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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수 없는 대륙[大陸의]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
일월[日月]의 양기[兩氣]가 천지[天地]의 조화[造化에 감응[感應]하여, 하늘과 땅의 무궁[無窮]한 변화[變化]를 일으키며,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절[四季節]이 시작되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설날을 맞이하는 오늘의 이 시간 위에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가슴에 깊이 담고, 지나온 역사[歷史]를 더듬어 되돌아보며, 작금에 일어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개탄[慨歎]을 금할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世上]에 태어나 오늘의 이 시대[時代]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각자 저마다의 아름다운 삶을 영위[營爲]하고 행복[幸福]을 추구하며, 한 국가[國家]의 구성원으로서 수행[遂行]해야 할 사명[使命]이 저마다 있는 것이니, 국민[國民]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행복[幸福]하면, 나라가 행복[幸福]해지는 것이요. 국민[國民]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충실[忠實]하고, 정도[正道]를 지켜 나간다면, 그 나라는 저절로 충실[忠實]하고 정도[正道]가 행해지는 나라가 이룩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충실[忠實]하지 못하고, 정도[正道]를 헌 신짝 버리듯이 버리며, 간사[奸邪]하고 사이비[似而非]한 자들이 활개를 치면, 그러한 자들이 많은 나라는, 난세[亂世]가 될 수밖에 없으니, 옛 성현[聖賢]들과 제왕[帝王]들이 천하[天下]를 다스리고 후학[後學]을 지도하고 가르치며 깊이 경계[警戒]했던 바가 바로 이러한데 있었던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사람이 예[禮]를 잃으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라고, 하였고, 공자[孔子]는 가로되, 명성[名聲]이 세상[世上]에 자자하고, 존귀[尊貴]한 신분에 있는 사람이라도, 예[禮]를 잃으면, 그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역사[歷史]라는 것은 인간[人間]의 삶 그 자체[自體]이며, 만고[萬古]의 스승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미래[未來]의 일을 세우는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배우고 익히는 바가 모두 역사[歷史]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역사[歷史]를 가지고 부끄러운 짓을 하는 자들은 깊이 반성[反省]하고 각성[覺性]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신라[新羅]가 일어난 영남[嶺南] 지역[地域]은, 조선사[朝鮮史]의 동남[東南] 지역[地域]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최[最] 동남방[東南方]의 신라[新羅]가 일어난 지역[地域]인 영남[嶺南] 지역[地域]은, 남주[南州]와 남국[南l國]으도 불리웠으며, 조선[朝鮮]의 서북[西北] 변경[邊境] 지역[地域]과, 그 거리의 상거가 일만리[一萬里]에 이르렀다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었을까 ? 분명[分明]한 답은, 명확[明確]한 사실[史實]이라는 것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세뇌[洗腦]되어 있으며, 이를 추종하는 자들은, 우리의 역사[歷史]가 대륙[大陸]이라는 말만 나와도, 경끼[驚氣]를 일으킨다. 심지어 험한 말과 정신병자[精神病者]들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자들도 널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가, 일만리[一萬里] 대륙[大陸]의 역사[歷史]라는 것이 사실[史實]이라고 한다면, 그 자들 스스로 정신[精神]을 못 차리는 정신병자[精神病者]가 되는 것이다. 조상[祖上]들이 남겨 놓은 수 많은 역사서[歷史書]가 엄연히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속에는 당시[當時]의 생생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수 없이 실재 하고 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주장하는 자들은, 역사서[歷史書]의 그 진위[眞僞]를 구별[區別]하여 밝히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영달[榮達]만을 추구하며,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작태[作態]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社會]에서, 국가[國家]의 정도[正道]가 무너지고, 인간[人間]의 정도[正道]와 인간성[人間性]이 상실[喪失]되고 무너져가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現實]과, 무관[無關]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인 대륙사[大陸史]의 분명[分明]한 진실[眞實] 한 가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우선 이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을 소개[紹介]하기에 앞서서, 이 소중[所重]한 역사[歷史]의 자료[資料]를 소개[紹介]하고 보내주신 현지[現地]의 제현[諸賢]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한국[韓國]에서는, 신라[新羅]의 선덕여왕[善德女王]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설명[說明]은 생략[省略] 하기로 한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신라[新羅]의 27[二十七] 대[代] 왕[王]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세상[世上]을 떠나기에 앞서서, 신하[臣下]들에게 유언[遺言]을 남기는데, 유언[遺言]에 이르기를, 내가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날짜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묻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신하[臣下]들은, 도리천[忉利天]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 장소[場所]를 물으니, 낭산[狼山]의 남[南]쪽이라고 하였다. 신하[臣下]들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遺言]대로 이곳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을 모셨다. 후[後]에 신라[新羅]의 문무왕[文武王]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왕릉[王陵]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그로부터 수 백년의 세월이 흘러 이 지역[地域]은, 조선[朝鮮]의 경상도[慶尙道] 지역[地域]이 되었으며, 영남[嶺南]의 지역[地域]으로 불리워 왔다.
이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왕릉[王陵]과 비석[碑石]이 서 있는 지역[地域]은, 장강[長江]의 남[南]쪽, 지금 중국[中國]의 구화산[九華山]이 있는 남[南]쪽 지역[地域]이며, 황산[黃山]의 서[西]쪽 지역이다. 이 곳의 산세[山勢]는 신묘[神妙]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곳에서 물줄기를 따라 서[西]쪽으로 내려가면, 대륙의 내해[內海]라고 불리우는 파양호[鄱阳湖]와 만나게 된다.
