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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과 그림과 茶가 있는 풍경 원문보기 글쓴이: 원봉(元峰)
백과사전 百科事典의 역사
encyclop(a)edia
과학·자연 및 인간의 활동에 따른 일체의 지식을 압축 정리해서 각 사항을 가나다순(알파벳순), 분류순 또는 기타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엮은 책.
동양,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국에서는 유학(儒學)의 경서(經書) 숭상의 전통에 따라 경서의 내용이 과거(科擧)에 출제되었으므로 고전(古典)의 발췌와 주석(註釋)을 모아 유별로 분류한 유서(類書)가 중요시되었으니, 이 유서가 곧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현대의 백과사전은 근대 유럽문화의 산물이며 최신의 지식을 망라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에 대하여, 유서는 유학의 권위를 고양하려는 의도에서 산출되었으며 분류에 의하여 고지식(古知識)을 집성(集成)하고 성현의 언행을 전승함을 이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백과사전은 그 등장 초기에는 항목의 배열을 분류별로 하였으나 점차 알파벳 또는 가나다순 배열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이 점은 언어사전(言語辭典)의 배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사전(辭典)은 언어의 해석, 어원, 철자, 발음 등 모든 언어에 관한 지식을 설명한 것이고, 사전(事典)은 각 사항에 관한 지식을 설명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한자로는 백과사전을 언어사전과 구별하여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백과사전(百科事典)이라 칭하게 되었다.
백과사전을 뜻하는 영어의 encyclop(a)edia, 프랑스어의 encyclop0x8045die, 독일어의 Enzyklop○die는 어느 것이나 그리스어의 egk0x8043klios paideia를 어원으로 한 것이다. 이는 원만함을 뜻하는 egk0x8043klios와 교육을 뜻하는 paideia가 합성된 것으로 ‘원만한 지식의 교육’을 의미하며, 그리스 학자들의 교육이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백과사전은 원래 유명한 소수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유별로 집성하는 대항목주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새로운 지식정보를 직접 신속히 얻으려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소항목주의와 사전체(辭典體) 방식을 채택하는 백과사전이 많아지고 있다.
유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진 동양 고유의 백과사전이다. 이는 동양의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전 영역 또는 일정 영역에 걸친 많은 서적으로부터 고실(故實)·시문(詩文) 등의 사항을 유별(類別) 또는 자별(字別)로 분류, 편찬하여 검색하기 편리하게 만든 책이다.
유별로 분류한 유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 유(類)를 모두 수록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특정한 유만을 수록한 유서이다. 자별로 분류한 유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어구(語句) 끝자의 운(韻)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구 첫자의 운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다.
유서는 많은 서적으로부터 사항을 뽑아 유별 또는 자별로 분류, 편집한 것이므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류체제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즉, 유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유문(類門)을 설정하였고, 찾고자 하는 사항이 어느 유문에 속하는가를 알아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또 자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고자 하는 글자가 어느 운에 속하며 또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쉽게 찾을 수 있다.
백과사전 百科事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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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에 플리니(Pliny)가 편찬한 ≪박물지 Naturalis Historiae≫는 서양 백과사전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 편찬방식은 동양의 유서와 같은 것으로 중세에서 17세기까지의 백과사전은 이러한 편찬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서명에 encyclopaedia라는 용어를 사용한 근대백과사전은 1630년에 간행된 독일인 알스테드(Alsted,J.H.)의 백과사전 ≪Encyclopaedia Septem Tomis Distincta≫였다.
또 모레리(Mor0x8045ri,L.)는 1674년에 ≪역사대사전 Le Grand Dictionnaire Historique≫을 간행하였는데 역사사전에 알파벳순 배열을 시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모레리 이후의 백과사전은 알파벳순 배열이 일반화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적 백과사전이 출현하였다. 1728년에 체임버스(Chambers, E.)에 의하여 간행된 ≪백과사전 Cyclopaedia≫은 겨우 2권으로 된 것이었으나, 각 항목에 학자들의 논문을 수록하고 알파벳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상호참조방식을 채용함으로써 이후 백과사전의 모범이 되었다. 체임버스는 이후 증보판을 많이 출판하였으며 외국에서도 추종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시대의 대표적 사업은 디드로(Diderot)를 중심으로 달랑베르(d’Alembert)의 협력을 얻어, 몽테스키외(Montesquieu)·뷔퐁(Buffon)·루소(Rousseau) 등 이른바 백과전서파 사람들을 기고가(寄稿家)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 ≪백과전서 Encyclop0x8045die, ou Dictionnaire Raisonn0x8045 des Sciences, des Artes et des M0x8045tiers≫ 제1·2권이 1751년에 발간되었으나 이듬해 발행금지처분을 받았다. 디드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751년부터 1772년까지에 걸쳐서 도판과 함께 28권을 완성하였고, 1776∼1777년에는 보유 5권을, 또 1780년에는 색인 2권을 간행함으로써 모두 35권을 완성하였다.
