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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高句麗와 新羅의 建國年代에 대하여)
1926. 5. 신채호
1. 1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21년 후에 건국하였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이래 일반 사가(史家)들이 동일하게 기술하여 온 바이나 그러나 당인(唐人) 가충언(賈忠言)이 당 고종(唐高宗)에게 고하여 가로되, “高麗秘記曰[고려비기왈] 不及九百年[부급구백년] 當有十大將[당유십대장] 滅之高麗[멸지고려] 自漢有國[자한유국] 今九百年矣[금구백년의]”라 한바, 대개 810여 년 이상은 되어야 9백 년이라 칭할 것이요, 고구려 말일(寶藏王[보장왕] 27년 ─ 原註[원주])부터 810여 년을 소상하면 혁거세의 신라 건국 이전 100년이나 될 것이니, 이에 의하여 고구려 건국이 신라 건국의 100년 이전이라 하노라.
『삼국사기』가 비록 소략하나 삼국 왕조의 연대는 오히려 소상(昭詳)히 기재되었거늘, 이제 과객의 풍설(風說) 같은 당인 가충언의 일구화(一句話)를 빌려 사가(史家)의 일반 신인하는 연대를 경개(輕改)하려 함이 어찌 허망한 일이 아니냐?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傳至[전지] 十七世孫[십칠세손] 廣開土境好太王[광개토경호태왕]”이라 한바, 『삼국사기』의 세대로 따지면 광개토왕이 시조 주몽의 13세손밖에 안 되며, 나의 「부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의 논문 가운데 기술한 바와 같이 차대왕을 태조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광개토왕이 시조(始祖)의 14세손밖에 안 되니, 광개토왕의 비는 그 자손 제왕의 설립에 계(係)하여 조계(祖系)를 착오할 리가 만무한즉, 『삼국사기』에 광개토왕 이전 3세를 탈루(脫漏)함이 명백하며 3세지간에 꼭 부자가 상속하기 어려운 일이요, 혹 형제의 전수도 있었기 쉬운 일이니, 여하간 고구려 초엽의 사(史)에 대수로 3세 이상, 연조로 100년 이상을 탈루(脫漏)하였음이 무의(無疑)하다.
그런즉 가충언은 비록 당시 적국의 정탐이며,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후세 본국의 사가(史家)이나 사실의 진실을 찾기 위하여 불가불 본국 사가의 붓을 버리고 적국 정탐의 말을 믿을밖에 없다.
차부라. 본국 사가의 기록한 연대가 적국 정탐의 보고만도 못하니 얼마나 본국의 사가를 위하여 통곡할 일이냐.
2. 2
고대의 역사는 가장 제왕의 연대를 중시하거늘, 어떤 까닭으로 『삼국사기』에 제왕의 연대를 이다지 탈루하였느냐?
이 탈루는 김씨의 소홀한 허물도 없지 않으나 기실 신라사가의 삭감(削減)한 죄가 더 많으니 어찌 김씨만 책하랴. 신라사가를 주(誅)함이 가하니라. 신라사가가 어떤 까닭으로 고구려의 연대를 삭감하였느냐?
『이상국집』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주에 인용한 『고기(古記)』에 의거하면 고주몽이 송양왕(松讓王)과 입국(立國)의 선후로써 주속(主屬)의 관계를 쟁하여 후목(朽木)으로 신궁(新宮)의 기둥을 세웠으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가 나라의 대소와 사람의 장유를 비교하여 유리왕(琉璃王)에게 조공의 예를 책하였으니, 개인이나 국가가 다 연장자를 숭배함은 조선의 고풍이니, 이런 고풍으로 인하여 신라가 매양 고구려나 백제보다 건국이 뒤짐을 부끄러워하다가 및 양국을 멸하매 드디어 양국의 연대를 삭감한 것이다.
이제 논술의 편의를 위하여 백제는 차치하거니와 신라사가의 협루(狹陋)한 필법이 본국의 강역을 할기(割棄)할 뿐 아니라, 연대까지 문란하여 역사를 무독(誣瀆)함이 또한 심하였다.
