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신 신앙(山神 信仰)
국토의 70% 넘는 산을 갖고 있는 산악지형인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 사상이 있었다.
이러한 산신신앙은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이 있고 그것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원시신앙인 정령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에 오른다’고 하지 않고 ‘산에 든다’고
표현하는 것도 산에 대한 외경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도 산악 숭배와 함께 전국 곳곳에 산신을 모신
산신당이 있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불교가 재래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 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부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산신신앙이 생겨났다.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며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이다.
신도들에게는 건강 부귀 영화 질병 소멸을 들어주는 대상으로 받든다.
칠성신이 수명장수를 들어준다면 산신은 건강과 재물을 들어주는 것이다.
불교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만 사찰에 별도의 전각인 산신각을 두고 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과 결합했음을 보여준다.
산신숭배신앙은 천신신앙과 같은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은 천신에, 환웅은 산신에 해당된다.
산신은 곧 천신의 대행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은 나라를 세운 개국주나 용맹스런 장수들이
사후에 산신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명산을 정하여 호국신으로 숭배하였다.
이는 단군신화에서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과 신라 헌강왕 때 북악신이 나타났다거나
경덕왕 때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에 제사드린 사례가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 때 역시 덕적산. 백악 송악 목멱산 등 사악(四岳)을
무녀로 하여금 봄, 가을로 대제를 올리게 했고
대악(大岳)이라고 해서 지방관원과 민간인에 의해 제사케 했다.
이는 산신신앙이 그만큼 강했음을 뜻한다.
한편 마을에서는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수호신으로 받들면서
그 지역을 성역화 하였다.
산신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서 그 성(性)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선도산 성모’ ‘치술산 신모’ ‘지리산 위숙 성모’ ‘가야산 정견모주’
‘영취산 변재천녀’ ‘운제산 운제성모’, 김유신에게 나타난
골화. 나림. 혈례 등의 산신은 모두 여성이었다.
민간에서 일찍부터 신앙하던 산신을 여성으로 생각한 것은,
여성의 회임과 출산에 따른 생산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토지신이나 곡신을 여성으로 상상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사고였다.
박혁거세의 모후를 선도산 성모로 상정하고 신라의 수호신으로 믿은 것이나,
고구려의 주몽왕의 모후인 유화를 수신(邃神)이라 하여
곡물신으로 숭배한 것은 같은 의미를 띤 신화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합리주의에 의하여 산신은 남성적 존재로 변하고
산신숭배도 왕조보존을 위한 호국사상의 형태로 바뀌었으며
산신각에 모시는 산신도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산신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고명석(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과장)씨는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이행하고 남자의 권위가 커진데다
가부장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는 유교,
신선의 삶을 그리는 도교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산신은 지방 설화 주인공의 출생지로 인정되어
일정한 지역이 문화의 발상지로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관령 산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산문을 개창한 범일 국사다.
환웅은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으며,
단군은 구월산(혹은 아사달)산신이 되었고,
수로는 구지봉의, 해모수는 웅심산의 산신이 되었다.
신라 6촌장은 표암봉과 형산 산정에 하강하여 박혁거세를 맞이하였고,
탈해왕은 토함산에서, 사소성모는 선도산에서 여산신으로
각각 숭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산신신앙 의례는 고사(古祀) 등 각 가정에서 행하던 신앙과
산신제 또는 도당제(都堂祭)등 마을을 번영과 안녕을 비는
공동체적 의례로 나눌 수 있다.
각 가정의 신앙은 후사를 얻기 위한 기자치성을 드리러
산을 찾거나(山川祈禱) 절을 찾아 치성 불공(佛供)을 드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신앙형태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산신제나 도당제 역시 예전보다는 많이 약화됐지만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산을 성스럽게 여긴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명산에 명찰을 지었다.
이렇듯 산에는 신이 있고 그 신이 인간을 보호해준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우리민족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불국토 사상과 결합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앙에
각각 1만씩 오만의 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신앙은
신라가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라는 사상에서 나왔다.
법기보살이 일만 이천의 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금강산,
부처님이 계시며 불법을 설한 영축산은 모두 명산에다
불교의 불국토 사상을 대입한 것이다.
명산에 유서 깊은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도
불국토 사상이 만연하던 통일신라시대부터다.
불교의식인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33년에 시작된 전통적인 산천제를 계승한 것으로서
양생(陽生)하는 중동(仲冬)에 가무백회로 국태민안을 위해 행사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도산 성모설화는 고대의 산신신앙이
불교와 신선사상이 융합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산악신앙이 독립된 신앙으로 발전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다.
처음에는 호법신중 104위 중의 하나에 속하며
다른 신중들과 마찬가지로 중단에 봉안된다.
여러 호법신 중의 하나이던 산신은 조선중기 이후 별도의 전각에 봉안된다.
호법신중 신앙이 토착신앙과의 결합을 의례로써 뒷받침 한 것이
1724년(경종4년)에 성능(聖能)이 우리나라의 토속신앙 형태와 융화시켜
새롭게 편찬한 ‘자기문절차조례(仔夔文節次條例)’이다.
