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가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그가 등장한 1980년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시가 기왕에 쓰여진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달리 도시라는 공간의 생활과 풍물을 보다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따위의 소재적 변별성의 차원과는 다르다. 그 '서울'은 그의 삶 자체인 움직일 수 없는 토대로서 그의 시에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문학적 탐구가 자본주의 근대의 육체인 도시, 혹은 도시의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로 확대되는, 그런 공간이다.
서부 이촌동에 살고부터/(…중략…)/5톤, 10톤씩이나 되는 화물트럭들이 밤이나 낮이나 급커브를 돌면서/속력을 낸다. 특히 밤이면 널판때기 빈깡통, 사이다 빈병, 코카콜라, 헤드라이트 불빛./5톤, 10톤의 속도를 주체 못하는 가벼운 것들은 화물차에서 떨어져 내리고/내팽개쳐진 것들은 내팽개쳐짐의 속도로 내게 달려와/빈병은 빈병의 가벼운 속도와 무게로 바닥에 떨어져 튀는 유리조각은/깨어짐의 더 가벼운 반항으로 나의 무딘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내고/나는 밤길 거리에서 이유없이/전신을 두드려 맞는다/(…중략…)/무거운 화물트럭들은 눈앞에/이 어둠을 이해하지 못하고/수없이 내팽개치고 달아난 수많은 헤드라이트 불빛은/그냥 허공에 돌아갈 곳 없는 불꽃으로 남아/아닌 밤중에 온 천지는 소리만 요란한 불꽃놀이다/(…중략…)/더 나은 더 고도의 산업화에 밀려/화물트럭 헤드라이트의 홍수도 이제는 거대한 고층건물 도시계획에 밀려/서부 이촌동 강변도로 쪽으로 흘러왔다 슬픔의 서열이여 내 가슴의 뚜껑을 열지 못해/마구 두드려대는 슬픔의 펀치력이여/서부 이촌동 서민아파트 7층 꼭대기에/전세집과 허드레짐과 아내의 가여운 사랑을 살림으로 들여놓고부터/움직이고 흐르고 떠도는 것들의 슬픔이 너무 확연해/(…중략…)
― 「한강·둘」 부분
도시계획에 밀려 흘러온 서부 이촌동 강변도로의 화물트럭들, 화물트럭의 속력에 내팽개쳐지는 널빤지 빈병 따위들과 헤드라이트 불빛들, 그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그것들에게 두드려맞는 '나'의 모습을 도시의 삶의 '슬픔의 서열'로 시인은 제시하고 있다. 거의 모든 시의 질료를 자연과 농촌 체험, 그리고 농경적 사유에 의지해왔던 한국시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충격도 드물었을 것이다. (물론 나의 말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가령 김기림류의 모더니즘이나, 또는 5,60년대시에 나타나는 도시의 어떤 모습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도시'는 그 태반이 외래의 문학을 빌려오기 위한 하나의 수사적 공간이었다.) 도시에서의 소시민적 일상을 내보이는 김수영의 시들을 제외하면, 한국시는 김정환의 언어를 통해서 거의 처음으로 자본주의 근대의 공간인 도시에서의 '삶'을 체험했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김정환의 뒷세대인 기형도나 유하 등의 시들을 생각해본다. 도저해서 매혹적이기까지 한 죽음의 의식과, 길거리와 까페를 부유하는 대중문화의 현란한 이미지들, 그 도시의 세계가 나에게는 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움직이는 실체와의 문학적 싸움으로 보이지 않고, 과장된 포즈가 그려내는 절망이나 냉소로 다가올까. 도시에서의 노동과 생활이 빠져버린 언어에는 생생한 고통이 없고, 그 고통으로 하여 현실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게 된 자의 경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모든 풍경이 풍경으로 머물지 않고
처절한 근본적 참여를 연습하는
정녕 껍질을 벗는 순간!