그러하면 그 삭감한 연대가 고구려의 초엽이냐? 중엽이냐? 또는 말엽이냐? 과연 어느 시대이냐?
『위서(魏書)』(拓跋代[척발대] 魏氏[위씨]의 史[사] ─ 原註[원주])에 가로되 “朱蒙在夫餘時[주몽재부여시] 妻懷孕朱蒙[처회잉주몽] 逃後生一子[도후생일자] 子始閭諧及長[자시여해급장] 知朱蒙爲國主[지주몽위국주] 卽與母亡而[즉여모망이] 歸之名之曰[귀지명지왈] 閭達委之國事[여달위지국사] 朱蒙死閭達代立[주몽사여달대립] 閭達死子如栗立[여달사자여율립] 如栗死子莫來代立[여율사자막래대립] 乃征夫餘[내정부여] 夫餘大敗遂統屬焉[부여대패수통속언] 莫來子孫相傳[막래자손상전] 至裔孫宮[지예손궁]”이라 한바, 주몽(朱蒙)은 곧 시조 주몽이요, 여달(閭達)은 곧 유리왕(琉璃王)이요, 여율(如栗)은 곧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無恤)이요, 막래(莫來)는 모본(慕本)의 오자니, 곧 모본왕(慕本王)이요, 궁(宮)은 곧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니, 『삼국사기』에는 모본왕이 피시(被弑)하고, 태자는 피출(被黜)하여 유리왕 아들, 재사(再思)의 아들(太祖[태조]─原註[원주])이 그 위를 이었다 하나, 위에 기술한 ‘慕本子孫[모본자손] 至裔孫宮[지예손궁]’의 말로 보면 태조가 곧 모본의 자손이요, 모본 이후 태조 이전에 약간의 세대가 있음이니, 이 약간의 세대를 본국에서는 신라사가(新羅史家)가 삭감하고 『위서(魏書)』에도 왕호와 연대를 기록치 않아 지금에 발견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碑文)과 당 가충언(賈忠言)의 보고를 합하여 대개 대수로 3대 이상, 연조로 100년 이상이 삭감되었음은 명백하니라.
3. 3
『위서』에
(1) 무슨 까닭으로 유리(琉璃)·무휼(無恤)을 여달(閭達)·여율(如栗)이라 하여 본국사와 달리하냐? 삼국시대에 본국 제왕의 명휘(名諱)를 존중시하여 인국과 교제할 때에 왕왕 능호(陵號)나 시호(諡號)나 명휘(名諱)중의 끝 한자나 혹 음사(音似)한 자를 전하고 본명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나니, 주몽도 그 본명은 광개토왕비문으로 보면 그 본명이 추모(鄒牟)요, 주몽(朱蒙)은 곧 음사한 자로 외국에 전한 것이며, 신라도 태종(太宗)이 비사후폐(卑辭厚幣)로 당과 교제하기 전에는 제왕의 본명을 외국에 전한 일이 없었나니, 여달과 여율도 이와 같이 음사한 자로 외인 교제에 쓴 것이니라.
(2) 무슨 까닭으로 모본왕(慕本王)이 부여(夫餘)를 정벌하였다 하여, 본국사에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하였다 함과 호이(互異)하냐? 대무신왕이 비록 부여를 정벌하여 그 왕 대소(帶素)를 참하였으나 병은 패환(敗還)하였으니, 『위서』에 기술한 것은 곧 모본왕이 부여를 통속(統屬)한 실적이니 이로써 본사(本史)의 빠짐을 보충함이 옳으니라.
(3) 무슨 까닭으로 본국사에는 대무신왕의 뒤와 모본왕의 앞에 민중왕(閔中王) 1대가 있거늘 『위서』에는 민중왕이 없느냐?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우로서 태자 모본이 연유(年幼)하므로 5년간 섭정왕이 되었다가 모본이 장성하매 위를 돌려주었으니, 이는 가왕(假王)이요, 계대(繼代)의 왕이 아닌고로 기록치 않음이니라.