이 속에는 수륙제를 행할 때 받들어 모시는 옹호단의 배치와
자기문 목규(目規), 재의 절차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민족 고유의 신앙이 불교에 적극적으로 흡수된 데는
당시 시대상황과 불교의 적극적 정책에 따른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불교도 오랜 억불정책으로 인해 스님들은 산중으로 숨어들거나
민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고승들은
민간 신앙을 적극적으로 흡수한다.
이는 불교가 오랜 핍박으로 인해 선(禪) 중심에서
선 교 염불 진언 등 회통불교로 전환하면서
수행체계가 혼란을 겪은 것도 한 몫 한다.
즉 불교 수행 교리 체계의 정통성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다
민간의 요구와 불교 스스로 민간 속에 스며들어가야할 이유가 겹쳐
민간의 신들이 불교 속에 들어온 것이다.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등
삼성신앙(三聖信仰)이 모두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은 이 같은 이유다.
이 당시 지은 산신각은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다.
만해 청담 성철스님 등은 비불교 요소인
칠성각 산신각을 허물어야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철폐 운동을 벌일 정도로 이들 민간신앙은
현재 우리 불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석문의범〉 등 불교의식집에 보면 산신을 숭배하는 의식문이 버젓이 들어있다.
무엇보다 산에 절을 지으면서 산신각을 짖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라는 것은
산신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말해준다.
민속 신앙이 불교와 결합한 것에 대해 김현준(사찰문화연구원 원장)씨는
“마음을 맑히고 해탈을 구할 것을 가르치는 출세간적 스승인 부처님 보다는
재물을 주는 산신,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께 직접 공양하고 기도하는 신앙의 분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김현준씨는 “문제는, 신앙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은 만큼
비록 구복의 차원에서 선 기원일지라도 기도가 삼매를 이룬다면
큰 힘과 함께 마음을 맑힐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신제는 과거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있는 가하면
최근 들어 새로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 한국전쟁 등 사회격변으로 인해
사찰에서 지내던 전통이 단절된 가운데 전통을 잇고 있는 사찰도 꽤 된다.
대표적인 곳이 민족의 명산으로 꼽히는 계룡산 내에 있는 신원사다.
신원사에는 국조신을 모시며 산신제를 지내는 중악단이 있다.
중악단은 조선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해 1394년(태조3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제단이다.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가 중심이 돼 매년 음력 3월 15일 전후 주말 4일간
계룡산 신원사 일원 및 중악단 등에서 진행한다.
계룡산 갑사가 음력 정월 초삼일 마을 주민들과 지내는 괴목대신제도 유명하다.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이 산신제는 역사가 1000년이 넘었다.
전북 부안 내소사는 정월대보름 전날 지역주민과 함께
사찰 일주문 입구에 선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는 당산제를 올린다.
최근엔 경내에 심어진 당산나무에서 스님들이 정월 당산제를 올리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산신제의 일종인 당산제를 사찰이 중심이 돼 진행했지만
이후 사찰이 멸실되거나 전통이 단절되면서 마을 주민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전남 영광 불갑사 앞
모악리 앵곡마을 삼정자 당산제다.
불법승 삼보를 의미하는 삼정자 나무는 이 마을 사람들의 귀의처다.
반대로 미황사 앞의 전남 해남군 송지면 동현리의 당제는
마을 주민들 중심에서 근래 들어 사찰이 제주로 나서 진행하는 경우에 속한다.
동학사는 93년부터 매년 4월 중순 개최하는 동학사 봄꽃 축제에서 산신제를 연다.
이는 사찰이 나서 산신제를 새로 만든 예에 속한다.
산신탱화는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탱화의 중심인물이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여자 산신이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진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등의 사찰에는 할머니의 모습을 한
여자산신탱화나 소상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속리산 천황사,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의 산신탱화와
계룡산 동학사의 산신상 등이다. 이 경우 할머니는 트레머리에 댕기를 둘렀으며
치마 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걸터 타거나 기대고 있다. 손에는 반드시 불로초를 들고 있다.
남자 산신탱화는 도교 유교 불교적인 것의 세 종류로 대별된다.
도교적 산신탱화는 백발의 수염에 머리는 벗겨지고
긴 눈썹이 휘날리는 신선의 모습이다.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산신의 뒤쪽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상
징으로 묘사했다.
유교적 산신탱화는 머리에 복건이나 유건 정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의 산신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책거리나 대나무 등의
장식물 차를 달이는 도구가 있다.
불교적 산신탱화는 삭발한 스님이 〈법화경〉 등의 불경이나 단주를 들고 있다.
변형된 가사를 입고 있다. 호랑이와 시봉으로 동자승이 등장한다.
박부영 기자
[불교신문 2013호/ 3월12일자]
첫댓글
독성각(獨聖閣)
사찰에서 스승없이 홀로 깨친 독각의 성자를 봉안하는 불교건축물.
독성은 독수선정(獨修禪定)하여 도를 깨달은 자로서,
일반적으로 독성각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봉안하는 것을
통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독성신앙에 특유의 단군신앙을 가미시켜
새롭게 수용하고 전개시켰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인 독성탱화(獨聖幀畫)를 모시게 되는데,
사찰에 따라서는 탱화만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독성각이 토속신앙과의 접합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널리 건립되어 사찰의 한 당우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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