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3:1~11)
유다에 두 왕이 존재하지만
다윗은 흥하고 사울 계열은 망하고 있다.
사울의 유일한 생존 아들 이스보셋을
바지 사장처럼 앞에 세우고
실제 권력을 누리는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잠자리를 한다.
이스보셋이 그 일을 지적한 것을 시점으로
사울 계열은 자중지란이 일어난다.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내밀한 자기 욕구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떤 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일들은
결코 선량한 열매를 맺기 어렵다. 맺을 수 없다.
동기가 순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synchronized 되지 않으면)
나쁜 결과가 나온다.
물론 열매가 가시화 되는 시점은
가변적이나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분명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 깨닫고 있는 만고불면의 '자연법'이다.
이런 자연법의 존재는
곧 하나님 존재의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간약한 인간이
그런 장착된 기재를 스스로 속이면서
범죄를 유지하며 살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산 결과는
오늘 본문의 사울 계열처럼
자중지란, 바람의 날리는 겨와 같은
결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도 끝까지 고집하고 버티면
(=변화하지 않으면)
마지막 시점에는 냉철히
흑과 백의 논리처럼
의인과 죄인으로 최종 판정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
반면
오늘 본문의 숨은 의미 속에는
앞으로 다윗이 당할 복선이 깔려 있다.
그의 아내가 4명이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두 이곳 헤브론에서 얻은 것이고
이는, 라이벌 이스보셋을 견제하기 위한 인간적인 방법이다.
이로 인해 다윗은 앞으로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을 것이다.
어찌 보면,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같이 굴곡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두 같다!'라고 물타기 하며 넘어갈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꿈틀거리는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다윗이 앞으로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고
그 고난의 원인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범죄나 자신이 취한 인간적 방법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 때문에 자신을 포가히거나
내팽겨치듯 하지 않고 잘 추스려
하나님께 거침 없이 옷을 찢듯 처절히 회개한다.
죄인들은 그렇지 않는다.
사람에게 누구나 죄성이 있고, 연약하여
굴곡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분투의 과정, 투쟁의 과정을 통해 끝까지 걸어갈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그의 미시적 삶은 굴국 뿐이지만
거시적 삶의 그래프는 결국 우상향의 곡선을 그리고 있다.
어디로? 천국 백성의 마땅한 자격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