다음으로 현대백과사전의 시초는 1768년부터 1771년까지에 걸쳐서 영국에서 간행된 ≪브리타니카백과사전 Encyclopaedia Britannica≫으로, 초판은 3권이었으나 이후 판을 거듭함에 따라서 내용이 정비되고 책수도 증가하여 세계 백과사전의 모범이 되었다. 1920년에 미국 시카고의 시어즈가 매수하여 1936년부터 매년 개정, 발행하고 있으며, 별도로 연감을 개정, 증보하여 발행하고 있다.
이 밖에 오늘날 세계의 백과사전계에서 유명한 것으로는 영국의 ≪체임버스백과사전 Chambers’s Encyclopaedia≫·≪에브리맨즈백과사전 Everyman’s Encyclopaedia≫, 미국의 ≪아메리카나백과사전 Encyclopedia Americana≫·≪콜리어즈백과사전 Collier’s Encyclopedia≫, 프랑스의 ≪프랑스백과사전 Encyclop0x8045die Francaise≫·≪라루스대백과사전 Grand Larousse Encyclop0x8045dique≫, 독일의 ≪브로크하우스백과사전 Der Brockhaus Enzyklop○die≫, 이탈리아의 ≪이탈리아백과사전 Enciclopedia Italiana≫, 소련의 ≪소비에트백과사전 Bol○haya Sovetskaya Entsiklopediya≫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백과사전이 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진 유서라는 명칭의 백과사전이 있다. 유서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송(宋)나라 인종 때 편찬된 두 서목(書目) ≪숭문총목 崇文總目≫과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의 병부(丙部)에 유서류(類書類)를 분류법상의 일문(一門)으로 독립, 설정하고 해당하는 서적명을 열거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와같이 문헌상으로는 유서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위의 두 서목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실제 유서의 기원은 이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소급된다. 중국의 유서는 처음부터 시문(詩文)을 참고하기 위해서 편찬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뒤 과거가 실시되고 관리의 등용시험에 시부(詩賦) 이외에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논문을 시험하였으므로, 초기의 유서가 시문 중심으로 편찬되었던 것에서부터 점차 제왕(帝王)의 정치를 중심으로 군신(君臣)의 사적(事蹟), 국가의 문물제도를 알리는 것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유서는 그 성질상 앞서 편찬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하여 칙명(勅命)으로 관찬(官撰)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 내용이 점차 방대한 것으로 되었다.
중국 최초의 유서인 ≪황람 皇覽≫은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편찬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산일되었으며, 그 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화림편략 華林遍略≫이, 북제(北齊) 때에는 ≪수문전어람 修文殿御覽≫이 편찬되었으나 모두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송대(宋代)에 들어오면서 유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분량이 1,000권을 헤아리게 된다. 송대의 유서 중 중요한 것으로는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태평어람 太平御覽≫ 1,000권, 왕흠약(王欽若)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책부원구 冊府元龜≫ 1,000권 등이 있는데, ≪태평어람≫과 ≪책부원구≫는 다같이 송대 유서의 으뜸이다.
이 밖에 민간에서는 왕응린(王應麟)이 편찬한 ≪옥해 玉海≫ 200권이 명저이다. 원대(元代)에는 음시부(陰時夫)가 ≪운부군옥 韻府群玉≫ 20권을 편찬하였는데, 운(韻)에 의하여 배열, 편찬된 것으로서는 현존 최고(最古)의 유서이며 현재 통용되는 운서 가운데에는 이 책을 모방한 것이 많다.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유서의 규모와 수량이 전술한 각 시대의 그것을 크게 능가하게 되었으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해진(解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영락대전 永樂大典≫ 2만 2877권이다. 민간의 유서로는 장황(章潢)이 편찬한 ≪도서편 圖書編≫ 127권과 왕기(王圻)가 편찬한 ≪삼재도회 三才圖會≫ 106권이 유명하다.
