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하공 묘갈명(友泉河公墓碣銘)
진양은 영남의 거읍으로 세족고가가 많은데 수곡의 하씨가 가장 문염으로 일컬어진다. 우성(佑成)이 소시에 어른들로부터 지금 하씨에 문학에 회봉(晦峯)이 있고 부(富)에 우천(友泉)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대개 회봉 선생은 유림의 원로로서 동남의 의표이었고 우천공은 락선호의(樂善好義)하여 종방(宗邦)을 돌보며 동포(同胞)에 마음을 두어 흥학육영에 전력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된 얼마 후에 진양에 갔었는데 회봉옹은 그때 이미 양예 후이었고 우천공은 마침 출타하여 그 문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뒤 삼십 년을 지나 우천공의 철사인 석근(錫根)과 서울에서 알게 되어 곧 벗을 삼았고 이어 공의 비문을 부탁받으니 우성이 어찌 불문하다 하여 사양(辭讓) 할 수 있으리오.
공의 휘는 영진이오 자는 여옥이며 우천은 그 호이다. 시조 휘 공진은 고려 충신으로 그 훈공으로 역사에 빛나며 중고에 송정 선생 휘 수일은 남명에 사숙하고 대각서원에 배향되니 곧 공의 십이대조이다. 고조는 휘 계현이고 호는 묵와이며 증조는 휘 성운이며 호는 인재이며 조는 휘 재곤이오 선공감가감역이었고 고는 휘 세진이오 성균진사를 지냈는데 역대로 모두 후덕과 인문이 있었다. 비는 해주정씨 충의공 문부의 후(後)이오 감찰 환교의 따님이며 부덕의 유범이 있었다.
공이 1896년 고종 병신에 출생하여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으며 모부인의 명으로 회봉옹에게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 인산날에 동군 허공 (許公) 만정 (萬正)과 한성에서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곧 더불어 독립준비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시세를 헤아려 우선 인재 양성보다 마땅함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돌아와 창의모금하여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외인의 견제때문에 여학교로 만들고 해온 (解慍) 백남훈 (白南薰)을 맞아 교장으로 삼았다.
지금 진주여자고교가 곧 그것이다. 또한 그 뒤에 당시 부호(富豪) 이종만 (李鍾萬)과 협력하여 한성에 남우학원 (南友學院) 을 세워 이를 확장육성 (擴張育成)해 오던 중 후일 매부(妹夫) 조공(趙公) 홍제(洪濟) 에게 맡겨 터전을 크게 넓히니 곧 지금의 배명 (培明) 고교이다.
이보다 앞서 심산 (心山) 김공 창숙(金昌淑)이 유림의 장서를 휴대携帶 하고 기미 평화회의에 나아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그 비용이 방대함으로 공이 거금을 내어 이를 도우고도 일찍이 일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높이 보았다.
광복 후 시사일변함을 보고 서울의 우거(寓居)에서 고장(故庄)으로 돌아온 후 다시 육이오의 난을 겪게 되어 크게 지친 공은 평생의 사업으로 심열을 기울인 학교에서마저 손을 떼고 종래 원림에 은거하는 몸이 되었다. 이어 존조보본에 전념하여 선묘를 개수하고 석의를 갖추며 또한 재종족과 논의하여 진양성중에 충의당과 경충사를 지어 선조를 모시니 이것이 공의 평생의 대업이다.
1966년 병오 8월 19일에 몰하니 향년 칠십일이오 대천 구태동산 경자원에 장사하였다. 배는 광주이씨 진사 상용의 따님이오 숭덕재 윤경의 후손이며 순정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묘는 사곡 뒤 서록 해좌이다. 일자 석근은 훌륭히 가업을 잇고 밀양박씨 낙촌충 원의 후인 태식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병길, 병훈, 병황, 병철를 두었고 병길은 일남일녀, 병훈은 이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하여 가로대
우석을 벗하였으니 부하면서 청하였도다. 일생에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도다. 살아서 순하였으니 돌아가서도 평안하리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 찬
무술년(2018)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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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友泉河公墓碣銘并序
晋陽為嶺南巨色,多世族古家。而少時聞士谷之河,尤以文艶積佑成少時聞。長者言: 今河民文有晦峯,富有泉。盖晦峯翁以需林,著德儀表東南。而友泉公樂善好義,春宗那心,禱人以畫力指興學育英。及乙酉,先復未笑而過晋陽,則晦峯翁時乙襄樹,而友泉公亦通出外,未獲門而歸。其後世載與友泉公招根相識於京晒,因與蕩友而見,屬以公墓道之文,則估成烏敢以不文薛表。友聞我公司泳珍,字讀玉,友泉其號也。始祖諱拱辰,以高麗忠臣名於世。中古有松亭先生,諱受一,私淑南冥亨大覺祠定公十二世祖也。高祖諱啓賢,號謎髙: 曾祖謼聖,號忍齊: 祖韓載崑,絽工假監: 近考諄世鎳,闖進士府。世皆有厚德仁聞。他海州鄭氏文毅文字後,监察煥教女有壹篦公,高宗丙中生,十歲喪父,以母夫人命,受慬于唤。未因山日,公同公正在城目。萬嵗運動,即與謀以籌備,獨立而揆以時勢宜,莫如養成人找。乃携手而歸,倡儀募財,将立一高著學校,而竭外人兩掣,改為女學校。邀白解慍南薰為校長,今晋州女子高校是如。既又與當時富豪李鍾萬合力,彻南友學院于漠城。嗣後稍擴而張,晚更得妹崤趙公洪濟同事,拓基址,即今之培明高校也。先是全公昌椒花儒林衣書,将赴西里會談訴我獨立,而其賣甚鉅,公差出兼全以助之,而未甞向人玩其事。人益高之。自光復後見時事日非,撤京离墨奴庄,又健康寅之亂。公盖使島力專意尊祖本,改修先墓,完具石儀,又與諸宗放话,就晋陽城中建忠義堂及景忠祠祀始祖。此公平生大概也。以丙午八月十九日致享,年七十一,墓大京九台東山康唑原。配廣州李氏,祥容女崇德齏潤度後也。柔順贞靜,配君子無逄德。墓士谷村復西麓灰唑一子,格克家業,錫根男炳吉炳薰炳滉炳徹。
銘曰: 所友泉石,富而清也: 一生為善,不求名也: 存既顺者,设而寧也。歲戊午九月上 成均館大學校教授文學博士驪州李佑成 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