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한 번 몰두하면 어지간해선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나의 장점 중 장점이며 또 결정적 단점 가운데 하나다. 축구에 심취한 끝에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것 같은 게 장점에 해당한다면, 요사이 채팅에 빠져 가끔씩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게 바로 단점에 해당하겠지. 내가 요즘 빠져있는 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체조다. 알고 보면 다 승일 폐하와 폐하의 카페 (① 덕 ② 탓)이다. 우선은 폐하의 놀라운 실력과 아시안게임에서의 뛰어난 성적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만, 채팅으로 기나긴 방송 대기 시간을 즐겁게 채워 주는 폐하 카페 식구들 덕택에 요즘 나는 무척 행복하며 훌륭한 체조 팬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오! 체조!'
그러나 나는 체조 팬이기 이전에 축구 캐스터. 저녁 7시 40분경 방송을 마친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구덕운동장을 향했다. 우리나라와 이란의 남자 축구 준결승전. 오랜만에 찾은 고향 같은 축구장. 전반전 경기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몇몇 협회와 프로구단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고 FIFA 에이전트 홍이삭 씨를 만나 본부석 위쪽 중계석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내 주위에서는 일본 팀 비디오 분석관인 것 같은 사람들이 비디오 카메라 두 대를 돌리고 있었고 그 바로 뒤에서 중국 중앙방송국(CCTV) 기자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시끄럽게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 중국 x들은 한국이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는 이상한 x들이었다. 한국에 비교적 유리한 판정이 나오면 다른 사람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유독 이 x들만 법석을 떨고 난리를 쳤다. 홍이삭 씨 얘기가 월드컵 기간 내내 한국에 대한 중국 기자들의 태도가 거의 항상 이랬다나? 내가 중국에 들락거린 일이 이제 제법 오래 된 탓인지 중국어 욕을 죄다 잊어버려서 욕을 못해 준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런데 욕이든 뭐든 원래 아는 게 좀 있기는 한가?)
그러나 저러나 지독히도 점수가 나지 않는 경기. 경기 주도권만 놓고 체조식으로 채점을 한다면 우리 선수들이 아마도 9.5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주도권과 상관없이 골로써 승부를 내는 경기. 8점대 초반의 골결정력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답답한 플레이로 우리 선수들은 좀처럼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안타까운 시간이 하염없이 흐른 끝에 결국 축구장 징크스의 고전 '골대를 맞추면 진다'는 속설은 이 날도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김두현, 이동국 등이 숱하게 골대만 맞추고 골을 넣지 못한 끝에 우리나라는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분패하고 만 것. '세상에! 월드컵 4강에 오른 유일한 아시아 팀이 불과 몇 달만에 벌어진 아시안 게임 준결승전에서 패하다니…….'
체력이 소진된 일부 선수를 서둘러 바꿔 주지 않고 선수 교체를 지독히 아꼈던 까닭은 무얼까? 월드컵 때 뛰었던 선수들 상당수를 주축으로 해서 팀을 구성했는데 조직력은 왜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결정력 뛰어난 공격수와 든든한 수비진은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동국은 언제 군대에 가나? 한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은 이제 20년에 한 번이 돼야 하는 건가?
폐하처럼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거는 천수의 모습을 그토록 기대해 보았건만 경기를 마치고 고개를 숙인 채 무서운 표정으로 버스를 향하는 천수는 나의 애타는 격려에도 불구,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유로 2000 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한 방을 썼던 박항서 감독님의 표정이 상기돼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사를 드렸지만 뭘 어떻게 할 줄을 모르신다.
경기장 밖으로 나와 늦은 밤 콩나물 국밥집에 앉았다. 서기철 선배, 이용수 해설위원. 98년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때 태국한테 이상하게 지던 날 술 마시고 뻗었던 멤버들이다. '괜히 제가 와서 그런가 봐요'라며 얘기를 꺼냈더니 이 교수께서 쓸데없는 징크스 만들지 말라며 핀잔 겸 격려를 해 주신다. 방콕에서는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원래 정해진 숙소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소주를 조금만 마시고 택시를 잡아탔다. 숙소를 향하는 택시 안에서 좋은 소식을 하나 듣기도 했다. 이강석 해설위원의 신천중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 이강석 해설위원의 지극히 절친한 친구 이용수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이구! 신천중학교는 우승을 하고 국가대표는 지고……."
축구장에 가지 말걸 그랬다. 체조 팬으로서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던가!
"폐하! 축구는 싫어하시나요?"
폐하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오늘 아침 폐하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출입증을 깜빡 잊고 나온 탓에 하마터면 방송 펑크를 낼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