청대(淸代)는 유서의 전성시기로서 그 수량에 있어서 명대를 훨씬 능가한다. 청대에 편찬된 유서 중에서 특기할 것은 성조(聖祖) 때에 진몽뢰(陳夢雷)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하고 장정석(蔣廷錫)이 개정(改訂)한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1만 권으로서, 이는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한 중국 최대의 유서이다.
이 밖에도 주요한 것으로는 장영(張英)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연감유함 淵鑑類函≫ 450권, 장정옥(張廷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자사정화 子史精華≫ 160권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 유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많은 유서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언제부터 어떤 유서가 편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에서 우리 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유서는 1554년(명종 9)에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고사촬요 攷事撮要≫ 2권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서리(胥吏) 및 항거(巷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응당 알아야 할,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 이르는 제반사항을 22항목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이다.
선조 때에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 20권은 원나라 음시부가 편찬한 ≪운부군옥≫의 체재를 모방하여 전체를 106운으로 나누고, 각 운에 이에 해당하는 동운자(同韻字)를 열거하였으며, 각 운자 아래에는 일정한 유목(類目)에 따라 끝에 동운(同韻)이 오는 2·3·4자 등으로 된 성어(成語)를 적고, 단군에서부터 선조 때까지의 우리 나라 문물제도 전반에 걸친 고사(故事)를 뽑아 수록하였다.
≪지봉유설≫은 전체 내용을 25부문 183항목으로 나누고 각 항목을 다시 3435조목으로 세분하여 각 조목에 해당하는 고실(故實) 및 문견사실을 고금서적으로부터 뽑아 편찬한 것이다. 경제적 문장과 과학적 서술로 말미암아 실학사상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편찬한 ≪성호사설 星湖僿說≫ 30권은 천문·지리·정치·제도·경제·사상·경(經)·사(史) 등의 내용을 5부문 3,057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에 해당하는 사항을 모아 배열하였다. 이는 실학사상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순조 때의 실학자 유희(柳僖)가 지은 ≪물명고 物名攷≫ 5권은 조수(鳥獸)·초목(草木)·금석(金石)·수화(水火) 등에 관한 물명(物名)을 유정류(有情類)·무정류(無情類)·부동류(不動類)·부정류(不靜類)의 4부류로 나누고, 이를 다시 14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마다 이에 해당하는 물명·형성(形性) 등의 사항을 나열하였다.
본서는 물명을 기록할 때 대부분의 경우 한자명 이외에 한글 이름을 적어 놓았으므로 국어학 연구에 특히 유용한 자료가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60권은 정조에서 철종 대에 걸쳐 활약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많은 서적으로부터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기타 외국의 고금사물과 전고(典故)를 뽑아 고증하여 1,414항목으로 세분하여 수록한 것이다. 본서는 우리 나라 전고를 참고할 때 특히 긴요한 서적이다.
고종 때에 이유원(李裕元)이 편찬한 ≪임하필기 林下筆記≫ 39권은 많은 서적으로부터 우리 나라의 문물제도 및 전고 등 광범한 분야에 걸친 사항을 뽑아 전체 내용을 16편(編)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3,568항목으로 세분하였다.
저자는 고종 20년을 전후한 한말에 조정의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본서의 많은 부분에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견문이 망라되어 있어서 특히 한국근세사의 일면을 연구한는데 중요한 유서이다.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 100권은 우리 나라 최초의 관찬유서(官撰類書)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제도를 13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약 5개월이라는 단시일에 급속히 편찬되어 잘못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았으므로 1782년(정조 6)에 이만운(李萬運) 등이 왕명을 받아 이의 수정에 착수하여 1796년 ≪증정문헌비고 增訂文獻備考≫ 146권을 20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또 1908년(융희 2)에는 다시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250권이 편찬, 간행되었다. ≪증헌문헌비고≫는 1903년(광무 7)에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학자들이 왕명을 받아 홍문관에서 ≪증정문헌비고≫ 를 다시 증보, 수정하여 16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다.
