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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趙素昻(1887 ~ 1958)】 "삼균주의를 정립한 독립운동가"
1 개요
조소앙(趙素昻)은 일제 식민지시기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이념으로서 삼균주의를 정립한 독립운동가였으며, 8․15해방 후에도 임시정부법통론에 의거해 건국운동을 주도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한 이후 독립운동의 이론가로 등장하여,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초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건국 방략으로 1941년 11월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였고, 8․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을 작성하여 건국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정치노선을 전환하여 한국독립당에서 이탈하였다. 이해 12월 사회당을 창당한 뒤, 1950년 5․30총선거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하였으나, 6․25전쟁 기간 중 납북되었다.
2 민족운동가로서 성장 과정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시)에서 출생하였고, 6세 되는 무렵(1892년) 일가가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2년 성균관 경학과(經學科)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익혔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황무지 개간권 등을 요구하자, 조소앙은 신채호 등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장문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대한제국정부에 항의하였다. 이해 10월에는 황실특파유학생에 응시·선발되어 11월 도쿄 부립(府立) 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제일중학교 교장이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비하하자, 조소앙은 최린 등과 동맹휴교를 결의하고 기숙사를 퇴거하였다가 1906년 4월 복교하였다. 1907년 3월 제일중학교를 졸업한 뒤, 1908년 3월 메이지(明治)대학 예과 1학기 과정에 입학하였고, 1909년 9월 법학부 본과로 진급하여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때 쌓은 법률 지식은 뒷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를 구축하는 자산이 되었다. 조소앙은 1912년 6월 졸업시험에만 응시한 채, 중국 망명을 계획하고 7월 초 곧바로 귀국하였다. 그는 1905년 12월 대한유학생구락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한 이래, 대한유학생회·대한공수(共修)회·대한흥학회·재동경조선인유학생친목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가로서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3 독립운동 이념의 기틀을 세우다
조소앙은 귀국한 이후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원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13년 8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여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 활동하였고, 중국인과 연합한 비밀결사 신아(新亞)동제사에도 가입하여 직업혁명가로 본격 투신하였다. 한편 1914년 1월 구국종교로서 일신교〔一神敎 : 단군·예수·부처 등 6성자(聖子)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실천〕를 창도하였다. 조소앙은 1915년 국내로 잠입하여 ‘한살림’을 주장하는 비밀결사 무명단(無名團)을 조직하였고, 1916년 봄 황줴(黃覺)·안재홍과 함께 신아동맹당 조선지부를 조직한 뒤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7년 7월에는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여 신규식 등 14인의 공동 명의로 해내외에 발표하였다. 1919년 2월 지린성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령(副領)으로 선임되었고, 〈대한독립선언서〉 를 기초·인쇄하여 국내외에 발송하였다. 조소앙은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헌장」 ·「임시의정원법」도 기초하였다. 이해 6월 임시정부 산하 파리한국대표부에 합류한 이후, 2년 동안 유럽에서 외교 활동에 온힘을 쏟았다. 8월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36개국이 참가하여 개최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서 「한국민족독립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케 한 쾌거는 가장 큰 성과였다. 조소앙은 1921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 1922년 6월 임시의정원의 경기도 신도(新到)의원으로 복귀하였고, 8월에는 임시정부 3기 내각의 외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이에 대항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였으며, 1924년 1월에는 이승만의 통신원이 되었다. 이해 12월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조소앙은 5년여 동안 임시정부에서 이탈하여 이승만 중심의 임시정부 체제를 복원하는 운동을 펼쳤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하자, 그는 1930년 1월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상해)한국독립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여, 당의·당강·당책 등을 기초함으로써 삼균주의를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명문화하였다. 이해 6월 임시정부의 외무장으로 보선되어 임시정부로도 복귀하였다. 193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일명 〈대외선언〉) 을 작성하여,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취지·목표를 중국 국민당 정부에 알림으로써 삼균주의를 나라밖에 천명하였다. 조소앙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립하는 데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9월 탈당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년 6월 제출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사직안이 10월 임시의정원에서 수리되었다. 