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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인생 나루'
1967 아세아레코드
한우정 작사 심성락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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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인생 나루' 1967 아세아레코드
한우정 작사 심성락 작곡
배호의 초기 노래로 전자 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한 심성락 곡으로 반주에 그의 오르간 연주가 들어가 있다.
언제나 그리운 배호님
저는 배호님 너무 사랑한 나머지
녹음 창창 숲길 우거진 길따라
가노라면 돌아가신부모님
거기에 옵션으로 배호님 생각납니다
그곳다른 저세상에선 이리 아름다운곳에
계시겠구나 아픔도 고통도 없는 그런천상에♡~~~
2021.7.10 화풍(akekdthkl200)
배호 裵湖 (배신웅 裵信雄) 가수
출생-사망
1942년 4월 24일 - 1971년 11월 7일
데뷔
1963년 1집 앨범 [두메산골]
수상
2003년 옥관문화훈장
1967년 MBC 10대 가수상
20대에 요절한 불멸의 가수 배호(裵湖)는
1942년 4월 24일 아버지 배국민과 어머니 김금순의 장남으로 중국 산둥성 지난 출생했다.
본명은 배만금(裵晩今)이며, 아명(兒名)은 배신웅(裵信雄)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은 대한광복군 제 3지대 중사 출신의 독립 운동가였으며, 광복 이후 배호가 3살 때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광복군이 대한독립을 실현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어진 조국을 통탄하며 술로서 세월을 보내다 1955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하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의 부재는 남은 가족들의 큰 고통이다.
이후 배호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부산에 있는 이모의 집에서 살다가 부산 삼성중학교 재학중 중퇴하고
먹고 살기 위해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배호의 외삼촌 김광빈(1922.10.4.~2008.12.1.)의 집으로 가게 된다.
(배호라는 예명도 이때 김광빈이 지어주었다.)
배호는 외삼촌 김광빈의 수하에서 대중음악을 시작하여 김광빈 악단의 드럼 주자로 미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 이후 1958년부터 삼촌 김광수, 김광빈 악단, 미군 부대, 동화, 천치 카바레, mbc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12인조 밴드를 결성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는 1963년 만 21세의 나이에 예명 ‘배호’로 데뷔해 명곡 ‘굿바이’를 불렀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했고,
너무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목소리가 성숙해서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게 패션을 연출했다
그가 선보인 중절모에 양복차림, 선글라스로 무장한 패션은 중후한 40대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트로트 곡 돌아가는 삼각지가 히트하였고 그는 곧 1960년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자리 잡게 된다.
사실 배호는 1966년 신장염에 걸렸으며, 1967년 병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후 배호는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10대 가수에 선정되는 등 그의 앞날은 창창했다.
그러나 그는 1966년부터 앓아온 신장염으로 꾸준히 고통을 받고 있었고 건강이 채 회복될 틈도 없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몸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방송사들이 수여하는 가수상을 휩쓸었던 배호는 타계 할 때까지 쉬지 않고 신곡을 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심지어 휠체어에 의지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며 활동하던 1971년, 배호는 라디오 출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비를 맞게 된다.
이 때문에 감기몸살에 걸린 배호는 쓰러지게 되고 여기에 복막염까지 합병증으로 겹쳐
1971년 11월 7일,
어머니 김금순, 누이동생 배명신, 작곡가 배상태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타계하였다.
당시 배호가 사망할 때 나이가 29세에 미혼이었다.
사실, 대구 공연에서 만난 여성팬과 약혼까지 했는데, 배호가 임종 직전에 약혼녀와 '눈물의 파혼'을 해야 했다.
배호의 곡은 다분히 트로트의 문법을 차용해 만들어진 곡이었지만,
배호가 불렀기에 그저 그런 트로트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발산했다.
배호 목소리의 최고 장점은 심장을 파고드는 저음이었다.
다시 말해 저음에서 풍겨나오는 나직하고 감미롭고 중후한 느낌은 살아있으되
절대 억지로 짜낸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느낌이 추가된 최상의 발성이었다.