2차로 편찬된 ≪증정문헌비고≫와 3차로 완성된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서지(書誌)를 다룬 예문고(藝文考) 항목이 수록되어 있음이 특기할 사항이며, 우리 나라 문물제도 전반에 관한 대표적인 유서이다.
현대적 백과사전은 광복 이후에 비로소 간행되었다. 1958년에는 학원사(學園社)에서 ≪대백과사전≫ 6권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1959년에는 동아출판사(東亞出版社)에서 단권으로 된 ≪새백과사전≫을, 그리고 1964년에는 다시 ≪국민생활백과사전≫ 2권을 간행하였다.
학원사에서는 이후 증보판 2권을 출간하였으며, 1967년에는 개정판 ≪세계백과대사전≫ 12권을 출간한 데 이어 1970년과 1973년에는 각각 15권과 20권에 달하는 신판을 간행하였다.
또 1974년에는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대세계백과사전≫ 16권이 출간되었는데, 이전까지의 백과사전이 항목별 가나다순 배열방식으로 되었던 것임에 반해 이 ≪대세계백과사전≫은 장르별로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백과사전 간행사상 특기할 것은 1983년에 완간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30권으로, 본서는 그 기술내용에 있어서나 항목수와 사진·도판의 풍부함에 있어서 현대백과사전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한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80년 편찬에 착수하여 1991년에 본책 25권, 부록 2권 등 27권 규모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을 발간하였다. 이 책의 발간 취지와 목적은 "한민족이 이룩한 문화유산과 업적을 정리, 집대성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편찬함."에 있었다. 이 사전은 광복 이후 정부의 지원하에 수행된 가장 성공적인 문화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92년 세종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하였다.
디지털 CD-ROM 백과사전
그밖에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는 한글판 ≪세계대백과사전≫을 1988년에 시작하여 1994년에 완간하였다.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지적 유산의 정수를 포함하면서 그 가운데 30%를 한국 관련 항목으로 편찬한 것이다.
1990년대 정보화 시대, 즉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백과사전은 CD-ROM과 DVD-ROM,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출판 분야로 방향을 전환해나가고 있다.
Encyclopædia Britannic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百科事典,
대영백과사전은 무엇일까?
250년간 지구 지식의 창고 역할을 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로고
1768년에 초판을 발행한 이후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일반 백과사전. 영국이 자랑하는 세가지 중 영국 여왕과 그리니치 천문대, 그리고 대영백과사전이라고 하는 지식 창고였다. 온라인 시대에 위기를 맞은 브리테니커는 이제 온라인 지향의 정보 사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뿌리깊은 나무'사의 한창기 사장이 브리테니커 한국 사장을 맡아, 순 영어로 된 '브리테니커 사전'을 월부책으로 팔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기적의 세일즈 실력을 발휘하였고, 그때 대영백과사전을 팔던 세일즈 맨들이 이땅의 새로운 판매신화의 주역들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5판
176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초판이 발행되기 시작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출판되고 있다.
초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발행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초판 제1권 속표지(1768~7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또는 〈예술 과학 사전〉이라고 하는 이 사전의 출판은 인쇄업자인 앤드루 벨과 콜린 맥파쿠하가 착상하여, 인쇄업자이자 골동품 연구가인 윌리엄 스멜리가 주로 편집했다. 에든버러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이 사전은 초판의 첫부분이 1768년 12월에 나오기 시작하여 1771년에 총 3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2,689쪽이며 벨이 찍어낸 동판인쇄화 160점이 들어 있었다. 이 사전의 장점이자 색다른 점은, 중요한 주제들은 길고 범위가 넓은 논문들로 묶어 정리하고, 전문용어와 그밖의 주제들에 대해서는 사전 형식의 짧은 항목들로 처리하여 널리 참조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제2판
제2판은 그 규모나 분야면에서 훨씬 더 대작이었다. 1777~84년에 시차를 두고 몇 권씩 출판되었으며 총 10권으로 8,595쪽에 달했다. 초판 항목의 설명이 훨씬 더 길어졌음은 물론이고 초판보다 더 많은 논문이 실렸고 새 항목도 많이 늘어났다. 제2판은 인명 항목을 추가했고 역사를 담은 지리 항목을 더 많이 늘림으로써 〈예술 과학 사전〉의 범위를 넘어섰다. 편집은 제임스 타이틀러가 맡았다(1747경~1803).
