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할머니나 할아버지로부터 듣던 옛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민담. 그런데 21세기에 웬 설화 타령이냐고? 그것도 메트로폴리탄 부산에서. 혹 알려나, 부산에도 꽤 많은 설화가 있다는 것을.
민속학자와 부산의 16개 구군청 도움을 받아 수집한 부산 설화는 무려 158개. 그런데 이들 설화가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문화재처럼 보호받을 법적 장치도 없고, 옛날처럼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다시 아들과 딸로 이어지는 '구전'의 힘도 기댈 수 없는 까닭이다.
바다 용왕·불교와 관련된 것 많고 '애기 장수'이야기도 흔해
지자체 관광자원화 무관심 속 소멸하거나 소재 파악 어려워
'옛날 얘기' 아닌 새 콘텐츠 씨앗…'거목'으로 키울 고민 필요잊혀지고 있는, 그래서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그 설화를 지도에 담았다. 물론 지도에 담긴 설화는 할머니, 할아버지 기억 속에 잠든 것 중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설화 지도를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부산이 얼마나 흥미로운 도시인지, 또 얼마나 활기찬 도시가 될 수 있는지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이나믹' 부산! 그것은 초고층 건축물로 메워진 자본의 다이내믹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삶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그런 다이내믹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설화 아직은 숨쉬고 있다"설화란 민간에 전승된 각종 이야기를 일컫는다. 이를 세분화하면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분된다. 신화와 전설은 바위나 산, 비석 등 구체물이 있고 민담은 그렇지 못한 경우다. 민담은 그래서 전국 어디에서나 비슷한 이야기로 전승된다. 신화는 신성과 관련되고 전설은 사람이나 귀신, 동·식물과 연관된다. 신화는 국가 설립과 관련될 때 국조(國祖)신화로 분류하고 마을 창건과 관련되면 당(堂)신화로 나눈다."(김승찬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그러나 아쉽게도 부산에서 신화를 찾기는 쉽지 않다. 국조 신화야 그렇다고 쳐도 당 신화는 있을 법도 한데 딱히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대신 전설과 민담은 많다. 하지만 바위나 비석, 강, 산 등 '구체물'이 동반된 전설도 급속한 도시화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 전설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바다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특히 용왕과 친숙하다. 기장군의 철마산 전설, 시랑대 전설이 그런 경우다. 시랑대 전설에서는 용왕의 딸과 스님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비참한 죽음이 그려진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두 남녀의 애처로운 사랑을 사람들이 공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애기 장수 전설도 부산에서는 흔한 주제다. 한 비범한 아이가 나중에 역적이 된다는 '불순한' 예언에 짓눌려 싹도 못 틔우고 죽는다는 내용이 골자다. 피폐한 세상을 끊어줄 영웅을 갈망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는 민중의 '쓰라린' 바람이 깃든 전설일 테다.
불교와 관련된 전설도 많다. 금정구 범어사 창건 전설, 기장 일광면 당곡사 전설, 연제구 마하사 16나한 전설 등이 죄다 그렇다. 흥하던 집안이 갑자기 망하면 이래저래 추측이 무성하다. 기장 죽성리의 매바위 전설, 철마면 구림마을의 생거북바위 전설, 남구 용호동의 당바위 전설 등이 하나같이 집 주변의 바위를 깨뜨려 스스로 발복을 걷어찬다는 이야기다.
민중의 고단한 삶은 곧잘 내세의 기원으로도 이어진다. 불교의 윤회설은 그런 점에서 전설을 잉태하기 좋은 산실이다. 해운대구 반여동의 '류심의 비'는 낮은 신분을 억울해 하다 숨진 어린이가 다음 세상에서 대감 댁 자제로 태어나 고향을 찾는다는 전설을 전한다.
# 사라지는 설화…어떻게 해야 하나전설에 대한 각 지자체의 인식은 생각보다 낮다. 그것이 무슨 문화자산이 되고 보호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 지자체의 인식이다. 원도심은 더욱 심각하다. 관광자원이 없다고 말로는 떠들지만 전승 자원인 설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다. 지도에 나타난 것처럼 설화가 집중된 지역도 산기슭이나 물가다.
하지만 도시 외곽의 전설도 마냥 온전하지만은 않다. 북구 화명동의 시랑골 모분재 전설은 소당폭포와 모분재가 새겨진 암벽에 남았으나 오래 전 구획 정리 과정에서 그 암벽은 사라졌다고 구청 측은 전한다.
기장군도 마찬가지다. 민속학자인 부산대 김승찬 명예교수의 연구논문과 저술을 토대로 44편의 전설을 확인한 결과 무려 21개 전설에 대한 구체물이 완전히 사라졌거나 소재 파악조차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철마면 구림마을의 생거북바위 전설은 구림마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정작 생거북바위(귀암)는 소실됐다. 백동마을은 수 년 전 군부대의 차지가 됐고 약물샘(청강리 무곡마을)은 새마을 사업에 따라 도로로 편입됐다. 윷판대(일광면), 여수바우(장안읍), 배틀바위(정관면) 등은 소재 파악조차 어려웠다.# 설화는 스토리텔링의 자양분영도구 남항동은 신선이 사는 시내라는 뜻의 '영계'로 불렸고 영선동은 삼신산의 하나로 중국 동쪽 바다 너머에 있는 전설의 섬이었다. 동삼동 중리는 신선의 거처라고 하여 영주로 일컬어졌고 청학동은 신선이 타는 푸른 학을 뜻했다. 영도대교 건너편에 있는 산은 용두산이고 부산대교와 마주한 영주동, 오륙도 건너편의 용당과 신선대도 신선과 무관하지 않은 지명들이다.이처럼 봉래산 일대의 지명만 제대로 스토리텔링해도 신선의 땅으로 자원화하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정봉석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특히 최근 논문에서 부산지역 지명에 남아 있는 각종 토착 전설과 중국 진시황의 밀명을 받아 부산을 찾은 '서불의 불로초 원정'을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만든다면 국제적인 관광 자원도 가능하다고 귀띔했다. 영도구청은 이에 대해 최근 불로초 원정의 관광자원화와 문화콘텐츠화를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설화는 더 이상 옛날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콘텐츠의 자양분이자 씨앗이 된다. 문제는 그 씨앗들을 어떻게 발아시키고 거목으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를 위해 도시 설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하다. 지역 시인과 소설가, 미술가, 조각가 등의 상상력도 요구된다. 행정은 설화의 존재를 확인할 표지판 설치를 서둘러야 한다. 설화는 삭막한 도시를 벗어날, 또다른 무늬이자 향기다. 백현충 기자 choong@busan.com ※설화 내용은 인터넷 부산일보(www.busan.com) 참조
※취재 협조=부산 16개 구·군청 / 부산문화재단
부산일보-부산관광컨벤션뷰로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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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문진우 프리랜서·일부 구·군청 그래픽=부경대 홍동식 교수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