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창조로서의 회심/ 제임스 뷰캐넌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아래 두 성경 구절을 대조함으로써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6:15)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1의 ’새로 지으심‘이란 단어가 2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란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인의 영혼에 조성된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결과는 성경에서 중생의 전 사역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요3:3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이 믿음은 복음이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역동적인 믿음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즉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게 만드는 살아 있고 활동적인 믿음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며, 모든 받으실만한 순종의 원천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도 바울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롬13:10). 사랑은 믿음에 의해 움직이며, 육체와 영혼의 모든 기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드는 원천과 같은 것이다. 우리 가슴에 각성된 사랑의 반응이 생기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복음을 결코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반드시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 강력한 원리를 시행하기에 충분한 메시지이다.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마다 복음의 완성, 온 율법의 완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완전함의 보증인 사랑을 산출하는 믿음을 볼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모든 의의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죄인의 인격은 완전하고 철저히 변회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주 강한 어조로 죄인의 철저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새 창조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복음을 듣는 청중들이 저지르기 쉬운 두 가지 오류
1 복음의 메시지를 읽고 외면적인 개선과 개혁의 삶을 살기도 한다. 과거의 더러운 습관들을 끊고 술집 출입을 금하고 방탕한 삶을 정리하며 경솔하고 불경건한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기도 한다. 교회에 다시 출석하며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신앙적인 삶의 모든 외적인 규칙들을 지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개선의 노력조차도 함정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는 그것으로부터 도덕적 개선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도덕적 삶의 참회의 개선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새 창조는 지성과 마음의 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오직 참된 의의 열매들이 계속해서 자라갈 수 있는 뿌리가 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의 덕은 오직 믿음의 열매이자 결과이다. 열매의 본질은 그 나무의 본질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먼저 좋은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삶이 개혁될 것이다. 당신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채, 단지 외적인 개선과 개혁에 머물러 있다면, 당신은 ‘컵과 접시의 바깥쪽만 깨끗하게 씻는 사람’이 될 뿐이다. 결국 당신은 겉만 번드르르하게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면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속으로는 악취만 가득 풍기는 부패와 타락으로 가득 찬 사람인 것이다.
당신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도 역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른 나무에서 자라는 그 어떠한 표면적인 개혁과 개선이 성화와 유사한 모습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 본질은 허무한 것이며, 현재의 안전과 장래의 구원과 복지도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이다.
2 여기 또 다른 중대한 오류가 있다. 첫 번째 오류와는 정반대의 오류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위험하고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믿음에 관계된 특권들과 약속들에 대해 읽을 때,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는 말씀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떠한 이들은 즉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을 건전하게 고백하는 부류에 포함시킨다(요3:16). 왜냐하면 자신들은 복음의 진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며, 복음에 대한 사변적인 충분한 지식도 소유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은 건전하며 자신들의 정통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에 전혀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은 안전하다고 스스로 아첨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건전한 교리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과 함께하는 것이며, 정통적 신앙고백은 결코 거룩하고도 영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우리 자신들의 경험은 이와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원리를 강조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사변적인 지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왜냐하면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전 인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3:9,10)가 되는 것이다.
- 제임스 뷰캐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PP 218-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