱀의 꼬리 눈망울까지 쳐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나빠서 희미하게 그냥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분명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구원의 풍성한 진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신비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때로 희미하게 여겨집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재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갈등하고 번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찾아나오시고 주님을 바라보고 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 순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만이 나를 영접해 주실 분임을 믿습니다. 내 마음에 중심의 문을 엽니다. 이제 찾아 오셔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이 시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믿습니까?
VIII. 고침받은 자에게 사명이 있다
이제 고침받고 구원받은 자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장대 높이 매달아라. 장대 높이 매달아라. 저 먼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도록 매달아라.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사람 보이도록 매달아라. 높이 높이 매달아라. 먼저 구원받은 자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교회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사명은 이 세상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교회에 와 본적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도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저들도 예수 만나 구원얻을 수 있도록 십자가를 높이 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십자가를 매달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셀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이 가정은 예수 믿는 행복한 가정이구나. 여러분의 가정에 셀에 십자가를 매달아 예수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과 사업을 통하여 십자가를 높이 매달므로 말미암아 세상 만방에 모든 열방들이 십자가 예수를 만나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우리주변에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 진정한 교회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 구원얻기를 원하는 사람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 여기 한소망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이땅에 찾아오실 때에 모두 들림받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죄의 불뱀에 물려 죽는 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십자가 놋뱀 앞으로 인도하십시다. 알파코스로 인도하십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9절) 할렐루야!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
뱀에게 물린 자들 (민 21:4-9)
고난이 축복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김홍신의 [인생사용 설명서]에 나오는 유명한 동화작가 안데르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동화작가입니다. [인어공주], [미운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등 유명한 작품을 남긴 분입니다. 그는 구두수선공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집은 너무나 가난했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매일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을 학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난 안데르센이 어떻게 좋은 동화를 쓸 수 있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안데르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오리새끼]를 쓸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모든 사람이 안데르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횡단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길을 따라 애돔 땅을 우회하여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만 열거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찮게 취급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니 백성 중에서 죽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게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바라보니 다 살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불뱀은 사단, 마귀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단, 마귀와 마귀의 종이 된 타락한 천사인 귀신들을 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창 3:15; 눅 10:19; 계 12:9; 계 29:2).
사랑하는 여러분은 뱀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본문에 불뱀이 독을 품고 있어서 뱀에게 물린 자들이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갔던 것처럼 마귀에게 물린 자들은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해독하지 못하면 망하게 됩니다. 해독하지 못하면 결국은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다가 죄를 범하고 그 결과 뱀에게 물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지만 뱀에게 물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도 뱀에게 물려 영적으로 죽게 되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나오지만 이미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퍼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 뱀인 마귀의 독 때문에 어떤 사람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영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관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이 병들어 고통 중에 있습니다. 뱀에게 물려서 그런 것입니다.
행 7:8에 보면 악한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붙어서 중풍 등 다양한 병들을 일으킵니다. 삼상 16:14에 보면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만들어 정신병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눅 13:11에 보면 18년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 여자의 고통은 영적인 뱀에게 물려서 그런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악한 영이 역사하니 물질의 문제, 가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까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뱀에게 물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뱀의 독을 해독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뱀에게 물린 이유
본문에 보면 뱀에게 물린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성경 성경은 마귀에게 당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엡 4:27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연탄가스가 틈만 있으면 들어가듯이 마귀는 틈만 있으면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독을 뿌리려고 합니다. 전 10:8에 보면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고 말씀합니다. 담을 헐었기 때문에 뱀에게 물리는 것입니다.
그럼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귀에게 어떤 틈을 주었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담을 헐었을까요?
1)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4절)
4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상했을 때는 입을 열며 독이 나가고 죄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때는 입을 열면 안 됩니다. 혹 입을 연다 할지라도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입을 열어 죄악을 쏟아내 버렸던 것입니다.
