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년(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났었다. 삼포에서 일본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이다. 삼포란 부산포,, 염포(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지역), 제포(또는 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등을 말한다. 임진왜란의 82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심포왜란은 임진왜란을 알리는 징조였다.
조선 건국 당시 왜구는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집단이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물론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까지 골치를 앓게 하는 요소였다.
그런데 일본의 일부 다이묘(大名))는 왜구를 매수해서 전력을 보강하기도 했다. 여기서 다이묘란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를 말한다.
한편 조선은 이렇듯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는 왜구를 어떻게 대했을까? 1419년(세종 1년),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공격하게 명했다.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과 부산포와 염포 그리고 제포 등 3포를 개항하여 그곳에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이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유화책도 병행했다. 그 결과 왜구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건 임시변통이었다. 그 효력이 오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태가 더 나빠지게 하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정책이었다.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속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리석은 나의 생각이다.
조정에서는 일본인들의 숫자를 약 60명 정도로 제한했다. 그러나 무역이 성행하고 교류가 늘자 왜관의 일본인 수는 늘어나 세종 말년에는 거주자가 2,000명에 육박했다.
필연적으로 왜구의 준동이 빈번해졌다. 당시 일본인 중에는 행실이 불량한 자, 밀수를 하기 위해 들어오는 자 기타 범죄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거주하는 일본인이 많아지면, 조선인과 갈등이 빚어진다. 그리고 갈등이 심화된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을 ‘범죄자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으로 면세의 혜택을 주었는데, 이는 조선의 백성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특혜이었다. 그럼에도 어업 행위를 일삼는 자. 해적질을 하는 자, 조정의 공마선의 약탈이나 살인 등 범죄를 저질렀다.
조선에서는 이들이 괘씸하다.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다. 중종반정 이후 조정에서는 왜관의 일본인에게도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혜택도 하나씩 줄여나갔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했다. 그 결과 조선의 분위기는 강경하게 변해갔다. 불법 이민자요, 범죄자 집단인 일본인들을 압박하고 엄하게 다스리자는 방침으로 흘러갔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부당하게 범죄자를 다스린 사례가 있다. 바로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을 붙잡아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그 노끈을 활로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 공포에 떠는 일본인을 보며 즐기는 식의 놀이를 즐겼다. 주변의 조선 병사들도 그것을 좋아하며 따라 했다. 그런 행위가 전 군영으로 번졌다.
또 조선의 무관 소기파도 있다. 그는 재물이나 승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장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로 고령이었지만 활을 잘 쏘았다.
성종 때, 그는 함경도에서 여진족 소탕하는 등 전투에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삼포왜란 당시 웅천 현감으로 난의 진압에 참여했다. 삼포왜란 전에는 성실한 근무태도를 인정받아 중종은 그에게 몇 차례 포상을 하사했다.
그는 유능하고 성실한 무관이지만 그의 하는 짓은 조선인이 보기에도 끔찍하고, 괴물과 같은 면모로 비치게 되었다. 예를 하나 들면 일본인 시체 사이를 뒤지다가 살아 있는 자가 있으면 칼로 배를 갈라 피를 얼굴과 손에 바르고, 그 시신의 쓸개를 술안주로 삼기도 했다. 그는 ‘소야차’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일본인들도 조선 군인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괘씸하다고 여긴다. 자신들의 저지른 죄의 반성이나 배상에 대하여 사죄는 하지 않고, 대신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1510년 4월 4일(양 5월 11일)이다. 일본인 4,000명~5,000명 참여한 폭동이다. 각지에서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다. 부산포와 제포 등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동래성과 웅천까지 공격했다. 그 결과 조선 병사와 민간인 272명이 죽고, 민가 796호가 파괴되었다.
4월 13일 대마도 주가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내란을 선동해놓고는 확전을 염려했는지 모른다.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교활한 수법이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 ? ~ 1526)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한 끝에 물리쳤다. 이렇게 하여 전쟁 수준의 왜란은 15일 만에 끝났다.
삼포왜란 이후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이 왜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까?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남해안 지역의 지방관들이 ‘맡은 바 임무에 충성’하도록 수시로 단속을 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처럼 나중에라도 대비했을까? 어쩐지 고개가 좌우로 흔들어진다. 정쟁만 일삼는 국회의원 나리들을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