『북사(北史)』에는 모본왕 이후에 한 무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그 땅으로 군현(郡縣)을 삼았다가 태조 왕궁(王宮)이 중흥하여 다시 고구려가 된 줄로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주몽에서 모본왕까지 85년은 한 무제 4군(四郡) 설시(設始)의 이전에 속한 연대니, 이것이 『위서』보다 더 명백하지 않으냐?
무릇 중국 24사의 소위 사예전(四裔傳)이 신기입(新記入)한 사실이 없는 자는 거의 전대 사가의 전문(傳文)을 초록한 것이니, 이제 『북사』의 고려전(高麗傳)을 상열(詳閱)한즉 거의 『위서』의 본문이요, 오직 “모본(慕本)의 뒤에 한 무제가 고구려를 쳐서 현을 만들다”한 것이 다르다. 그러나 ‘고려현(高麗縣)’이 『한서(漢書)』에 이기(已記)하였은즉, 『북사』 저자 이연수(李延壽)가 다만 양서를 합초(合抄)하여 자의로 분배한 것이요, 당시의 신라인이나 혹 발해인을 만나 조선의 전고(典故)를 방문하여 쓴 것이 아니니 신거(信據)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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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69년(481)에 위(魏)가 제국의 사저(使邸)를 설치할새, 제(齊:當時[당시] 支那[지나]는 北魏[북위]와 南齊[남제]의 兩國[양국]이 分立[분립] ─ 原註[원주])가 제일이요 고구려가 그 다음이었으며, 77년에는 고구려가 제일이요 제가 그 다음이었나니, 이때에 고구려가 제일등국의 국사(國使)로 위에 임함으로 위인(魏人)이 그 국계(國系)를 물어 사(史)에 기록하여, 『후한서』『삼국지』 이래 지나 사가들이 기재치 않은 주몽 이하 5세가 『위서』에 보임이나, 다만 그 연조를 기록치 않았으며, 모본왕에서 태조까지를 ‘상전(相傳)’ 2자로 생략하여 충분히 아사(我史)의 참고 재료되지 못함이 가석하다.
그러나 신라인의 삭감한 연대를 약 120년으로 잡고 지나사의 지나 역대 연조와 대조하면 주몽 건국 원년 갑신(甲申)은 한 문제 후원 원년에 상당하며, 유리왕 원년 임인(壬寅)은 한 무제 건무 2년에 상당하며, 대무신왕 원년 무인(戊寅)은 한 무제 태초 3년에 상당하며, 모본왕 원년 무신(戊申)은 한 무제 본시(本始) 5년에 상당하니라.
유리왕 33년(14)에 습취(襲取)한 한(漢) 고구려현은 곧 한 무제가 위 우거(衞右渠)를 멸하고 신설한 4군의 1현이요, 대무신왕 11년(28)에 한 요동태수가 입구(入寇)함은 고구려현의 실패한 욕(辱)을 보복하려 함이요, 대무신왕 15년에 출항(出降)한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는 지금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요 요동의 한 낙랑군은 아니다. 유리왕 31년의 왕망(王莽)과 대무신왕 27년(44)의 한 광무(光武)에 관한 기사 등은 후인이 지나사에서 초록(抄錄)한 것이니, 위의 기사 같은 것은 모본왕 이후 곧 삭감된 120년의 연조 중에 이서(移書)한 것이거니와 사실의 진위는 또 별제(別題)로 토론할 것이다.
온조(溫祚)의 모 소서노(召西奴)는 주몽(朱蒙)의 제2처요, 주몽은 온조의 계부(繼父)이니, 백제의 건국 연대도 고구려와 대략 같으나 이는 번잡을 피하여 타일에 별론(別論)코자 함.
문무왕이 고구려 사자(嗣子) 안승(安勝)을 조(詔)하여 가로되 “公之太祖鄒牟王[공지태조추모왕]……闢地千里年將八百[벽지천리년장팔백]”이라 한 바, ‘八百[팔백]’의 ‘八[팔]’은 ‘九[구]’의 잘못이니, 대개 후인이 개찬한 것인 듯.
(北京에서 申采浩)
〈時代日報 1926. 5. 20·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