잠 25:28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벽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적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영적인 마귀의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상하는 일을 많이 당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역사합니다. 마음이 상할 때는 입을 다무십시오. 입을 열어야 한다면 마음을 제어하시고 감정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뱀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2) 하나님과 주의 종을 원망해서(5절)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뱀에게 물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원망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믿는 우리는 가정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가정천국이 되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교회 천국이 되게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직장을 다스리시면 직장이 하나님의 나라 즉 현세 천국이 됩니다. 그런데 서로를 향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는 순간부터 천국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마귀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 결과 불뱀에게 물리게 되고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원망과 불평입니다. 고전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몇 가지 죄악을 지적하면서 고전 10:9,10절에서는 본문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우리는 그 구절에서 원망과 관련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원망하는 것은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것 때문에 뱀에게 물렸습니다. 원망 때문에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당한 것입니다.
고전 10:10下과 11절은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기록한 목적을 말해줍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3)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심해서(5절)
5절에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시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을 뭘로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이러니 그들이 영적인 뱀에게 물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 귀신이 그들을 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시 117:2에 보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십니다. 약 1:17을 보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선물,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가 좋으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뱀에게 물리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타국에 다녀온 주인과 결산을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구두쇠로 알았습니다.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거두는 심보 고약한 양반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의 이런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는 일하지 않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불행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변함이 없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험한 길을 만난 것처럼 험한 세월을 보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어려움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4) 없는 것에만 집중해서(5절)
5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부정적인 눈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의 도우심은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부정적인 눈을 가졌습니다. 민 20:5에도 므리바에서 물을 구할 수 없게 되니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그렇게 없는 것만 열거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마귀가 좋아하는 말만 하니 마귀가 붙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뱀에게 물린 이유는 분명한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까? 늘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의 공급자가 되시는데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답답합니다.
한 달간 외국을 여행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침낭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도 돈이 있으면 아무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잠은 호텔에서 자면 되고, 물은 사서마시면 되고, 식사도 식당에 가서 하면 되는데 보따리 보따리 짐을 싸지 않았다고 문제 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이 없고 양식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마실 물이 없으니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고, 먹을 양식이 없으니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해주시고, 고기를 먹고 싶어 하니 바람이 불어서 메추라기가 날아오게 하셨습니다. 뭐가 부족해서 없는 것에 집중하고 “없고, 없고, 없도다”라고 말합니까?
여러분 시각을 바꿔야 행복해집니다.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배우자를 봐도 부족한 것만 보이면 그 집에는 가정천국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뱀이 부부 사이에 독을 뿌리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볼 때, 자녀가 부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서로 없는 것만 보고 부족한 것만 보면 그 때 뱀이 부모 자식 관계에 독을 뿌리는 것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부정적인 눈이 되면 안 됩니다. 사장님은 직원들을 직원들은 사장님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거기에 벌써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동료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도 똑 같습니다. 목사가 성도를 보는 시각, 성도가 목사를 보는 시각 그리고 성도가 성도를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 되고 서로에게 부족한 것만 보이면 교회천국은 없습니다.
