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내용은 없고, 한문 원문은 빼고, 해석문만 옮겨 봅니다.
정약용은 '탁리국'을 아는군요.
북부여의 수도를 '개원'으로 생각하는군요.
북부여와 백제(부여)는 헥갈리기 쉽죠.
(AD 연도 표시는 제가 넣은 것)
졸본(卒本)이란 네 부여 중 하나이며, 곧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첫 터전이다.
〈백제사〉에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이 또한 나라 이름이다.】 부여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졸본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이가 바로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온조본기〉에서 나온 내용이다.】
○ 정약용이 살펴보건대, 부여에는 네 종류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북부여(北部餘)이다.【지금의 개원(開原)이 바로 그 옛 땅이다.】 《후한서》, 〈위지〉, 《진서》에 모두 본전(本傳)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그 사실과 전말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지금은 다시 적지 않는다.
다만 위수(魏收)가 지은《위서》에서는 '주몽의 증손인 막래(莫來) 때에【고구려 모본왕이다.】 비로소 부여를 정벌하여 마침내 영토로 복속시켰다'라고 하였고, 《북사》와 《수서》도 모두 이를 따랐다. 만약 그렇다면 북부여가 고구려에 통합된 것은 한나라 광무제 건무 말년(건무: AD25년~AD56년)의 일이어야 한다.【건무 24년(AD48년)에 모본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후한서》에 이르기를 '헌제 때(AD189년~AD220년)에 북부여 왕이 현도군에 복속하기를 청했다'라고 하였고, 〈위지〉에는 '정시(正始) 연간(AD240년~AD249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부여왕이 군량미를 공급해 주었다'라고 하였으며, 《진서》에는 '무제 태강 6년(AD285년)에 모용외가 부여를 습격하여 깨뜨리자 그 왕 의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 남은 무리를 찾아내어 나라를 다시 복구하게 했다'라고 하였다. 이 두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 보면, 《魏書(위서)》와 《北史(북사)》의 설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의 〈구려사〉에 근거해 보면, "문자명왕 3년(AD494년)에【남제 소란 건원 원년】 부여왕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 그 이듬해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부여가 물길(勿吉)에게 쫓겨났다'라고 했다." 하였다.【《북사》에서도 이르기를, "정시 연간(AD504년~AD508년)에 선무제가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불러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에서 나는데 지금 부여가 물길에게 쫓겨났습니다'라고 했다" 하였다.】 북부여가 망한 것은 탁발씨 북위의 경명 4년(AD503년)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두 번째는 동부여(東夫餘)이다. 〈구려사〉에 이르기를, "북부여 왕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옮겨 가 살며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 하였다.【이미 〈예맥고〉에서 보였다.】 가섭원이란 우리 제국의 강릉(江陵)이다. 홍만종이 '동부여가 압록강 가에 있었다'라고 한 것은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 세 번째는 졸본부여(卒本夫餘)이니, 곧 고구려의 첫 터전이다.
그 네 번째는 사비부여(泗沘夫餘)이니, 남부여(南夫餘)라고도 부른다. 지금 백제의 옛 도읍인 부여현이 바로 그 땅이다.
또 살펴보건대, 《후한서》와 《위략》에서는 모두 '북부여의 시조 이름은 동명(東明)이다'라고 하였고, 이상한 기운이 서리고 돼지우리에 버려졌으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진서》에는 이 말이 없다.】
그런데 《위서》와 《북사》에서는 모두 이것을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일로 삼아, 햇빛이 비추고 개와 돼지가 지켰으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설을 실었다. 김부식 또한 《북사》를 따라 이를 〈주몽본기〉에 실었다. 그리고 주몽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그 이후로 우리나라 역사를 쓰는 이들은 관례적으로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왕'이라 일컬어 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 동명왕은 원래 북적(北狄)인
탁리국(索離國)에서 난을 피해 부여로 도망쳐 오면서, 신비롭고 괴이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인 것이다. 북부여가 이미 망하자, 고구려 사람들이 그 신성하고 상서로운 이야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고, 가만히 그 말을 훔치고 동명이라는 이름까지 찬탈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과시한 것이다. 중국에서 역사를 편찬한 이들은 고구려인들이 말한 바에 따라 역사책에 기록한 것이니, 그 황당한 말은 굳이 많이 변박(辨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동명'이라는 두 글자가 명백히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졸본의 옛 땅은 지금의 흥경(興京) 경계 안에 있으니, 《위서》에서 말한 바 흘승골성(紇升骨城)이 바로 이곳이다.