제3판
제3판은 훨씬 방대해져 총 1만 4,579쪽에 달하는 18권으로, 1788~97년에 걸쳐 몇 권씩 출판되었다. 제3판은 맥파쿠하가 1793년 죽을 때까지 편집을 맡았고, 그후에는 스코틀랜드 감독 교회 목사인 조지 글리그(1753~1840)가 맡아 완간했다. 제3판이 완간되었을 때 앤드루 벨이 맥파쿠하 상속인들 소유의 주식을 사들였다. 글리그가 편집하고 벨의 사위인 토머스 보너를 위해 간행한 증보판 2권이 1801년에 나왔다. 제3판과 증보판의 신선하고 힘찬 산문체 문장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잘 제공해주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영구적인 명성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4판
제4판은 1801~09년에 걸쳐 20권으로 완간되었다. 총 1만 6,033쪽에 달하고 제작 연도는 1810년으로 되어 있다. 본래 제4판은 제3판을 개정·인쇄한 것으로, 새 논문과 내용을 보충한 논문, 당시 역사를 다룬 항목들과 새 인명항목들을 담은 2권을 보강했다. 에든버러의 의사이자 자연과학자인 제임스 밀러(1762~1827)가 편집을 맡았는데, 맥파쿠하가 작업중에 사망함으로써 발생한 빠진 부분과 불완전한 부분을 보충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다.
제5·6판과 제4·5·6판의 증보판
보너와 밀라가 잇따라 편집한 제5판은 제4판을 교정·인쇄한 것이 었고, 찰스 맥라렌이 편집을 맡은 제6판은 당시까지 이르는 항목들을 조금 보태어 제5판을 다시 인쇄한 것이다. 제5판이나 제6판은 제4·5·6판의 증보판에 비할 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증보판은 준비되자마자 출판되었다. 6권으로 된 이 증보판은 맥비 네이피어(1776~1847)가 편집을 맡았고, 1815~24년에 3권씩 출판되었다. 네이피어는 나중에 〈에든버러 리뷰 Edinburgh Review〉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 증보판에서 시도한 가장 혁신적인 점은, 편집자가 입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나은 출판물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처음으로 거의 모든 항목을 기고 받아 실었고 기고자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다. 이 항목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대 최고의 영국 및 프랑스 석학들이 집필한 것들이다. 이러한 때에 에든버러의 모험적인 출판업자 애처볼드 컨스터블이 벨과 보너의 상속인들에게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판권을 샀다.
제7판
1826년에 컨스터블은 파산했고 컨스터블 자신도 이듬해 죽었다. 그러자 에든버러의 또다른 출판업자인 아담 블랙이 이 사전의 판권을 사들였고, 네이피어가 제7판의 편집을 맡았다. 전부 1만 7,101쪽에 금속판화 506점이 실린 21권의 사전이 1830~42년에 걸쳐 몇 권씩 출판되었다. 제7판은 증보판을 넣고 새로 주문받은 항목들을 첨가해 이전 판을 개정한 것이었다. 전체 색인을 실은 특별부록을 새로 만들어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는데, 이 전체 색인은 이후에 출판되는 판들에서도 따라 내어 관례적인 특징이 되었다.
제8판
21권에 특별부록 1권이 딸린 제8판은 전부 1만 7,957쪽이고 금속판화가 402점 실렸으며 1852~60년에 걸쳐 출판되었다. 네이피어가 죽자 에든버러대학교의 법의학교수인 T.S. 트레일(1781~1862)이 새로 편집을 맡았다. 제8판은 이전 판들의 항목을 그대로 싣기는 했지만 아주 철저한 개정판이었다.
