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유론과 사유론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서 토지가 국유였는가 사유였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전체의 구조를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의 연구자들은 근대 이전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귀속된 것으로 보았다. 1920년대에 일본인 와타 이치로에 의해 제기된 公田制 (=토지국유제)는 그 뒤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어 거의 정설화되다시키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삼국이전의 토지제도는 族制(족제)조직을 기초로 하는 공유제였다. 원시 이래의 토지공유제를 국가적 규모로 확대하여 토지국유제를 확립한 공전제에서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고, 관료와 功臣에게는 收組權(수조권)을,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는 경작권을 나누어준 데 불과하며 토지 자체를 지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사유지가 존재했더라도 이는 불법적이고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와타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을 합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의 기초로 강력하게 창출된 것이었다.
토지국유론은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연구에서 더욱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백남운은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토지국유제를 이론화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토지국유제 또는 공전제는 다분히 피상적인 관찰의 경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토지사유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토지 사유의 구체적인 실례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 연구또한 토지국유론의 비판에는 충실했으나 사유의 내용을 밝히는 데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사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토지사유론을 인정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토지소유권의 구체적인 사례를 밝혀보려는 연구가 있고 세제에 관한 연구를 통해 통일신라시기에 들어와서는 토지사유제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2. 고구려와 백제
우리나라 초기의 토지제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豪民(호민)ㆍ加계층의 대토지소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소규모의 토지를 소우한 자영농민도 있었겠지만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한 것은 아무래도 대토지소유라고 추측된다.
대토지소유는 주로 食邑(식읍)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공을 세운 장군에게 식읍을 하사한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이는 피정복지의 토지와 백성을 나누어주는 제도였다. 식읍민에 대한 식읍주의 수탈은 하호에 대해서보다 한층 가혹했는데, 식읍 이외에 賜田(사전)도 중여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전을 田主가 직영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수조권을 행사하는 녹읍의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이는 식읍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식읍이나 사전으로 인한 대토지소유가 제도로 정착된 것이 녹읍이라고 추정된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황실이나 귀족의 대토지소유 이외에도 일반 백성의 사유나 국가의 소유지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녹읍제의 성격과 그 운영원리에 관해서는 신라를 중심으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3. 신라
신라시대 귀족 관료의 경제적 기반은 祿邑과 官僚田 였고, 백성에게는 丁田을 지급했다. 먼저 녹읍 및 정전과 관련된 『삼국사기』 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문왕 7년(687) 5월에 문무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2) 신문왕 9년(689) 1월에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組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여 이로써 영원한 법식을 삼았다.
3) 성덕왕 21년(722) 8월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4) 경덕왕 16년(757) 3월에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주었다.
5) 소성왕 원년(799) 3월에 청주 거노현으로 국학생의 녹읍을 삼았다.
녹읍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으나 녹읍의 혁파와 부활을 전하는 위의 자료에서 그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사료 2),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녹읍은 신문왕 9년에 폐지된 바 있고 경덕왕 16년에 부활되었다. 그러므로 녹읍은 신문왕 9년이라 부르고 경덕왕 16년 이후의 녹읍을 후기녹읍이라 하는데, 그 이후에 녹읍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녹읍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관료전이 설치된 것은 신문왕 7년이었는데 이것이 신라의 토지제도상 획기적인 큰 사업이 었다는 점으로 보아 관료전의 지급은 녹읍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에 대한 경제적 조관리들이 받은 경제적 대우는 관료전과 매년 지급되는 組였을 것이다.
또한 녹읍이 부활되었을 때 관료전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관료전은 신문왕대이후 신라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의 녹읍 혁파는 戰功이나 高利貸 등을 통해 많은 토지와 백성을 私的으로 지배하게 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장기간의 전쟁으로 더욱 곤궁해진 소농민층을 보호하여 궁극적으로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경덕왕대의 녹읍 부활은 귀족세력의 강화와 왕권의 약화라는 정치적인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후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다.
현직관리를 중심으로 지급된 관료전은 전제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 기능은 미약했다고 추측된다. 관료전은 실제 그 토지로부터 큰 경제적 이득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는 관료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전제왕권도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관료전은 지방 하급관리의 경제적 대우 정도로 기능이 약화된 채 그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4. 맺음말
고대사회의 토지는 그 소유관계에 따라 國有냐 하는 논쟁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사유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토지소유관념은 독특한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사유와도 다르고, 사회주의적 공유와도 다른 그 중간 형태라 할 수 있다.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시행한 진보적 토지제도는 오래 시행되지 못하고, 8세기중엽의 경덕왕때에는 다시금 녹읍이 부활되고, 관료전이 폐지되었으며, 백성들에게 준 정전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통일후 귀족세력을 억제하려는 국가의 전제적 힘이 귀족들의 반발로 점차 무력해져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