― 「빈대 걸음마」 부분
한국시에서 지식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된 예는 매우 드물다. 물론 그 지식인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로 세계를 이해하여 비판과 부정을 통해서 더 나은 세계와 삶으로서의 전망과 그 의미를 묻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그런 지식인의 모습이 시 속의 구체적인 형상과 진술로 나타난 경우를 찾자면 아마도 김수영과 김지하의 시들이 그것에 해당될 것이다. 김수영의 시에서는 서구식 '자유'의 의미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좌절되는 과정을, 김지하의 시에서는 '조선사상'이라고 불릴만한 사유의 전개과정을 우리는 보게 되거니와, 전통적 서정과 외래형식의 실험을 되풀이해온 한국시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시인들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내 곁에 둘 수도 없고/버릴 수 없네, 꽃은 새가슴 새근대는 향기를 지니고/연약한 허리, 하얀 허벅지를 지니고/흔들려/(…중략…)/그러나 내게는 때꾹젖은 입술이 있어/거칠은 호흡, 열매를 바라는/숨가쁜 욕망 피비린 혁명이 있어/꽃에게 줄 것은, 순식간에, 짖눌러 부숨./그러나 꽃과 나 사이엔 식민지가 있어/분내 나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성병이 있어/칼날 숨긴 유혹과, 도취와, 타락과, 메스꺼움과, 아름다움과, 지배, 피지배…(중략)…
― 「다시, 꽃」 부분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의 아내/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어쩔꺼냐고, 일순 기차는/덜컹대고 그 틈에/핑 돌던 것이 흩뿌려/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중략)…/사랑은 차창 밖에 있지 않다/오늘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몸과 몸을 섞듯이/몸을 섞으며 덜컹덜컹 달리듯이
― 「기차에 대하여·23」 부분
총성이 울리고, 신화가 깨졌다. 그리고 당분간 역사가/드러난다. 그럴 뿐이다. 지리멸렬이 이제사 드러난다/그럴 뿐이다 우리는 깨진 거울 파편을 줍는다/우리는 무엇, 생애는 가장 간절하고 아름다운 그 무엇?/눈물이 옷을 벗고 더 날카로운 눈물을 드러내는/그 틈새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또 돌아가신다
― 「총성과 신화」 전문
꽃과 기차, 거울은 사실 우리 시에 매우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꽃-아름다움, 기차-동력 혹은 추억, 거울-자기성찰 따위 소재와 의미의 등식관계는 지나치게 교과서적이어서 별다른 흥미나 긴장을 자아내지 못 한다. 김정환의 시들은 그것에 의지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크게 벗어난다. 꽃은 식민지화된 미학이라는 의미를, 기차는 변혁운동의 동력이라는 의미를, 그리고 거울은 텍스트로서 주어졌던 사회주의라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김정환 시의 예외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시들에서 우리는 현실의 어떤 구체적 정황도, 자연적 배경도, 서사도 볼 수가 없다.(그의 모든 시들이 이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는 정황이나 배경이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시집 『황색 예수전』이후부터 그런 경향은 현저하게 자취를 감춘다.) 굳이 찾아내자면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 정도가 구체적 정황을 알려주는 매개가 되고 있다. 김정환의 시들은 대단히 낯선 방식으로 현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감상이나 직관, 또는 구체적 경험이나 이야기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쓰기의 전략으로부터 그의 시는 멀리 떠나 있다.
김정환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양'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선 그의 시들은 역사 혹은 현실의 문제를 자신의 세계관 또는 지적 사유를 통해서 충분히 이해한 후에 씌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사유의 과정이 내면화되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민과 고통이 축적될 때 시의 몸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그의 글쓰기가 행해진다는 말이다. 딱히 외부의 어떤 정황이나 배경을 빌리지 않고서도 그의 시가 메마르거나 앙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 어떤 시보다 서정이 넘치는 것은 그 고통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거친 호흡'과 '날카로운 눈물' 또는 '비린내' 등 그의 시의 감각이 거기서 생생해지거니와, 시 「다시, 꽃」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도처에서 관념적 시언어와 서정적 시언어가 부딪치며 격렬한 갈등의 정서를 내뿜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쯤에서 나는 80년대 후반에 시비평이 그의 시에 대해서 보여 주었던 어떤 태도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의 시에 민중성 또는 현장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사실 자체로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시의 시들이 보여준 민중생활의 소박한 재현이나 또는 정치주의적 선동성으로의 지나친 편향을 생각해볼 때 앞에서 말한바 김정환시의 경향이 매우 소중한 것으로 다가온다. 문학으로서든 운동으로서든 지성의 빈곤이 자초한 그 몰락과 전향이 지금도 나를 끔찍하게 한다. 시집 「우리, 노동자」가 간행된 1989년 이후 일정기간 동안 김정환의 시 또한 그 정치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회의와 비판과 부정으로서의 지적 사유와 문학을 견디지 못 한 80년대 현실이 강제한 또 다른 반동이었는지 모른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한국시가 보여준 다양한 표정과 제스추어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김남주 시의 탄식이었다. "파도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김남주는 그러나 자신의 질문의 뼈아픔만큼 시적 사유를 펼쳐내지 못하고 병마로 쓰러졌다. 아마도 지극히 예외적으로 그 질문의 근간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지켜내면서, 그리고 90년대 문학의 주류 명제인 지난 연대와의 '단절'을 거슬러 치받으며 사유의 통로를 헤쳐온 것은 김정환의 시일 것이다. 물론 그에게도 절망은 컸다.