제9판
24권에 특별부록이 딸린 제9판은 1875~89년에 1권씩 차례차례 출판되었다. 제9판은 아주 잘 만들어진 것 중의 하나로 꼽힌다. 편집은 세인트 앤드루대학의 논리학·형이상학·영문학 교수이며 셰익스피어 학자인 T.S. 베인스가 맡았다. 그는 제9판의 편집을 계획하고 1887년 죽을 때까지 편집을 계속했는데, 1881년부터는 공동편집자로 셈족어 학자인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와 함께 일했다. '학자들의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제9판은 당대의 학문적·종교적 논쟁에 대해 진보적인 자세를 취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전에 글을 기고한 1,100명가량의 기고자들의 명단에는 70명 이상의 미국 학자들과 60명가량의 유럽 대륙 여러 나라 출신의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소유권은 미국의 출판업자인 호레이스 H. 후퍼가 또다른 출판업자인 월터 M. 잭슨과 함께 1901년 아담과 찰스 블랙에게서 완전히 사들임으로써 영구히 미국으로 넘어갔다.
New American edition of the Encylopædia Britannica (1899)
미국에서 브리테니커 사전 판권을 인수한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1899년판 마국판 브리테니커 판본
제10판
제10판은 1902~03년에 걸쳐 런던 〈타임스 The Times〉지의 후원을 받아 출판했다. 이는 제9판에 증보판 11권을 보탠 것인데, 특별히 역사 부분에 최신 자료를 많이 실었다. 제10권의 편집은 여러 사람이 맡았는데, 도널드 매켄지 월리스 경, 휴 치점, 아서 T. 해들리, 호레이스 후퍼와 형제인 프랭클린 H. 후퍼 등이다.
1904년 이른바 20세기판 내면표지
제11판
유명한 제11판은 1909년 〈타임스〉지가 편집상의 논쟁과 잭슨과 호레이스 사이의 소송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고 나서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사가 독자적으로 1910~11년에 29권으로 발행했다. 제10판 때와 마찬가지로 프랭클린 후퍼가 뉴욕 편집실을 맡았고 휴 치점이 런던 편집실을 맡았는데, 런던 편집실에서 제11판 작업의 대부분을 해냈다. 제11판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길고 범위가 넓은 논문들을 짧게 나누어 더 전문적인 항목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전 판들의 방식에서 상당히 벗어난 점이 특징이었다. 그결과 제11판은 전체 본문의 양이 9판보다 그리 많지 않은데도 항목수는 제9판의 1만 7,000항목보다 2배 이상이나 되는 4만 항목에 이르렀다. 제11판은 제9판과 제10판의 많은 항목을 그대로 이어받기도 하고 고쳐 쓰기도 했다. 그밖에도 이전 항목에서 과거 역사를 전보다 상세히 다루어 보탰을 뿐 아니라 새 항목도 집필해 넣었다. 제11판의 느긋하고 매끄러운 산문체 문장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문체의 절정을 이루었다. 1920년에 백과사전을 시카고의 시어스로벅통신판매회사가 사들였고, 호레이스 후퍼가 1922년 죽을 때까지 사전의 발행인으로 일했다.
U.S. advertisement for the 11th edition from the May 1913 issue of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특집으로 다룬 미국 브리테니커 광고, 특히 이 선전에 오른 제11판은 최고의 절정을 이룬 브리테니커로 평가 받는다. 느긋하고 매끄러운 산문체 문장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문체의 절정을 이루었다. 1920년에 백과사전을 시카고의 시어스로벅통신판매회사가 사들였고, 호레이스 후퍼가 1922년 죽을 때까지 사전의 발행인으로 일했다.
제12·13판
1922년에 런던의 치점과 뉴욕의 프랭클린 후퍼가 편집을 감독하여 만든 3권의 증보판이 제11판 29권에 첨가되어 제12판이 되었다. 1926년에는 뉴욕의 후퍼와 런던의 J.L. 가빈이 편집한 전혀 새로운 증보판 3권이 추가되어 제13판이 만들어졌다. 1923~28년에 사전의 소유권은 시어스로벅사에서 후퍼의 미망인과 처남인 윌리엄 J. 콕스에게로 넘어갔다.