없는 것만 보이고, 부족한 것만 보이고, 잘못한 것만 보이는 이 부정적인 시각이 고쳐지지 않으면 가정천국, 직장천국, 교회천국은 없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은 이미 뱀에게 물린 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립입니다. 중립에 있던 자동차의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갑니다. 후진에 놓으면 뒤로 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중립입니다. 마음을 긍정적인 곳에 놓으면 인생은 앞으로 갑니다. 마음을 부정적인 곳에 놓으면 인생은 뒤로 후퇴합니다. 없는 것만 보지 말고 있는 것 보고 주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공급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목사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5)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찮게 취급해서(5절)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들이 말한 하찮은 음식이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새벽이슬처럼 내려주셔서 40년을 먹게 한 만나가 하찮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만나가 정말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귀한 이유를 몇 가지 말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하늘 문을 열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귀한 것이죠. 또 만나에는 온갖 영양소가 다 들어있어서 광야 40년 동안 그것만 먹어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약하거나 병든 자가 없었습니다. 시 105:3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말하면서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비틀거리는 자는 개역성경에서 ‘약한 자’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만나만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병든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몇 백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 중에 병든 자가 하나도 없었다니 기적입니다. 또 만나가 귀한 것은 그것의 맛입니다. 출 16:31에 보면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맛있는 것이 많아서 꿀 섞은 과자가 대단한 맛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에는 먹거리가 별로 없던 시대인데 만나가 꿀 섞은 과자 맛이 났으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또 만나가 귀한 이유가 있습니다. 출 16:18에 보면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 습?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멜로 되어보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만나가 귀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출 16장에 보면 모세가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다음 날 먹을 것 때문에 불안해서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고나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무리가 아침에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둔 후에 햇빛이 비추이면 만나가 스러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안식일 전에는 이틀분의 분량을 거두어드렸지만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정말 귀하고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귀하고 신기한 것을 하찮은 음식이라고 했으니 마귀가 좋아하고 그들에게 달려드는 것, 즉 영적인 뱀이 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감사해야 합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니다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그 은혜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동행하게 하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시고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가장 완벽하게 준비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우리는 절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뱀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2. 뱀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
우리는 믿음 생활을 잘해서 영적인 뱀에게 물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미 뱀에게 물렸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회개하라(7절)
7절에 보니 뱀의 독으로 고통당하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그들은 모세를 찾아와서 회개했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죄로 인하여 뱀에게 물렸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해독 되게 됩니다.
쉽게 설명 드리면 만성 수은중독에 걸린 사람은 수은중독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증상이 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몸에서 수은을 완전히 제거해내면 수은중독으로 인하여 나타났던 증상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하여 뱀에게 물리게 되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악한 영의 역사 즉 뱀의 독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시며 회개한 자가 천국을 누림을 말씀하셨지만 요즘 한국교회는 회개가 사라졌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성도들이 싫어하니 목회자가 강단에서 회개하라고 외치질 않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죄악 가운데 빠져 살고 뱀에게 물리는 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기는 하는데 입술로만 회개할 뿐 진정한 마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요식행위로 회개할 뿐 진정한 회개가 부족합니다. 가슴을 찢는, 마음을 찢는 회개가 없기 때문에 눈물도 없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한 후에는 다시 회개했던 옛 생활을 계속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미줄은 치웠는데 거미를 잡지 않으면 다시 거미줄이 생기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회복되어야 할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2) 기도하라(7절)
뱀의 독으로부터 해독되는 2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7절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해독의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백성들이 그대로 하니 해독이 되어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대리자를 세워주셨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면 응답 받습니다.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길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막 9장에 보면 귀신들려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이가 나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주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그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논쟁이 아니라 기도였습니다.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논쟁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논쟁은 서로에게 상처만 줄뿐입니다. 제자들이 논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역사 하는 악한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일 후에 제자들이 조용한 시간에 주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가 승리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악한 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기도가 영적인 뱀의 독을 해독시키는 비결입니다.
기도하십시오. 특히 새벽에 기도하십시오. 새벽기도는 믿는 자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응답하십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마 6:33에서 약속하신 이모든 것을 더하시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새벽에 어려우면 다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로 영적인 뱀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를 바라보라(8,9절)
8,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고 장대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니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장대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놋은 심판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귀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그가 무기로 잡고 있던 죄의 무기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를 무력화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마귀를 심판한 장소인 것입니다.
요 3장에 보면 이 놋뱀 사건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 놋뱀 사건과 자신이 짊어지실 십자가를 연결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여러분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영적인 뱀의 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왜요? 사랑하시니까.
