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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9 -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다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 황제!
로마 제국 요비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율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
원정중에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지 못해 퇴각하다가 기습당해 죽고, 군대의 추대로 근위대장
에서 황제에 오른 사람으로 8개월간 재위했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기록을 보면 암살된 듯 합니다.
요비아누스는 331년 싱기두눔 (베오그리드) 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그도 역시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되어 페르시아
원정에 종군하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으니 미남에 친절한 성격으로 키가 컸다고 합니다.
363년 6월에 황제가 된후 요비아누스가 먼저 했던 일은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했던 군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으니 페르시아 황제와 협상해 추격받지않고 돌아올수는 있었으나.....
그 대가로 앙카라와 티그리스 너머 로마 영토를 할양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의 종주권도 포기했습니다.
이런 조건으로 이루어진 퇴각은 로마인에게는 대단한 불명예로 간주되었으므로 요비아누스가
빠르게 인망을 잃는 원인이 되었는데,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굴욕적인
강화” 라는 무리수를 두며 빠르게 퇴각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요비아누스 황제는 퇴각 도중인 364년 2월 앙카라를 지나 다다스타나라는 곳에 차린 자신의
천막 안에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는데.....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로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요비아누스는 교회 헌금을 허용하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마술을 금지했으며, 어길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를 옹호했으니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은 테오도시우스 1세 때가 아니라 요비아누스의 치세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요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발레티아누스 1세와 발렌스 형제는 요비아누스의 큰아들
바로니아누스의 눈 하나를 멀게 해서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으며, 요비아누스의 아내는 살아남았지만 암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요비아누스 이름은 Iovis 에 라틴어 접미사 -anus 를 붙인 것인데 요비스(Iovis) 에게 속한자를 뜻하니 요비스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 (Iuppiter) 를 가리키는데, 사실 유피테르란 명칭은 '아버지 요비스 (Iovis pater)' 란
호칭이 단축된 것으로 '유피테르에게 속한 자' 가 그리스도교를 편들고 전통종교를 억압했던게 아이러니 합니다?
발렌티니아우스는 로마 48대 황제로 364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으며 여섯번째 세습왕조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창건자인데, 판노니아 속주 출신으로 병졸에서 장교를 거쳐 장군을 지낸뒤 황제에 오른 사람으로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본인은 서방을, 동생은 동방을 담당해 이민족들과 전쟁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발렌티니아우스는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의 아들로 321년 판노니아의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밧줄을 만들던 사람이었으나 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코메스 둑스의 지위까지
이르렀으니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자라면서 예술이나 고전도 배웠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앙키라에서 니케아로 달려왔고,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새 황제에게
공동황제를 지명할 것을 요구하니 발렌티니아누스는 친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합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제국 서방, 발렌스가 제국 동방을 통치하게 되니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데 필요한 준비를
마친뒤,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 서방인 밀라노로 향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제국 통치를 시작합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치세 대부분을 라인강 - 다뉴브강 변경 지대에서 보냈을 정도로 제국의 방어에
힘썼으니 초기~중기에는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알라마니족이 갈리아 변경지대를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 해안을 침략했으며..... 브리타니아에서도 소요사태가 발생합니다.
후기에는 다뉴브강의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 판노니아와 발레리아의 변경지대를 침략했으니,
황제는 알라마니족과 사르마티아족, 콰디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며 다갈라이푸스,
세베루스, 요비누스, 테오도시우스 등 장군들을 파견해 속주나 동시다발적인 침략에 대응합니다.
제국 내부에서 반란도 발생했으니 365년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은 발렌티니아누스의 정통성이 위협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369년 브리타니아에서 발렌티누스의 반란이, 372년 아프리카
에서 피르무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모두 대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 가 진압합니다.
한편으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변경 지대에 적극적으로 요새를 쌓고 보수하기도 했으니
황제가 세운 요새들은 적군을 감시하고 강을 순찰하는 선단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황제의 군사적 업적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국선변호사 제도인 '데펜소레스 플레비스' 를 조직해 농민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변호를 받을수
있게했고, 로마 백성에게 빵과 포도주를 공급했으며 양돈 농가, 광부 조합, 도시의 짐꾼과
소방대에 보조금을 지급했고 갓난아기를 버리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에 학교와 의료소를 세웠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중립과 관용을 지켰으니..... 희생 제의나 남을
저주하는 의식만 하지 않는다면 이교 제의를 수행하는 것도 허용하고, 사제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사제들이 과부에게 유산을 받거나 과부나 고아의 집에 분별없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합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역대 황제들은 늘 원로원과 신경전을 펼치고 대립했지만 그 중에서도
발렌티니아누스는 원로원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으니.....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반역법과 간통법를 활용합니다.