제14판
1928년에 시어스로벅사가 다시 백과사전을 사들였고, 콕스를 발행인으로 그대로 두어 오래전의 것인 제11판의 개정작업을 맡겼다. 제14판의 편집을 런던에서는 J.L. 가빈이 맡았고 뉴욕 시에서는 프랭클린 후퍼가 맡았는데, 작업을 끝내는 데 약 3년 정도 걸렸다(1926~29). 제11판의 느긋한 문체와 학문적인 세부내용을 줄이고 과학 분야를 비롯한 다른 여러 주제들에 대한 새 항목을 추가했다. 또한 제11판의 방대한 자료를 짤막하게 처리했으며 3,500여 명에 이르는 세계 도처의 석학들로부터 글을 기고받아 수록했다. 부록 1권과 완벽한 지도책 1권이 포함된 전24권의 백과사전이 1929년 대공황 전날에 출판되었다. 1932년에 콕스가 발행인직을 사임했고, 시어스로벅사의 부사장인 엘칸 해리슨 파웰이 사장이 되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파웰은 대공황 기간의 낮은 사전 판매실적을 직접판매방식으로 조직하여 점차로 판매실적을 높였다. 또 편집방식도 크게 바꾸어 계속해서 개정판을 내도록 했다. 이후부터는 몇 년에 걸쳐 백과사전 전체를 새롭게 개정하는 대신에 해마다 개정하여 재인쇄했다. 1938년부터 〈브리태니커 연감 Britannica Book of the Year〉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연감은 출판 이후 그해에 생긴 새로운 사실들을 실었다. 광고부 이사를 지냈고 당시 시카고대학교 부총장이었던 윌리엄 벤턴이 1941년말에 시어스로벅사로부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모든 권리를 기증받았다. 대학 이사회가 재정적 위험을 지지 않기로 결정하자 벤턴이 운영자본을 대고 엔사이클로피디아브리태니커사 이사회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당시 대학 총장으로 있던 대주주 로버트 M. 허친스이 편집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본부가 시카고에 세워졌다.
제15판
1952년에 브리태니커사가 〈서양의 위대한 책들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출판하면서 철학자 모티머 J. 애들러와 브리태니커사와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허치슨이 1974년에 은퇴하자 애들러가 그의 뒤를 이어 편집위원회의 위원장이 됨). 애들러, 벤턴, 찰스 E. 스완슨(1967~85년 사장으로 재임)의 경영 아래 편집상의 방대한 노력으로 1974년에 〈브리태니커 3〉, 즉 제15판의 제1쇄판을 내놓았다. 제15판은 각각 다른 역할을 하는 3부분, 즉 ' 마이크로피디아'(소항목사전)·' 매크로피디아'(대항목사전)·' 프로피디아'(지식의 개요)로 이루어졌다. 100여 개 국 4,000여 저자들의 기고로 이루어진 제15판은 그야말로 범세계적인 시각으로 씌어졌다. 이 사전은 인쇄비를 제외한 편집제작비만도 3,200만 달러라는 거금이 들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출판역사에서 단일 민간투자로는 최대액수였다. 〈브리태니커 3〉의 편집주간은 워렌 E. 프리스였고, 필립 W. 괴츠(후에 편집주간이 됨)가 편집부장을 맡았다.
해마다 백과사전의 개정작업이 계속되었고, 이 개정판들을 1985년에 나온 제15판의 대대적인 개정판으로 보충했다. 1985년 개정판을 출판하면서 '매크로피디아'의 체제를 다시 세우고 수백 항목을 합병하거나 다시 나누었으며 색인 부분을 '마이크로피디아'에서 떼어내어 따로 2권의 부록으로 만들었다. 또한 '마이크로피디아'와 '프로피디아'를 다시 디자인하고 재조직하여 전집 32권으로 새롭게 개정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세계적인 명성에 걸맞게 각국의 여러 언어로도 발간되었는데, 타이완에서 발행한 중국어 요약판 〈간명 브리태니커 백과전서〉, 일본 TBS 방송국과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있으며 이외에도 터키어판·이탈리아어판·러시아어판이 준비중이거나 발간되고 있다.
온라인 시대의 브리테니카로 변신
1990년대초에 〈브리태니커 전자색인〉과 〈브리태니커 CD〉(독창적인 검색 소프트웨어와 함께 텍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사전을 CD1장에 담아 제공)를 포함한 다수의 CD-ROM 상품을 토대로 전자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이 기간 동안 브리태니커사는 〈브리태니커 온라인〉을 개발하여 인터넷상으로 서비스를 확장시켰으며 현재 http://www.eb.com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백과사전 百科事典의 역사
encyclop(a)edia
첫댓글 참 좋은 자료 입니다.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백과사전이, 인터넷 세상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변신 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