‘돌아가는 삼각지’ 이후 배호의 음악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이후 발표한 곡마다 히트를 펼치며 1960년대 최고 인기가수 대열에 배호를 밀어 올렸다.
그런데 탄탄대로였던 음악 인생과 달리 배호는 속으로 점점 쇠락해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배호가 20대의 나이에 신장염 요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 당시는 한미한 의학 수준으로 그가 앓던 신장염은 목숨을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바쁜 스케줄로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무리를 했으니 병이 악화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태워 노래와 목숨을 맞바꾼 셈이었다.
병색이 완연해진 배호는 노래를 부를 때 숨이 차서 호흡이 짧아지기도 했는데, 음 사이 사이마다 배호가 힘겹게 내뱉고 들이마시는 숨소리마저 음악이 되어 노래를 더 짜릿하고 신비롭게 만들 정도였다.
대중들은 배호의 목소리에 열광했다.
1971년 11월 7일 그가 죽은 후 장례식장에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흐느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최희준, 현인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과 어머니,누이동생이 참석했고, 이날 장례식에서는, 돌아가는 삼각지 등 고인을 대표하는 히트곡과 함께 유족들과 동료들, 스승들의 서글픈 흐느낌만이 울려 퍼졌다.
묘지는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있다.
배호의 유족도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배호가 돈 벌어서 사준 집이나 여러 재산도 이후 유족인 어머니와 정신질환자였던 누이동생이 잃어 버려 가난 속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호는 스물한 살인 63년 ‘굿바이’로 데뷔, 가수 생활 내내 투병생활로 사투를 반복하다가
71년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이 결국 유작이 되었다.
배호는 1981년 실시된 MBC 특집 여론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 6월 '광복 60년 기념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국민가수 10인'으로 선정되었다.
2003년 10월 옥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삼각지의 한 거리가 ‘배호길’로 명명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20대의 가수 배호는 세대를 아우를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건 단순히 그의 외모가 노숙했거나 나이가 들어 보이도록 패션을 연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설이 된 배호는 신장염에 복막염까지 앓는 중에도 박자, 음성에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음정을 선보였던 그 정신이 아닐까...
죽음 앞에서도 노래하던 불멸의 가수 배호. 29년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흐느끼듯 꺽꺽거리는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60년대 절창 차중락·배호의 너무 이른 죽음
생전에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차중락과 배호,
1968년.11월에 별이 되어 떠난 중요 가수들이 의외로 많음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11월 괴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3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가수는 유재하와 김현식, 김정호와 최병걸 이전에도 60년대를 풍미했던 차중락과 배호가 있다.
차중락과 배호는 생전에 서로를 아꼈던 친구라는 점에서는 유재하와 김현식과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2018년 50주기를 맞은 차중락은 1968년 11월10일에 27살의 나이로, 배호는 1971월 11월7일에 29살의 꽃다운 2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파를 날렸다.
밴드 ‘키보이스’의 리드보컬 출신인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된 건장한 체격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철없는 아내’로 솔로로 독립한 그는 동양방송(TBC)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사랑의 종말’의 빅히트로 1967년 TBC 남자
최고신인가수상의 영예를 안고 음악 인생의 정점을 내달렸다.
인기 가수가 된 뒤 바쁜 활동과 잦은 스캔들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차중락은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10일. 서울 동일극장 무대에서 그는 고열로 쓰러지며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차중락은 사망 직전에 가을 시즌을 겨냥한 ‘낙엽의 눈물’ 등 5곡이 수록된 신보를 1968년 8월25일 발표했다.
이 노래들이 유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요절로 제작사인 유니버살레코드사는 급하게 유작 음반으로 포장해 재발매했다.
초반 타이틀 <차중락의 새노래>는재반에서 <마지막 남기고 간 차중락의 새노래!>로 수정되었고,
타이틀곡도 ‘낙엽의 눈물’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사망 직전 발매했던차중락의 유작 초반과 재반
(1968년 유니버살레코드).
짧은 솔로 가수 생활 동안 차중락이 남긴 곡은 20여 곡에 불과하다.