떠돌이 유목민을 베드인이라고 합니다. 요즘 이집트 베드인들은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정착을 하여 살기 시작했답니다. 예전에 베드인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베드인과 관련된 글을 읽다가 기가 막힌 내용을 봤습니다. 여러분! 낙타 1마리는 무엇과 바꿨을 것 같습니까? 사막에서 낙타는 꼭 필요한 동물이잖아요. 놀랍게도 젊고 건강한 여자 2명과 바꿨다고 합니다. 젊고 건강한 한 명의 여자는 낙타 반 마리 값에 해당되었으니 나이든 여자는 낙타 다리 한쪽 값쯤 했을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대에 이삭은 리브가를 얻기 위하여 낙타 열 마리를 보냈으니 리브가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나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셨으니 내가 얼마나 귀하고 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고난을 나를 대신한 고난으로 믿으십시오. 우리가 그 믿음으로 마귀를 바라보면 마귀에 대해서 승리할 것이고, 그 믿음으로 질병을 바라보면 질병에 대해서 승리할 것이고, 우리가 그 믿음으로 가난을 바라보면 가난에 대해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마귀에게는 심판이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갈 3:13,14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불신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고난 중에 주님을 찾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백성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뱀에게 물려서 고통 당하다가 회개하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회복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뱀에게 물렸습니까? 고통 중에 있습니까? 철저히 회개합시다. 그리고 기도생활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마귀의 역사, 영적인 뱀의 독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노경모 목사 / 순종과 회복의 상관계수 (민 21: 4-9)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상관이 있나를 살펴보고 그것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을 상관계수라고 합니다. 상관계수가 +1 이라고 하면 그것은 100%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수치가 -1이면 그것은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이고 수치가 0이면 그것은 서로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과 소비의 상관계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만일 1이 나왔다면 그것은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많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1이 나왔다면 반대로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100%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만일 0이 나왔다면 소득과 소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종과 회복, 또는 순종과 치유의 상관계수를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회복과 치유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회복과 치유에 관한 상관계수가 높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것에 매어달려야 합니다. 올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나라의 분야별 최고의 의사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명단 중에 반가운 이름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의 동생입니다. 종합병원 유방외과의 의사인데, 요즈음 유방암 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수술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올인합니다. 한번 진료를 받으려면 몇 개월을 기다립니다.
왜 이렇게 유방암 환자들이 이 의사한테 올인합니까? 이 의사와 성공적인 유방암 수술과의 상관계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사에 비해서 조금 높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높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올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재쳐 놓고 그것에 올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폐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루고 폐암을 치료받기 위해서 올인을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애굽 땅을 나온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들어섭니다. 38년 동안 광야길을 가다가 호르산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이 호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름길로 올라가지 않게 하시고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하게 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렇게 돌아가게 하신 것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조금만 참고 인내하고 순종했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한결같이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처받는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모세도 그 누구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왕 바로를 꺾어시고 바로의 손에서 꺼집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시고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불기둥으로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까지 받아오고 누려왔습니다.
이제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이 아닌 에돔땅을 우회하는 길로 이끄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을 것이야 라고 믿고 감사하면서 따라가야 하는데 그들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마음이 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모세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여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독사이지요. 이 불뱀들이 백성들을 물었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중보기도해서 우리를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이때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어시고 해결책을 주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린 자들은 누구든지 장대위에 만들어 매단 놋뱀을 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위에 달려 있는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보라고 하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 보지 않은 자는 다 죽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회복과 치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나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간절한 권유로 마지못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하여튼 순종했더니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모두다 회복되고 치유되기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면 됩니다.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할찌라도 순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순종에 대해서는 의지가 없다면 치유와 회복은 희망사항으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처방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대로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폐암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의사는 이렇게 주의사항을 줍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둘째, 술 담배를 하시 마십시오. 셋째, 적절한 운동을 하십시오. 넷째, 심호흡을 하십시오.
이렇게 의사가 주의사항을 주면 수술을 받은 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수술 받은 환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놋뱀은 놋으로 만든 뱀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고통스러운데, 내가 지금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놋뱀을 바라본다고 살 수 있나? 라고 귀찮게 생각하거나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계속 버틴 자들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바로 놋뱀에 물린 자들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회복될 수가 있고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각종 각생이 병든 자와 약한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연약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인 모든 약함과 상처와 고통과 병을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 앞에 이렇게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간절히 치유와 회복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으로 미리 다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대로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려 오신 진정한 의사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치유가 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시는 의사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거나 기웃거림으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더 확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행동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상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드러난다는 것은 치유와 회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치유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올인해야 할 것이입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 중환자가 의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듯이 말입니다. 순종할때만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순종함으로 진정한 회복괴 치유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