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충선(金忠善, 1571년~1642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歸化)한 일본의 장수로, 귀화한 후에는 자를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으로 지었다. 일본식 성은 사(沙),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이 사야가가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국 측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그에 대해 그나마 언급된 것은 그 자신이 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다[1]
//
[편집] 김충선 (사야가)의 실체
김충선은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철포대"(일본에서 조총부대를 일컫던 이름)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잇다. 이 점을 근거로 일본 측 사야가 연구가들은 일본 센고쿠 시대때 와카야마 현의 "사이카"라 불린 철포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가 사야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와카야마 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 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일본 소설가 고사카 지로도 그런 사람들의 한 명이다[2].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조선으로 출정했고, 출정 후 즉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나고야 성(현 사가 현 가라쓰 시)까지 100명을 이끌고 갔는데, 스즈키 혼자만 사라진 것이다.
이에 대해 사이난가쿠인 대학의 마루야마 교수는 사야가가 스즈키 마고이치가 아니라 하라다 노부타네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마고이치는 반히데요시 세력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가토의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토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및 장수 명단에 사야가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는 있으며, 하라다 역시 출병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면서 그가 사야가라고 주장한다. 전사했는데 확인이 안되었거나 투항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
[편집] 임진왜란과 항왜 김충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조선의 수준 높은 문물을 보고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이때 사야가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4]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1597년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울산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무관 정3품인 가선대부를 하사받기도 했다.[5]
조선은 왜란 중에 조총을 자체 개발하여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보급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 조총을 개발한 사람은 본래 일본에서도 철포대라 하여 조총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김충선(사야가)으로 보고 있다. 실제 김충선이 귀화한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6]
[편집] 임진왜란 이후 행적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과 1636년(인조 4년)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워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이후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괄의 난 때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병자호란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편집] 후손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사성 김씨는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편집]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