1937년 8월 (재건)한국독립당이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 등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자, 조소앙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을 작성하면서 3당 통합에 앞장섰다.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회의에서 외무장으로 선임된 뒤 8․15해방 때까지 줄곧 외무(부)장직을 수행하였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합당하여 (통합)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3당의 해체 선언과 동당의 창립 선언문 등을 집필하였다. 조소앙은 1941년 11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결의로 통과시킨 「대한민국건국강령」 을 기초하여 임시정부의 건국 방략을 확립하였고,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 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조소앙은 1943년 5월 김구와 경선하여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동년 7월 김구와 함께 중국 국민정부 최고지도자 장제스를 만나, 11월에 개최될 카이로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 및 임시정부 승인 등을 결의해 달라고 요청하여, 〈카이로선언〉 에서 한국독립을 명시케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8·15해방 후의 건국운동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8․15해방을 맞았고, 요인들의 일부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현 임시정부의 개조와 요인의 총사직을 주장하였다. 조소앙은 이에 맞서며 임시정부가 조속히 환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한민국건국강령」에 근거하여 현 단계의 성격을 규정하고 당면한 정책을 제시한 14개 항의 「임시정부 당면정책」을 기초하였고, 이는 1945년 9월 3일 주석 김구의 명의로 공표되었다. 12월 1일 조소앙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을 자임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2월 말 공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 를 부정하였고, 임시정부가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도 거부하였다. 1946년 2월 임시정부가 「임시정부 당면정책」 에 따라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비상국민회의로 확대하자, 외교위원장 및 28인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조짐을 보일 무렵, 조소앙은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곧바로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한 뒤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8년 2월 UN소총회가 ‘가능 지역 총선거’를 결정하자, 남북협상을 추진할 의도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하여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지도자연석회의(이른바 남북협상)에 참석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그의 정치노선은 크게 전환하였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이의 정당성을 인정하였고, 김구와도 정치노선을 달리 하였다. 그는 1948년 10월 신당 결성과 한국독립당 탈당 의사를 밝혔고,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된 뒤 동년 12월 사회당을 창당하여 위원장(당수)로 추대되었다. 1950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5․30총선거)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남조선과도정부의 경무부장으로서 권력의 실세였던 조병옥을 압도하고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조소앙은 9월 26일 안재홍·김용무 등과 함께 북한군에게 연금되었다가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평양으로 납북되었고, 1958년 9월 평양 남산 중앙병원에서 영면하였다. 1989년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국통일상을 추서(追敍)하였다.
5 삼균주의
삼균주의는 일제 침략의 실상을 폭로·규탄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는 방략·방법 및 광복 후의 국가건설론,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룩하려는 조소앙의 민족운동론의 총체이다. 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혁명 수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침탈세력(군벌·재벌)을 박멸하고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한 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전민균등(全民均等)의 신(新)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민족국가 건설론이었다.
‘삼균’에서 ‘3’은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인간 삶의 세 가지 영역을 가리킨다. 삼균주의는 국가·민족 사회 안의 모든 구성원 사이에 정치균등 즉 균권(均權), 경제균등 즉 균부(均富), 교육균등 즉 균지(均智)·균학(均學)을 함께 실현하려고 하였다. 균권은 민주공화제를 확립하여 실현하는데, 보통선거제를 실시하여 모든 인민〔全民〕이 정권에 고르게 참여하도록 하고, 인민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보장함을 뜻한다. 조소앙은 경제균등이 없는 정치균등은 ‘가평등’(假平等)이라 비판하면서, 균부를 위한 방안으로 토지국유화와 대(大)생산기관의 국영화를 제시하였다. 삼균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경제면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정책을 수용하였다. 또 국비로 부담하는 의무교육제를 확립하고 교육기관의 수를 늘려 교육기회를 고르게 제공함으로써 균지·균학을 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삼균주의는 이렇게 나라 안에서 인민 각 개인의 균등생활을 확보한 뒤,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실현함으로써 궁극에서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을 이루려 하였다. 조소앙은 영미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을 중심으로 자본가 계급이 전권(專權)하는 폐단과, 독일·이탈리아의 파쇼 독재의 침략성을 비판하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자·농민의 연합독재도 계급독재로 규정하여 배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