처음 보았다/시청 분수대 위로 파란만장하게/눈이 내린다 누더기/소련연방이 해체된다 프라자호텔 위로/낭자한 것이 치솟는다/찬란하게 외투자락이 흩날린다 얼굴에/와 닿지 않고 몇십년 흔들리는 눈이/내리지 않고 허공에 외친다 오 나는/붙들 것이 현실밖에 없다…(중략)…
― 「첫눈」 부분
시집 『희망의 나이』의 시들 전체를 축약하고 있는 풍경이다. 그 풍경을 비극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허공에 뜬 채 자신의 처지를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다. 흩날리는 눈은 해체되는 사회주의 실체로서의 소련과 겹쳐지고, 그 때 눈은 더 이상 시인에게 어떤 의미나 의지가 되지 못 한다. 그리고 그 눈이 허공에 있는 것은 지상에서는 발길에 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눈은 그러나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패배로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이 내리고 그것조차 배경이 되었다"는 진술이 울림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략)…/내 가슴 속 인적마저 왜 이리 드문가/나는 기다림만으로 황폐해
져갔던/그리고 뻔뻔스럽게 그것을 옹호했던/역사가 반복될까봐 두렵다
― 「인적」 부분
…(중략)…/역사상 쓰렸던 모든 패배들이 현실에서 중첩되고/스스로 무거워하고 있다/…(중략)…/깃발을 어디서 찾는가 깃발은 드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묻고 또 묻는 것이다
― 「전사」 부분
…(중략)…/나는 안다 깊은 곳일수록/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튼튼하게 한다/나는 안다 찬란한 것은 아직 비명의/소리의 화려한 껍데기일 뿐이다
― 「첫눈」 부분
…(중략)…/그렇다 내겐 아직 새로운 변증법이 없다/…(중략)…/그렇다 누릴 것이 없다면 당분간/우리는 역사를 음미해야 한다 움직일 수 없다면/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움직여 왔는가를/발바닥에 더 두껍게 느껴야 한다/…(중략)…/오 다음 세대는 실패하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나는 명멸할 것이다 더 단호하게
― 「죽은 자 通信」 부분
사회주의라는 텍스트를 상실한 후 거개의 한국시들이 하나같이 보여준 절망의 포즈를 생각해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정환 자신이 보여준 위기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위 인용시들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가 성취한 수직적 상승의 높이를 기억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그의 시는 추락한 채 으깨어지지 않았거니와, 도리어 그 숱한 절망들을 "비명의 소리의 화려한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텍스트와 이론에 의지해서 세계를 의해했든, 또는 경험과 감성에 의지해서 전망의 동력을 구했든 그 어느 쪽도 '현실'을 감당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기이하게도 김정한의 시적 사유는 '현실'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김정환 시의 대답이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부분은 시 「첫눈」의 "깊은 곳일수록 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튼튼하게 한다"라는 구절이다. '무너지는 것'에 대한 성찰,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바쳤던 '이상'과 그 와해의 전과정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야말로 자신의 삶과 사유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과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패배의 의미를 의식화하는 과정, 즉 패배의 또 다른 육화가 될 것이다. 이제 과거는 그의 말대로 '망'했을망정 '단절'해야 될 기억이 아니며, 그렇다면 패배는 현실을 이루는 어떤 의미로 된다. 역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세대는 실패하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나는 명멸할 것이다"와 같은 시구절이 보여주는 의지가 억지가 아닌 간절함으로 다가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시집 『순금의 기억』에 와서 김정환의 시들이 펼쳐보이고 있는 것은 죽음과 폐허의 세계이다. "민간인 시체가 나뒹굴고 군인들이/어린애처럼 울고 있다."(「게르니카」), "그래 전쟁이 오고, 우린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자궁 속으로, 여자의 性器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아 지겨워라. 진흙창, 불모와 성년의, 쾌락이 없고/살기뿐인"(「참호전」), "피투성이로, 그렇게 핏덩이로 뒤엉켜 급기야/공포의 얼굴이 스스로 공포를 뛰어넘고 어떤 운명의/처참을 이룩했다."(「권투선수」)등의 단장들이 진술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은 참으로 끔찍하다. 