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의 조선 변방 여진족 번호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번호란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이들을 일컬으며, 조선의 경우는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혹은 조선의 지배권에 복속된 여진족들이 번호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인 북방민족인 여진족을 쉽게 통제함과 동시에, 쓸만한 군사력으로 운용이 가능해서 이들의 거주를 허용하고 귀화 역시 허가했습니다.
조선의 지배를 인정한 여진족들은 보통 조선군에 종군하거나 혹은 스파이나 길잡이가 되거나, 마지막으로 다른 여진족이 조선을 침입하려 할 때 1차적으로 이들의 접근을 알리고 맞서 싸워주는 역할을 해주었죠.
그러나 누르하치가 등장하고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응하느라 여진족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자, 조선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의 입지가 점점 바뀌게 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와 국내외의 안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자 했지만, 누르하치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거든요.
이 와중에서 조선의 주요 번호로 자리잡고 있던 노토 부락이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앞서 임진왜란 중에 여진족이 자주 조선을 자주 습격했고 그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누르하치의 경쟁자던 부잔타이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조선의 지배권에서 자신의 지배권 하에 두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 부족들이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자 조선이 구상한 번호 체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앞서 말한 노토 부락의 이탈이 시발점이었습니다. 노토 부락은 조선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국경 내로 들어와 경작을 하고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이에 항의하는 조선의 군관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노토 부락의 배반을 두고 볼 리가 없던 조선은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무자비한 보복을 가합니다. 부락이 가진 경제력과 군사력을 한꺼번에 날려버렸으니까요.
그러자 노토 부락은 누르하치에게 병력을 받아서 조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다른 번호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이들은 조선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누르하치가 조선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며 해명했지만 더 이상의 번호가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은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첨사 구황이 회령에서 여진족 번호를 구원하다가 전사했으며 이로 인해 누르하치의 세력이 두만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여파로 함경도의 번호들도 거의 반이나 누르하치에게 귀순 복종하여서 조선의 번리가 날로 철거되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여진족의 침공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방패가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게다가 누르하치와 부잔타이가 격전을 벌이면서 조선의 영토까지 들어오는 상황이 벌어졌고, 누르하치의 군대와 조선의 방어군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이 나오기도 합니다.
점점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지만 딱히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6진의 상황이 심각했죠. 선조 28년부터 조선은 수도권 일대의 경포수들이나 황해도, 평안도 지역의 포수를 양성했으며 얼마나 북방에 병력을 파견했는지 선조 33년에는 수도권을 방어하는 부대들이 부족할 정도라고 하소연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호 세력들이 점차 강대해지자 정예부대를 차출해 1~2개 부락을 시범적으로 박살낼 계획을 세웁니다. 본보기로 하나를 잡아 족치려고 한 셈이죠. 실제로 1600년에 종성의 번호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자 분노한 조선 조정은 대대적인 보복을 가합니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단 3일 동안 조선군은 반란을 일으킨 번호들을 색출하여 제압했고 300리에 달하는 여진족 부락들을 남김없이 불사르고 약탈합니다. 포수들의 역할이 지대했으며 급습하는 여진 기병들을 사살했죠. 조선군은 7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 이외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8월에도 정신을 못차린 여진 부락 2개가 종성 지역의 여진족들과 내통해 급습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2,500명의 병력을 투입해 보복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여진족의 반란은 끊이질 않았고 1603년에는 동관이 함락당했으며 보복을 위해 출격한 조선군도 별다른 성과없이 돌아오고 말았죠.
이후로 조선은 변방 여진족 번호의 침입에 대해서 공세적인 입장보다는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데는 군사적인 변화도 매우 컸습니다.
세조 이후로 조선군은 기병대가 충격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조화가 깨지게 되면서 궁기병 위주로 운용되었고 그나마도 임진왜란의 와중에 많은 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력 대부분이 보병, 포수로 전환되면서 이전과 같이 전광석화로 나아가 여진족들의 준동을 제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이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조성한 변호 체계는 누르하치의 등장과 임진왜란의 발발으로 점차 무력화되었으며 결국 여진족에 대한 지배 체계 및 방어 체계가 붕괴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