당대 대중의 선택은‘사랑의 종말’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었지만,
그는 ‘마음은 울면서’와 ‘그대는 가고’ ‘철없는 아내’를 각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철없는 아내’는 70년대 후반 산이슬 출신의 박경애가 리메이크해 또다시 히트했다.
하지만 2004년 박경애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노래를 녹음한 가수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징크스를 남겼다.
1969년 인기 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별이 된 차중락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더욱더 퍼져갔다.
1주기를 즈음해서는 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요절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까지 제정되었다.
그해에 가장 뛰어난 남녀 신인 가수에게 주는 ‘낙엽상’의 1회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었다.
심지어 1970년에는 그의 히트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같은 제목으로 그의 짧은 일생을 그린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더불어 차중락과 관련된 영화가 2편이나 동시 기획되는 충돌까지 일어났다.
차중락의 최대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로 급부상했던 배호였다.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로 스타덤에 오른 배호는 1970년까지 4년 연속 문화방송(MBC) 10대가수에 선정되며
히트곡마다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는 전성기를 누렸다.
1971년 10월20일 방송된MBC 음악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이다.
방송 후, 가을비를 맞아 감기 몸살에 걸렸던 배호는 11월7일 병세가 악화돼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생할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배호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11월8일. 라디오의 정규 뉴스 방송 시간에 배호의 노래가 흘러나와 청취자들은 방송 사고로 여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른 장례식 후 경기도 장흥의 장지로 향한 운구 행렬에는 많은 여성 팬이 소복을 입고 따라가 화제가 되었다.
현재 노래비가 없는 차중락과 달리 배호는 경기도 장흥의 묘소에 ‘두메산골’을 시작으로 서울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강원도 주문진에는 ‘파도’, 경주시 현곡에는 ‘마지막 잎새’ 등 8개의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팬이 많다.
가수 장사익은 “아무리 불러도 배호의 ‘필’을 못 좇아가겠다”며 그의 가창력을 극찬했다.
배호와 차중락에게는 노래 제목과 연관된 공통점이 더 있다.
‘가수는 자신의 노래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가요계의 속설에서 배호는 벗어나지 못했다.
드러머 출신의 무명 가수로 출발했던 배호의 데뷔곡 제목은 묘하게도 ‘굿바이’였다.
사망 직후에 발매된 유작의 제목도 이별을 암시하는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0시의 이별'은 ‘통금인데 0시에 헤어지면 어떡하냐’는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기도 했다.
늘 병마와 싸웠던 배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오히려 먼저 별이 되어버렸던 차중락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히트곡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고 유작 또한 노래 제목에 낙엽이 들어간 ‘낙엽의 눈물’이다.
1988년 11월22일 새벽에 남성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의 리더 강병철은 행사를 마치고 봉고차를 타고 귀가하던 경인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중이던 30대 경찰관의 승용차와 부딪히면서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발표한 삼태기의 음반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1992년 등장한 남성 힙합 댄스 듀오 ‘듀스’의 멤버 김성재는 타고난 춤꾼으로 그룹의 패션과 콘셉트를 담당했다.
그룹 해체 이후 1995년 컴백했던 23살 청년은 방송 출연 다음날인 11월20일 새벽에 호텔 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처음 경찰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인을 발표했으나 타살 의혹이 제기되며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남겼다.
1995년 발매한 듀스의 마지막 정규 음반인 3집은 게이트 폴드LP로 소량 제작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예계 전체로 증폭되었던 ‘11월 괴담’과 관련해서는 11월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집중되면서
바쁜 일정과 심리적 이완 현상이 커진 탓에 긴장감이 풀려 사건 사고가 많다는 분석이 있었다.
또한 프로야구 등 중요 스포츠 시즌이 끝나면서 각종 언론이 연예 관련 뉴스로 관심을 옮기면서 사건들이 부풀려진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올 11월은 아무 사고 없이 지나가 모두가 한 해를 멋지게 정리하는 12월을 맞이하길 바란다.
2021.7.10
[출처] 배호의 비나리는 경부선 - 영상음악|작성자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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