측근 막시미누스를 로마에 파견해 마술이나 간통 혐의를 빌미로 원로원 계층을 숙청했으며 원로원
의원의 특권이었던 고문 금지도 무시했는데, 황제 측근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원로원에까지 진입하니 원로원의 불만은 컸으며 로마 행정정책을 두고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그리스어는 잘 하지 못했지만 모국어 라틴어는 읽고 쓸줄 알았으며 고전도 습득했으니상식적이고
건강한 교양을 갖추었는데, 로마에 파견한 막시미누스는 비판을 엄청 받지만 변호사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세금을 철저하게 걷었지만 군비 충당 목적이 강했으니 황제 개인의 탐욕은 아닙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고 이재민이 발생해 정신없는 렙티스 마그나 주민과 도시에
제국에 세금을 못 내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역정을 냈는데, 로마누스의 고발을 받자 괘씸죄까지
적용해 렙티스가 보낸 사절단을 반역혐의로 십자가형 등 잔혹한 방법으로 도시 대표들을 처벌 했습니다.
이어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도 반역향 (反逆鄕) 으로 몰아 혹독한 처벌을 가했으니,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이탈리아로 역이민하거나, 근처 도시로 대피했고, 도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쇠락하게 되는데, 훗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억울함을 해소해 주면서 끝납니다.
375년 겨울 황제는 콰디족 사신단을 만났는데, 사신들은 "변경을 약탈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떠돌아 다니는 도적떼이며, 우리 영토에 먼저 요새를 세운 것은 당신들이지 않느냐" 고
변명하니 분노한 황제는 사신단에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다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집니다.
신하들은 급히 의원을 찾았으나 황제가 역병에 걸린 병사들을 치료하라며 다른 데로 보내 의사
가 없었다는데.... 뒤늦게 의사가 왔으나 황제의 병을 나아지게 할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날 54세 나이로 사망하니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 사도 성당에 안장됩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최후의 서방 대제' 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카리스마 넘친 군인황제였으니.....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두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제국을
안정시켰고 연이어 쳐들어 오는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변방 지역들에 요새를 세워 대비했습니다.
그의 치세는 서로마 제국이 마지막으로 강대했던 시기이며.... 375년 사망한후, 발렌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삽질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와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동서
로마 야전군이 함께 궤멸당하면서 특히 서로마 제국과 야만족간의 역학 관계가 급변합니다.
첫번째 부인 마리나 세베라는 황제가 되기 전에 결혼했는데 370년경 이혼하고 두번째 부인 유스티나와 재혼
했으니, 세베라 황후와 유스티나는 아는 사이였는데 함께 목욕을 했고 황후는 별 생각없이 황제에게
"유스티나는 참 아름답다" 고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얼마나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싶어졌다고 합니다?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고,
딸 플라비아 갈라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황후가 되었으나 셋째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했으 며 나머지 두 딸 그라타와 유스타는 보아 요절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키가 크고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발에 잿빛 눈이으로 다혈질이었으니, 마르켈리누스는 황제가
전쟁에는 신중하며, 기억력이 좋은데다 글씨를 잘 쓰고, 새 병기를 고안하는 것을 좋아하며
방탕하지 않았으나 욱하는 성격과 잔인했으니 곰 두 마리를 키우면서 죄인을 잡아먹게 했다고 합니다.
후임 발렌스는 364년부터 378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니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
공동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제국 동방을 다스렸는데 형이
375년 사망한후 조카 그라티아누스와 공동황제가 되어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게르만 고트족이 훈족을 피해 발칸 반도에 들어오는걸 허락했으니..... 서고트족이 로마
관리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고
했다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의 지도자인 프리티게른에게 참패하고 전사합니다.
발렌스 황제는 328년 판노니아 남부 키발라이에서 태어나..... 형 발렌티니아누스과 함께
군대에 입대해 오랫동안 복무했는데, 형이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아 스쿠타리
(Scutari) 의 지휘관이 되아 명성을 떨쳤지만 발렌스는 이렇다할 공직을 맡지는 못했습니다.
서기 363년 6월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사한후 근위대장 요비아누스가
즉위해 원정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다가 364년 2월 다다스타나의
자신의 천막안에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는데 중독사였지만 암살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364년 2월 새 황제에 즉위한후 동생 발렌스를 제국 동방 황제로 선택하고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했으니, 두 황제는 시르미움에서 각기 밀라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났는데, 점임
황제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중에 모였던 관리들과 장군에 군단도 동서 양 제국에 분배되었습니다.