신라[新羅]의 사천왕사[四天王寺]에는 두 개의 탑[塔]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릉[陵]이 있는 이 산[山]에서 서[西]쪽으로 내리뻗은 골짜기를 따라 20리 정도를 내려오면, 두 개의 고탑[古塔]이 높이 서 있다. 이곳이 바로 신라[新羅]의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비록 사찰은 없으나 두개의 탑[塔]만이 우뚝 솟아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당시[當時]를 회상[回想]하게 한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릉[陵]은, 석축[石築]으로 둘러져 있으며, 봉분[封墳]위에는, 무심[無心]한 나무만이 울창하게 자라 멀리서 바라보면 산[山]으로 보이고 릉[陵]을 구별 할 수가 없다. 이 지역[地域]에는,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내려온 종가[宗家]들이 즐비하며, 먼 선조[先祖]들의 전통[傳統]을 잃지 않고 있다.
릉[陵]앞의 비석[碑石]은, 2001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으며, 절령 공로 공정 지휘부[浙岭 公路 工程 指揮部], 방립[放立] 이라고, 이 비석[碑石]을 세운 주체[主體]를 명기 하고 있다. 비석[碑石]의 사면[四面]은, 한국[韓國] 고유의 전통[傳統] 문양[紋樣]으로 그리고, 중앙[中央]에는 선덕유방[善德流芳], 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지혜[智慧]로운 명성[名聲]과 꽃다운 정기[精氣]가 후세[後世]에 영원[永遠] 흐르리라는 뜻이리라.
허나 크게 한가지 애석[哀惜]한 것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을 그저 하나의 제후[諸侯]정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은 천하[天下]의 역사[歷史]가 흐려지고 거짓과 위선[僞善]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있는 세태[世態]이니, 이를 탓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우리 역사[歷史]의 본 모습인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에 한 발, 한발 다가가면서 느끼는 소회[所懷]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사서[史書]들과 문집[文集]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조[變造]되고 왜곡[歪曲]되어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또한, 이러한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국사[國史]라고 배운 알량한 거짓과 위선[僞善]의 역사[歷史] 지식[知識]에, 국민[國民]들의 눈과 귀가 가려져 있으니, 그 폐해[弊害]는 국민[國民]들과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歷史]는, 하나의 진실[眞實]을 찾기 위해서도, 수 많은 어려움이 수반[隨伴]되고 있다. 하나의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고, 본 모습을 보는데 있어서, 일년, 십년, 아니면 영원[永遠]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 분명[分明]하게 들어나기 시작하면, 봇물이 터지 듯, 그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우리 역사[歷史]의 어둠을, 천하[天下]의 물이 천지[天地]를 휩쓸고 가듯이 깨끗이 거두어 내게 될 것이다.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가면, 신라[新羅] 제왕[帝王]들의 왕릉[王陵]들이 여기 저기에 있는데, 언제까지 국민[國民]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비웃음거리로 만들 것인가 ? 그리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것을 교묘[巧妙]히 방해[妨害]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자들은, 이미 때가 늦었음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대륙[大陸]의 현지[現地]에서는, 우리의 역사[歷史]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이 있으며, 선대[先代]들의 전통[傳統]을 잊지 않고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의 기록[記錄]에 나오는 여근곡 [女根谷]에 대해서도 그 기록[記錄]은 사실[史實]이었으며, 그 곳은 천하[天下] 절경[絶景]의 산수[山水]를 지니고 있는 지역[地域] 이었다. 문경[聞慶] 새재로 유명한 조령[鳥嶺]과 그리고 죽령[竹嶺], 신라[新羅]의 중원경[中原京], 고구려[高句麗]의 국원성[國原城)]인 충주[忠州]가 어찌 반도[半島]에 있었으랴.
조선[朝鮮]의 충주목[忠州牧] 한 곳에서 다스렸던 지역[地域]의 넓이가, 지금의 한국[韓國]과 비슷한 크기였다. 죽령[竹嶺]이라는 이름을 상고[相考]해 보라. 지금도 죽령[竹嶺]의 지역에는 대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들어서서 현지[現地]에서는 이 고개를 가리켜, 죽림고도[竹林古道]라고 부르고 있다. 현지[現地]에서는 이 죽림고도[竹林古道]의 동[東]쪽을 신라[新羅]라고 부르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에 함몰[陷沒]되어 혼[魂]과 자아[自我]의 정신[精神]을 잃어버린 한국[韓國]의 실상[實相]을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이 어찌 천하[天下]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에, 조선[朝鮮]의 충주목[忠州牧] 서[西]쪽에는 해[海]인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산천[山川]의 형세[形勢]와 특이한 건축물[建築物]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라도[全羅道]의 호남[湖南]에는 귤[橘]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광주[光州]에는, 앵무[鸚鵡]인 앵무새가 서식[棲息]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이에 대한 지역[地域]들을 현지[現地]의 모습과 더불어 상세[詳細]하게 소개[紹介]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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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많이 기대합니다
즐거운 명절에.......크게 기대되는 조선사의 진실 이야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조선인의 후예라고 하면서도, 역대의 정권들은 친일사학과 야합하여, 친일사학을 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범정부적인 친일사학의 전파는 친일사학과 연계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사는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을 위한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사의 진실 이야기가 너무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설을 맞아 즐거운 휴일을 보내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감사드립니다.
역사의 진실을 반석위에 올려 무릇 범생들의 귀감이 되느리라 생각합니다.
반석은 반질반질(磐質磐質)한가 봅니다....한족이라 생각하는 조씨 여성이
우리와 같은 반질반질이란 언어를 구사하기에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