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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의 유형문화재
경희궁 흥화문(19호) 신문로2가 일반 2-1
흥화문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으로,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하였는데 경복궁을 북궐(北闕)이라 하고 창덕궁을 동궐(東闕)이라 하듯이 이를 서궐(西闕)이라 하였다. 본래는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일제 때인 1910년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서울중고등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이문은 남아 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에 이전되어 정문으로 삼았는데 박문사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손에 죽은 침략자 일본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당이었으나 현재 신라호텔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어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88년 원래의 위치와 향(向)이 다르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기기국 번사창(51호) 삼청동 28-1
이 건물은 1984년 해체보수공사 때 별견된 것으로 사사(司事) 이경직(李庚稙)이 찬(撰)한 상량문에 의하면 고종 21년(1884) 6월 9일에 건축된 바 조선시대 말 근대식무기를 제작하던 관아(官衙)인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기기창(機器廠)건물이다. 현재까지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무기고(武器庫)인 만큼 그 보존의 뜻이 크기 때문에 유형문화재 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병기고의 명칭을 번사창(飜沙廠)이라 하는 이유는 "번사"가 흙으로 만든 주형(鑄型)에 금속용액을 부어 주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사옥(131호) 세종로 139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1920년 4월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초창기에 화동의 중앙학교 시설 일부를 빌어 사무를 보다가 1926년에 전용사옥을 지었다. 1920년대에 유행한 돌출된 창(bay window)을 사용한 이 건물은 일본에서 건축의 기본설계를 하였는데 나카무라 마코토[中村誠]가 수정하여 완성하였다. 완공 당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벽돌조를 혼합한 양식이었으나 뒤에 고쳐 지어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이다. 2002년부터 일민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면서 내부의 본래 모습은 많이 변하였지만 외관은 잘 보존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24호) 세종로동 1
원래 경주 남산(南山)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27년 총독부 관저가 신축되면서 옮겨진 것이다. 얼굴은 풍만하며 나발(螺髮)과 육계(肉계)가 있고 눈꼬리는 약간 치켜졌으나 아래를 보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다.
석파정 별당(23호) 대원군 별장 홍지동 125
이 건물은 창의문(彰義門)밖에 부암동 고개에 있는 조선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부속 사랑채인데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 세운 별장을 대원군이 빼앗았다는 설이 있으며 석파(石坡)는 대원군의 아호(雅號)이다. 부재와 만든 솜씨가 훌륭하며 조선상류사회의 대표적 사랑채로서 1958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이 곳에 가옥을 지을 때 석파정 경내에 있었던 이 집을 현 위치로 이축(移築)하였다. 손재형이 살기 위하여 지은 집은 이 별장 아래에 도로변 개울을 따라 따로 따로 두채를 세웠는데 지금은 별장 바로 아래채만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 별장을 관리하고 있다. 기존 ‘대원군별장’명칭이 ‘석파정’으로 오인하게 하여 석파정과 석파정 내에서의 유적의 성격인 별당을 명시하였다.
석파정(26호) 부암동 산 16-1
석파정(石坡亭)은 철종과 고종대에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이 경영한 별서(別墅)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삼았다. 석파정 서북쪽 바위 앞면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글씨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한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 대원군은 이곳의 앞산이 모두 바위에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한양 도성의 명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현재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의 건물들이 있다.
선희궁터(32호) 신교동 1-1
이 궁터(宮址)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후궁(後宮)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하던 왕실의 사묘(祠廟)로서 지금도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있다. 영조 40년(1764) 영빈 이씨가 별세하자 영조41년(1765)에 시호(諡號)가 의열(義烈)이라 높이 추증하고 사묘를 이 곳에 세워 의열묘(義烈廟)라 부르다가 24년 뒤인 정조 12년(1788)에 선희궁이라 개명하여 다시 격을 높였다. 사묘가 궁으로 개명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그 이후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선희궁(宣禧宮)"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승동교회(130호) 인사동 137
인사동에 자리잡고 있는 승동교회(시도유형문화재 130호)는 초기 개신교 교회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1904년 지어진 이 건물은 지하1층 지상 2층의 200여평 규모로 단아한 외형과 내부의 부드러운 둥근 아치가 마음을 끈다. 승동교회는 3ㆍ1 운동 당시 서울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거사 전날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곳이다. 설계자는 YMCA 회관 등을 설계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고든이 담당했다.
안양암석감마애관음보살상(122호) 창신동 130-2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석감의 좌우에는 중앙에 앙련이 조각된 팔각기둥이 세워져 있어 전각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으며, 현재 무릎 부근에는 불단을 설치하여 무릎 이하 부분이 가려져 있다. 불상의 양식은 묵중하여 전체적으로 괴량감을 느끼게 한다. 조각선은 그리 깊지 않지만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가 안정되었으며, 특히 넓고 각진 어깨로 인하여 중량감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말-조선초기 서울 홍은동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이나 안암동 보타사(普陀寺)마애여래좌상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다 형식화되긴 했지만 조선말기 서울지역의 마애불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22호) 무계정사지 부암동 319-4
암벽에 횡으로 "무계동(武溪洞)"이란 각자가 있어 이곳이 조선조 초 세종대왕의 셋째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정자였던 무계정사의 유지(遺址)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園)에서 놀고나서 그곳과 같은 자리라 생각하여 산정(山亭)을 세우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로 현재는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영조 23년(1747)에 김재로(金在魯)(1682~1759)로부터 "안평은 다만 글 잘하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禍)가 되었을 뿐 어찌 왕이 되겠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있었겠습니까.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주고 다시 베푸시길를 바란다."는 상소를 올려 신원(伸寃)되었다. 안평대군은 평소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서가 1만권이나 되었다 한다. 세종(世宗)의 능(陵)인 영릉(英陵)의 신도비(神道碑)도 그의 글씨이다.