발렌스가 선택받은 이유는 형을 존경하고 지시에 순종하는 성격이어서 공동황제 체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황제 간의 권력 투쟁이 발생할 소지가 적었고 그리고 발렌스는
군대 및 관료를 통제하고 제국을 유지시킬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동방을 맡은 발렌스는 페르시아 국경 지대로 향하던중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전임 율리아누스 황제의
이종사촌 프로코피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때 북로군을 지휘했고 요비아누스가 율리아누스 후계자로 지명되었을때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와 발렌스 즉위후 프로코피우스는 추적을 피해 숨어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잠입해 트라키아 방위를 담당하기 위해 잠시 수도에 주둔하던 2개 군단을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킨뒤 관리들을 감금하며 아나스타시아 목욕장에서 황제를 칭합니다.
프로코피우스는 전 트라키아 지방을 장악하고 전 황제 요비아누스 휘하 가신들을 포함 유력 인사들을
끌어들였는데,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에 경악했으니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에 프로코피우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거나 심지어 자결까지 고려했다고 합니다.
신하들의 간청으로 반역자와 맞서 싸울 용기를 얻고는 요비아 군단과 빅토르스 군단을 파견해
프로코피우스를 토벌하게 했지만 오히려 그들마저 프로코피우스의 회유에 넘어갔으며,
프로코피우스는 루미탈카 장군을 파견해 니케아를 장악했고 비티니아 마저 수중에 넣었습니다.
프로코피우스의 친척 마르켈루스는 키지코스를 함락하고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지배했으며 또한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트족으로 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는데.... 그러나 반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으니
발렌스가 충성심이 뛰어난 장군들이 이끄는 대군을 파견하자 반란군 내부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반란군 장수들은 발렌스에 투항하거나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프로코피우스도 티아티아전투와 나콜리아
전투에서 배신으로 패배한뒤 366년 5월 거열형을 당해 찢겨죽었으며 머리는 트리어에 있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보내졌는데, 연좌되지는 않았는지 친증손자가 서로마 말기 황제 안테미우스 입니다.
프로코피우스를 배신했던 이들은 발렌스황제에게 보답받을거라고 회유받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니 그들의
최후는 톱으로 썰려 죽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교 윤리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혹형이 만연했는데, 동로마는
8세기 초중반 레온 3세 이후로는 금지했지만 서유럽 국가들은 기독교화 이후로도 오랫동안 혹형이 계속됩니다.
프로코피우스의 친척이자 반란에 가담했던 마르켈루스는 칼케돈(이스탄불 콰디쿄이) 을 지배한채
고트족의 지원을 받아가며 발렌스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일리쿰 주둔 로마군
지휘관 에퀴티우스에게 죽었는데, 하지만 발렌스는 단순 가담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고트족 3만여명은 반란이
실패하고 프로코피우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자만..... 본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트라키아를 침략하며 지방의 농장과 포도밭을 약탈합니다.
367년 봄, 발렌스는 다뉴브강을 건너 고트족을 공격했고 고트족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도망쳤지만 로마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습니다.
369년 발렌스는 노보두눔에서 강을 건너 고트족과 맞붙은 끝에 승리를 거뒀으니
아타나리크는 평화조약을 맺어줄 것을 간청했고.... 발렌스는 동의해
고트족은 로마와 상품을 교환하고 장정들을 해마다 로마로 보내 용병으로 쓰입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2세는 전임 요비아누스로 부터 아르메니아 왕국을 포기하겠다는 약속대로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국왕 아르샤크 2세를 붙잡았고 그 아들 파프를 367년 아르토게라사 요새에서
포위하니 368년 봄, 파프는 요새를 탈출해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과 싸우던 발렌스에 합류합니다.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후 발렌스는 파프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장군인 아인타이우스
를 파견해 성사시키니, 샤푸르 2세가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프를 축출했고
파프는 탈출했다가 370년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습니다.
371년 봄, 로마군은 이베리아를 되찾고 아르메니아를 수비하기 위해 테렌티우스 장군의 더 많은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해 페르시아군과 로마군이 맞붙었으니, 371년 로마군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샤푸르 2세가 페르시아 동쪽 국경 지대를 침략한 이민족에 대처하느라 5년간 전쟁이 중단됩니다.
아르메니아 국왕 파프가 주교 네르세스를 처형하고 에데사를 포함한 로마인이 거주하는 도시들에 지배권을 요구
하는등 고압적으로 나오자 윤관이 여진족 추장 수백명을 화해의 자리에 초대해 술에 취하게 한후 살해했듯,
374년 테렌티우스 장군이 파프를 연회에 초대한뒤 죽이고 새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바라즈다트를 선임합니다.
375년 11월 17일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판노니아에서 사망하니.....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는 판노니아 제국군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발렌스는 동방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해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려는 중에 발칸반도에서 이변이 벌어집니다.