역사 또는 현실의 추악한 이면이자, 동시에 그것을 수락하는 시인의 내면풍경일 그 세계 앞에서 시인의 태도는 그러나 담담하기 짝이 없다. "당연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럴 뿐이다" 따위의 시어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도저한 비관적 태도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의 시는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시 「죽음의 전화」의 "부디 견딜 수 없는 죽음만 轉化,電化하기를"이라는 구절과, 시 「순금의 기억」의 "온몸이 몇천만 도로 타면 시체의/기억을 태워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닌, 순금의 기억"이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의미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앞구절에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나는 그 빈 공간에 '역사와 현실의 추악함'이란 말을 채워넣는다. 역사와 현실의 추악함을 견딜 수 없는 죽음, 혹은 추악함으로 더럽혀져 더는 견딜 수 없는 현실과 역사. 견딜 수 없다면 어떤 다른 것으로 바뀌어야 하고, 바뀌기 위해서는 시인이 꿈꾸는 어떤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 시의 끝머리에 "검게 반짝이는 우물"이란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앞구절의 의미와 연관하여 뒷구절을 읽으면 그 의미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죽음의 덩어리인 시체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것, 그 속에는 그것의 일부인 나의 삶도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純金'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것,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물"과 "순금"은 동의어가 된다. 세계에 대한 비관의 도저함도, 그것에 대한 담담함도 죽음/탄생의 변증법을 열어가는 통로였던 셈이다.
최근 김정환은 새로운 시집 『해가 뜨다』를 펴냈다. 그 시집에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깊이 의식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어떤 세계를 보게 된다. 시인이 "영원"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그 세계의 의미가 나에게는 모호하지만, 시집 『희망의 나이』 이후 죽음에 그토록 매달렸던 그의 시가 고투 끝에 다다른 지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 되셨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다
― 「금딱지 롤렉스」
매장. 관이 닫히고 땅이 닫히고 이상하다 내 안으로
열리고 또 열리는 미궁이 편안하다
― 「발인과 매장」
시집 『희망의 나이』에서 "투쟁을 겪고 우리는 그것과 다른 전사가 되었다/아버지와 다른 산전수전의, 어머니와 다른 애정의"(「전사」)라고 말했던 시인의 발언에 비하면 현격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그 변모는 '아버지의 죽음'과의 관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 「동기동창」을 보면 "여관용 에로물"을 찍는 영화감독인 자신의 친구, 혹은 그 친구의 삶과 세계를 별 갈등없이 시인은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그는 매우 유쾌한 주석을 달고 있다. "이렇게 애매하고 혼탁하게 늙어가는 것이 아연 신기하고 즐거워서다/그렇게 또 모종의 경계가 깨진다"
김정환 시의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계 혹은 현실과의 화해? 아니면 그의 초기시에 드러난바 있는 "어떤 눈물도 설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웃음일 것 같기고 한"(「탈」)탈의 세계로의 회귀? 그의 시 「나의 母校」를 살펴보자.
그 시에서 화자인 나는 학창시절을 보낸 모교를 찾는다. 그 낡은 건물을 보면서 가을마다 낙엽을 흩뿌리는 고목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자신의 모교가 단순히 세월을 이기지 못 하는 건물이나, 또는 옛날을 묵새기는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걸어와" 현재를 살고 있고, 또한 미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로 이어지면서 빛 바래는", 그런 장소인 것이다. 과거/현재/미래 따위의 경계는 '나의 삶'속에서 無化된다. 경계가 사라지면서, 다함께 살아 있은 시간.
그렇다면 역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시의 화자인 나는 지배이데올르기를 상징하는 매스컴과,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식의 세계를 생각한다. 그 세계에 의하면 가령 8·15해방은 기쁨이지만 일제의 악몽과 '단절'되며, 6·25 한국전쟁은 전쟁의 비참이면서 또한 '정반대의 의미'인 기념비가 된다.
잔재는 늘 비극적으로 이어진다.…(중략)…
비극은 늘 善惡의 2분법과, 혁명을 혼동한다. 매스컴도
그렇다.
…(중략)…
그 사이 나의 母校가 있다.
절벽을 품은 따스한 기억의 예술처럼
김정환 시에 의하면 경계와 단절 그리고 대립으로서의 사유는 '혁명'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삶과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나의 母校' 즉 김정환의 사유는 단절의 사이에서, 경계의 사이에서, 대립의 사이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질의 어떤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어떤 분명한 이름을 명명하지 않겠다. 그 어떤 이름도 '절벽을 품은 따스한 기억의 예술'이라는 진술의 감동에 이르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