오운정(102호) 세종로동 1
경복궁 후원에 위치한 정자로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측면 1칸으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4분합문을 설치하였다. 초서(草書)로 쓴 현판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우암 송시열 집터(57호) 명륜1가 5-99
1984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이 암벽각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의 친필(親筆)로 글자 하나의 크기가 가로 50cm, 세로 60cm 정도이며 암벽 표면으로부터 깊게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우암구기(尤庵舊基)라는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으며 송시열이 살던 옛터이다. 송시열은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뒤에 효종으로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기도 하다. 효종이 부왕(父王)인 인조가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씻으려고 북벌(北伐) 계획을 하자 송시열은 이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각자에서 송시열은 중국 춘추시대 유학자인 증자(曾子)와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사상을 계승하기 위한 확고한 마음가짐을 증주벽립으로 나타냈다.
정업원 터(5호) 숭인동 산 3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뒤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80평생을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정업원(淨業院)의 옛터이다. 비각(碑閣)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무익공계 양식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각 현판의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峰後巖於千萬年)'과 비석의 '정업원구기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는 영조의 친필이다.
조계사대웅전(127호) 수송동 44
국내 최대의 대웅전, 그리고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조선후기 전통목조건축의 백미(白眉)로 찬사 받는 조계사 대웅전은 건축사적 의미 이외에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죽음을 불사한 채 정화운동에 매진했던 동산, 효봉, 금오, 청담 큰스님 등 수많은 청정비구, 비구니들 그리고 신도들의 물러섬 없는 기백이 살아 숨쉬는 한국 불교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천교(普天敎)의 법당(法堂)인 십일전(十一殿)을 1938년에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다포 양식에 해당한다. 내부의 불단에는 도갑사(道岬寺)에서 옮겨온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 뒷벽에는 대웅전을 옮겨 지을 때 그려진 후불탱화(後佛 畵)가 걸려 있다.
종묘 어정(56호) 훈정동 66-5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6호. 심한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는 이 우물은 둥근 모양으로서 우물 속은 화강석의 사각형 돌로 쌓아올렸다. 석축은 각 단마다에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원형으로 맞추어 다른 석축이 튼튼히 지탱할 수 있게 하였다. 우물 꼭대기에 땅과 맞닿는 부분은 네모진 장대석(長臺石)이 정자(井字) 모양으로 놓여 있다. 1985년에 보수하여 그 위에 새 돌을 사용하여 높게 모양을 만들었다.조선시대에 역대 임금이 종묘에 제사할 때, 이 우물물에 적시었으므로 옛날부터 어수우물로 봉해져 내려왔다고 하는데, 석축의 방법과 석재의 닳은 정도로 보아 상당히 오래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9호) 화동 2
왕가의 왕가(王家), 종실(宗室), 제군(諸君) 관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하나로, 역대 선왕(先王)의 어보(御譜)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선원제파(璿源諸派)와 종실제군(宗室諸君)을 통솔 감독하였다. 1433년(세종 15) 제군부(諸君府)를 고친 이름으로, 1864년(고종 1) 종부시(宗簿寺)를 합하고 1894년(고종 31) 종정부(宗正府)로 개편하였다. 1905년(광무 9)에 종부시로 고쳤다가, 1907년(융희 원년) 업무를 규장각(奎章閣)으로 옮겼다. 원래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맞은편에 있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그리고 두 건물을 연결하는 익랑(翼廊)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2동의 명칭이 경근당(敬近堂: 대군, 왕자군의 대청)과 옥첩당(玉牒堂: 종정경의 대청)으로 새롭게 밝혀져 건물명을 명시하였다.
천도교중앙대교당(36호) 경운동 88
본 건물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건립계획하여 일본인 중촌흥자평(中村興姿平)이 설계하고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였다. 1918년에 착공하여 1921년에 완공을 하였으며 총건평 280.68평으로서 당시 3대건물(三大建物) 중의 하나이다. 전체적인 평면형(平面形)은 마치 이집티안 크로스(Egyptian Cross)처럼 되어 있으나 기독교 교회당의 평면과는 다른 하나의 강당(講堂)으로서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으나 비교적 독특한 의장수법(義匠手法)을 지닌 건축물로서 한국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이다.
침류각(103호) 세종로동 1
경복궁 후원(後苑)에 위치한 누각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몸채에 좌측과 우측 전·후로 1칸씩을 돌출하였고 몸채 전면에는 툇간을 조성하였다. 좌측에는 2칸의 대청마루가 있고, 우측에는 3칸 규모의 방이 있으며, 방 전면으로 누마루가 돌출되었다.
탑골공원 팔각정(73호) 종로2가 38-1
원래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 연주소 시설이었는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벌였던 3·1운동의 발상지이다. 팔각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건축가인 심의석(沈宜碩)에 의해 건축되었다. 건물 내부의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공간을 형성하며 기둥열이 구성되어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지붕상부에는 2단의 절병통을 놓았다.
홍지문 및 탕춘대성(33호) 홍지동 산 4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워 탕춘대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함에 따라 숙종은 성을 축성하기로 했다. 원래 탕춘대성이 있는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홍지문을 거쳐 수리봉까지 이어진 4㎞ 정도이다.
황학정(25호) 사직동 산 1-1
황학정이 있는 이 곳은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 중의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의 터로서, 원래 이 황학정은 대한제국 고종 광무 2년(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내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현 위치로 이건(移建)한 것이다. 황학정은 한말(韓末)에 마지막으로 시도되었던 궁술연마장(弓術鍊麻場)으로 본래의 위치를 바꾸긴 하였으나 현 위치 또한 등과정(登科亭) 옛터이므로 등과정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