서기 376년, 도나우강 이북의 고트족은 훈족의 압력에 못이겨 로마제국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니, 아타나리크
와 프리티게른은 발렌스에게 제국이 고트족의 도나우강 이남 거주를 허락해준다면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이나 다른 적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포이데라티(외원군) 가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고 제안합니다.
발렌스는 고심 끝에 지난날 제국을 침략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아타나리크와 휘하 고트족은
받아들이지 않고, 프리티게른과 그의 추종자들만 제국내로
진입하게 했는데 그러나 아타나리크 휘하 고트족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제국으로 진입합니다.
프리티게른과 고트족 병사에 가족등 20만명은 도나우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에 정착하니 발렌스는
속주 관리들에게 고트족을 지원하라 명했는데, 모이시아의 총독 루피키누스와 트라키아의 총독
막시무스는 이주해온 고트족을 착취하고 발렌스가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물자와 돈을 착복합니다.
그리고 고트족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고 저항하는 고트인들을 멋대로 살해하니 고트족 족장들은 회합을
가지고 제국에 항의하려 하자,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자신들의 악행이 황제들에게
알려질 것을 우려해 프리티게른등 고트족 족장들을 연회에 초대해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합니다.
프리티게른은 고트족 족장들과 반란을 일으키니 루피키누스 1만명 로마군이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프리티게른
의 5천명 고트족과 맞붙었으나 패배를 당해 목숨을 잃었는데, 동방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 준비로 동부
국경에 배치되었으니 고트족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2년간 발칸 전역을 휘저으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발렌스는 서방 황제이자 조카인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니 그라티아누스는 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때마침 게르만족이 라인강을 대거 도하했기 때문에 맞서 싸워야 해서 출발하지
못하고..... 프랑크족 출신 부하 프리게리두스와 리코메르 등 장군들이 우선 동방으로 파견됩니다.
로마군은 아드살리스전투에서 동방 트라야누스와 서방 리코메르 지휘를 받으며 고트족과 접전을 벌였는데
양쪽 모두 피해가 막심했고 승부는 나지 않은지라 고트족의 기세는 잠시 주춤하니,
발렌스는 시리아 정예부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떠나 378년 5월 3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합니다.
378년 7월, 발렌스는 서방 로마군 소속 이탈리아 군대를 지휘한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하니 세바스티아누스는 트라키아군을 재편성하고 2천명
기병대를 이끌고 고트족을 습격해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축출합니다.
그라티아누스는 서방 로마군 정예부대를 판노니아로 진출시키다가 라인강에서 알레만니족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소환해 아르겐타리아 근교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으니
그라티아누스의 합류가 늦어졌고, 발렌스는 적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단독으로 고트족과 맞붙기로 결심합니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는 2만명 내외의 로마군을 이끌고 하드리아노폴리스(튀르키에 에디르네) 성문을
나서 트라키아에서 남하하는 적군을 찾아 서북쪽으로 행군해 고트족이 짐수렐르 둥글게 세워
놓은걸 발견하는데 고트족의 한 부대였는데 우익이 중앙과 좌익이 도착하기 전에 그만 공격에 나섭니다.
고트족 1만 5천명과 맞붙었던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프리티게른의 절묘한 지휘에 휘말려
1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발렌스 황제는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장례도 치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발렌스가 부상을 당한채 작은 오두막집으로 옮겨졌다가 고트족에게 산채로 태워져 죽었다고
하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 발렌스가 마을에 숨어있다가 불에 타 죽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황제의 가운을 벗은후 전장터 한가운데로 달려갔다가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고 기록했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패배는 제국에 큰 해를 초래하긴 했지만 그외는 나쁘지 않은 무난한
황제였으니, 사치를 멀리했고 성실하여 비난을 받을 여지가 없었으며 국정에 대한
책임감도 강했으니 장군의 자질은 별로였지만 그렇다고 시기 질투를 일삼는 졸장은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행정의 달인이었지만 의심, 시기, 질투가 강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고,
형 발렌티니아누스는 장군으로 유능했으나 욱하는 성질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발렌스는 이런 일화가 없고 율리아누스의 궁정 개혁정책도 답습해 좋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고트족과 전쟁에서 유능한 군인 황제였던 조카와 합류하여 고트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면
본인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로마의 역사까지도 크게 달라졌겠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판단 착오가 형 발렌티니아누스 그리고 본인이 쌓아온 노력마저도 모두 앗아가버렸습니다.
발렌스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형 발렌티니아누스와 달리 아리우스파를
신봉하였지만, 특유의 무난한 성격 덕분인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들과
성직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한 딱히 아타나시우스파등 다른 종파를 탄압하지는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에 그의 이름을 딴 수로를 건설했으니 트라키아 산골짜기에서
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까지 물을 끌어오는 발렌스 수도교는 자체 길이가
971 m 이고 수도교를 포함하는 전체 수도 길이는 250km 정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