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응진전...]
백련사 응진전은 맞배 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 아난 ·가섭 등의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있다. 수미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다문제일의 아난과 두타제일의 가섭이 협시를 이루며,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있다. 나한은 수행을 통하여 성불자가 되었지만 표현 양식에 있어 제각각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취한 매우 사실적인 수행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깨달은 이들의 모습이다.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로 응진당을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한다.
[백련사 응진당 편액 밑에 코끼리?...]
[축대위 응진전과 좌측에 칠성각...]
[백련사 명부전...]
백련사 명부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지장보살님상을 비롯해서 무독귀왕·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녹사·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님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다. 또한 안에는 1775년(영조 51)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 1738~1794) 스님이 지은(시왕전중수기)현판이 있어 연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안에는 스님과 보살님이 대화를 나누시고 계시기에 조심스러워 그냥 밑에서만 서성인다. 명(冥)이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여, 지옥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님과 십대왕들을 모시게 된다.
[명부전 내부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시왕상들이 협시하고...]
[백련사 명부전 금강역사...]
[명부전 금강역사...]
[백련사 대웅보전...]
백련사 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현판의 '대웅보전'글씨는 원교(員崎) 이광사(李匿師, 1705~1777)의 글씨로써,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건축 양식을 보면, 기단을 높이 쌓아 경사면을 고르고 건물을 안치했는데 건물의 뒷부분에도 3단으로 높은 축대를 쌓았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정은 우물천정인데 중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처리하여 내부 공간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 앞면 중앙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해 놓아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한편 안에는 전각의 중수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2매가 걸려 있어 참고가 된다. 하나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760년(영조36)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 되었으나 왈찰(日制), 지정(智正), 혜철(惠哲), 태화(太和), 신징(愼證), 규연(圭演), 찰연(奈演), 윤철(閨哲), 연징(蓮潑), 붕관(鵬寬)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問) 이의경(李載敬,1704~1778)을이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중수기>인데, 1836년(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안에는 사자(飾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듯하다.
[두 개의 편액으로 따로 쓰여진 대웅보전 현판...]
[백련사 대웅전 안내문...]
[대웅보전 수미단에는 삼불이 모시어져 있고...]
백련사 대웅보전 수미단에는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다. 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한다. 높이가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된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손 모양이 다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련사 대웅보전 탱화...]
백련사 대웅보전 탱화는 삼세불 뒤에는 1773년(영조 41)에 그린 후불탱화가 있다. 중앙에는 석가후불화인 영산회도, 왼쪽에는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극락회도를 한 폭에 그린 가로 400cm,세로 450cm의 탱화이다. 대웅보전 동쪽 벽에도 삼장탱화가 있다. 삼장보살은 천장(天藏), 지지(持地), 지장(地藏)보살을 일컫는것으로 이 삼장보살을 중심으로 삼계의 보살과 권속들을 그리고 있다. 중앙에 천장보살이 설법인을 결하고 앉아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의 협시를 받고 있으며, 왼쪽에 지지보살은 용수보살과 다라니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삼장그림은 지장보살의 발전, 확대된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다. 서쪽 벽에는 신중탱화만 모셔져 있다. 신중탱화는 일정한 형식없이 복잡한 구도이지만, 일반적으로 중앙에 제석을 모시고 좌우로 무기를 든 신장들이 배치되는 형식이다. 신중은 인도의 재래신들을 불교에 수용하여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으로 개인의 재난을 막아주고 불법과 사원을 보호해주는 호법신이다.
[대웅보전의 본전불의 머리엔 보주형 육계가 솟아있고 그밑에 계주가...]
[백련사 대웅보전 삼세불 우측에 걸려있는 탱화...]
[백련사 대웅보전 천장을 가득메운 연등...]
[만덕산 백련사 현판에 모일사(社) 자를 쓴것이?...]
널빤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대부분 가로로 길죽하여 횡액(橫額)이라고도 하고, 보통은 현판(懸板)이라고 부른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글씨의 경우 대개 대형이므로 대자(大字)라는 별칭도 있다.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며,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한다. 즉,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주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 명칭을 표시한 것을 서서(署書)라고 한 것이 편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과 문루, 궁궐 전각, 지방관아와 향교·서원·일반주택에까지 붙여졌다.
여기에 쓰이는 한자는 전서와 예서·해서·행서·초서 등 매우 다양하며, 요즘에는 한글로 된 편액도 많아졌다. 건물의 얼굴이므로 건물 격식에 어울리는 글씨와 장식을 더한다. 글씨의 경우는 당대 명필과 고승·문인의 것이 대부분이나, 더러는 옛 선현의 글씨를 모아 만들기도 하고 활자체나 특별히 만든 글씨로 장식하기도 한다. 글씨는 금니와 은니·먹·분청·호분 등으로 쓰고, 틀은 무늬와 색채를 넣어 주련(柱聯)과 함께 건물의 중요한 장식 수단이 된다. 이렇게 편액은 건물에 멋을 내는 수단임과 동시에 건물 명칭과 내력, 역사와 인물, 일화 등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상상의 동물이 날개를 펴고...]
[대웅보전에서 내다본 요사채...]
[백련사 삼성각과 멀리 요사채가...]
[백련사 삼성각좌측엔 칠성탱화 우측엔 산신탱와 그리고 가운데엔 독성탱화가...]
백련사 삼성각은 맞배지붕에 앞면 2칸, 옆면 1칸이며 안에는 독성탱화와 산신탱화가 있다. 산신탱화는 가로 83cm, 세로 104cm로서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 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있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치성광여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다.
[백련사 삼성각...]
[백련사 요사채와 석등...]
[백련사 삼성각 앞뜰의 다층탑과 대웅보전의 측면...]
[요사채에서 올려다 본 삼성각과 동백숲...]
[요사채 앞뜰엔 혹시 삽살개?...]
[대웅전과 기와불사 장소겸 감로수각...]
[백련사 삼성각의 고풍 스러움...]
[명부전, 대웅전 그리고 감로수각과 뒤로 삼성각...]
[오랜세월을 지내온 만큼이나 아름다운 배롱나무...]
[만경루에서 내려다본 강진만...]
[백련사 육화당이 대웅전앞에서 보면 단층건물로 보이고...]
[여섯가지 발원으로 세워졌다는 육화당(六和堂) 현판...]
[배롱나무에 꽃이 피려면 얼마나 많은 날들이...]
[만경루 1 층좌측엔 다실이... 우측엔 기념품 판매대가...]
[굉장히 커다란 만경루 현판...]
[헝겁에 새겨진 차(茶)라 쓰여진...]
[다산 정약용의 글씨...]
넓지는 않지만 그 반면 좁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비스듬한 땅을 잘 조성하여 축대를 이용 넓게 쓰고 있는 백련사 마당에 서면 슬기로움이 전해지는 듯 하다. 한 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로 오질 않고 차도로 올라왔기에 아마도 부도밭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찾은 부도는 축대 위의 아름다운 부도탑과 또 응진전 앞의 보도만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백숲 속에 4기기 모시어져 있다 한다. 우리는 동백숲으로 내려가 다산초당유적지를 들러 봐야 하는걸 다시 차를 끌고 유적지 주차장에 가서 거꾸로 올라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번에 찾게 된다던가 아니면 다음번에 가실 독자 분들은 백련사에서 동백숲을 이용해 다산초당으로 넘어가시는게 훨씬 운치도 있고 힘도 덜 든다는 사실을 알고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산초당유적지로 출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