《위서(魏書) 고려전(高麗傳)》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동남쪽으로 도망치다가 큰 물을 만났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었다.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거처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불렀다.”라고 하였다.【《북사(北史)》도 같다】
○ 〈구려사(句麗史)〉에 이르기를 “주몽이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 그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험고한 것을 보고,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으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졸본은 대개 한나라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자, 요나라[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다. 《한서(漢書) 지리지[漢志]》에서 말한 바 현도군의 속현인 고구려현이 바로 이곳인가 한다.” 하였다.
○ 정약용(丁若鏞)이 살펴보건대, 졸본의 옛 땅은 요컨대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동남쪽, 두 줄기 강물을 건너는 곳에 있다.【개원은 옛 부여이다】 이제 살펴보니 개원현 남쪽 10여 리에 청하(淸河)가 있는데, 이는 점니하(占泥河)의 하류이자 서쪽으로 대요하(大遼河)로 흘러드는 강이다. 주몽이 처음 도망칠 때 추격하는 기병이 뒤를 쫓았으니, 이른바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았다는 곳은 지금의 청하수(淸河水)가 바로 그것이다. 또 이른바 보술수라는 것은 청하를 건너 동남쪽으로 200여 리를 달려 첨정산(尖頂山) 북쪽에 이르면 한 가닥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데, 바로 지금의 혼하(渾河) 상류이자 녹하(綠河)의 하류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이른바 비류수라는 것은 지금의 흥경(興京) 북쪽에 다섯 줄기 강이 합류하여 흥경을 감싸고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흐르며 소자하(蘇子河)가 되어 서쪽으로 혼하에 들어가는 곳이 바로 그것이다. 다섯 강이 서로 가까이 있어 어느 것이 비류수인지 알 수 없으나, 요컨대 졸본은 지금의 흥경 북쪽 강을 사이에 둔 땅이니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
○ 또 살펴보건대, 고구려현(高句驪縣)은 본래 진번(眞番)의 부족이었다. 한나라 소제(昭帝) 때(BC75년)에 현도군을 지금의 흥경 경계 내로 옮겼으니【상세한 것은 〈현도고(玄菟考)〉에 보임】 고구려현은 마침내 현도군의 속현이 되었으니 내가 말하는 ‘북현도(北玄菟)’가 바로 이것이다. 그 뒤에 또 현도군을 요양(遼陽)의 서쪽으로 옮겼으나 고구려현은 따라 옮겨가지 않았으니 내가 말하는 ‘서현도(西玄菟)’가 이것이다. 김부식이 졸본을 《한서 지리지》의 고구려현으로 본 것은 맞지만, 현도군이 요나라 동경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김부식이 서현도를 북현도로 오인했으니 어찌 오류가 없겠는가. 서현도는 본래 북부여의 신남쪽에 있었다.
여러 역사책에서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동남쪽으로 걸어서 졸본에 이르렀다고 한 것을 (그의 주장대로라면) 또 어떻게 해설하겠는가.
○ 또 살펴보건대, 주몽이 먼저 졸본을 얻었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琉璃王) 말년에 이르러서야【왕망(王莽)의 때】 비로소 군사를 전진시켜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고 비로소 국호를 고구려국이라 정했으니, 졸본이 고구려현과 비록 서로 멀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성은 아니다. 김부식이 졸본을 곧 고구려현으로 본 것 역시 잘못이다.
고구려가 졸본에 도읍한 것은 실제로 40년에 지나지 않으나, 오직 시조의 사당[始祖廟]이 그곳에 있었다.
〈구려사〉에 이르기를 “유리왕 22년에【한나라 평제 원시 3년(AD3년)】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였다.
○ “국조왕(國祖王, 태조대왕) 때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곧 유화부인의 사당】에 제사 지냈다. 신대왕(新大王) 때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하였다.
○ 정약용이 살펴보건대, 신대왕 이후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고국원왕,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당나라 고조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이것으로 보건대 고구려가 존속한 세대 내내 졸본은 고구려의 국가적 성지(京邑)였으니, 이는 마치 진(晉)나라의 곡옥(曲沃)과 같은 곳이다.【《북사》에 이르기를 “고구려에는 음사(淫祠)가 많은데 신묘(神廟)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으로 나무를 깎아 부인의 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인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하였다.】
그런데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이르러 갑자기 지금의 성천(成川)을 비류(沸流)라 일컫더니, 그 후로는 마침내 성천을 졸본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구려사〉에 이르기를 “주몽이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채소 잎사귀가 물을 따라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채고 찾아가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서 보고 더불어 싸웠다.【줄임】 2년에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성주로 봉했다.” 하였다.【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 비로소 왕비로 삼았다】
○ 정인지의 〈지리지〉에 이르기를 “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고려 현종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별호는 송양【성종 때 정함】이며 온천이 있다.” 하였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르기를 “성천부(成川府)는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북부여로부터 와서 졸본천에 도읍했는데,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