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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제9기 성지순례 안내 봉사자 강의 요지문(2006년 2월 13일 월요일)
제5강 :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교회 선교 사명
한원식 신부 / 새남터 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교회 선교사명
한원식(요한) 신부 / 새남터 성당
서 론
1831년 로마 교황청은 한국천주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 교회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이미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채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박해를 받아왔으며 외국인들의 입국 또한 엄격히 통제받고 있던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결과로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모두가 프랑스 인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의 복음전파는 신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문화권 속의 전통사회의 변동과 새로운 물물이 들어온 개화기의 사회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 논고에서는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펼친 활동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진출과 관련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프랑스 대혁명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나라에 진출한 과정, 한불조약의 의의들을 간략히 살펴본 후에 조선의 대내외적 상황 속에서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고창하고 그 영향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
1) 파리외방전교회
파리외방전교회는 1659년에 창립된 전교단체로서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표하는 성직자들의 모임이다. 이 단체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를 쇄신하고 전교사업을 활발하게 수행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직접적인 복음선교활동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 시기에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러 종교적으로 포교상의 ‘보호권’을 내세워 복음전파활동에서 상당한 우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1622년 교황청에 포교성성이 생겼는데 이 성성의 취지는 전 세계 포교지를 총괄하고 포교지의 조속한 자립을 촉진하려는 데 있었다.
1664년에 파리외방전교회는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구사제 뿐만 아니라 선교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선교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1664년 샴의 수도 아유티아에서 포교지역 총회를 개최한 후, 로마의 지시를 따라 그들 휘하의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와 사목에 관한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프랑스 국가가 지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파리외방전교회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는 로마교황청 포교성성의 제의에 따라 선교사 영입을 간절히 원했던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진출은 서구 제국의 팽창주의와는 무관하며 인류 복음화라는 지상의 목표를 수행하고자 하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선교사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영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명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였다.
2)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외방전교회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을 비그리스도교화를 표방하였으나 도리어 종교에 혼란만 가져왔고 제정(帝政)은 종교를 국가에 예속시키려 하였으나 스스로 전제에 떨어지고 말았으며, 왕정복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왕이 도리어 국가를 교회에 봉사케 하려 하였다.
프랑스대혁명은 무엇보다도 성직자의 지적 빈곤을 가져왔다. 즉 종교교육에 대한 정부 당국의 적의로 신학교가 폐쇄되었고, 정교조약이 채결되자 신학교가 재건되기 시작하였으나 국가의 보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정규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없었다. 또한 19세기 초에 우세하였던 낭만주의적 분위기는 가톨릭시즘에 감정적인 종교성을 더해 줌으로써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직자들은 지적빈곤의 상태였다 하더라도 신앙과 도덕면에 있어서는 모범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전반적으로 지적으로는 부족한 상태였으며, 박해와 가난을 통한 시련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허약한 요소를 제거하고 강한 성성과 용장을 키우게 하였다.
3)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 과정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의 교우들이 교황께 보내는 1827년의 서간과 함께 욍삐에르 신부의 의견서를 받아 읽은 포교성성은 곧 한국의 선교를 홀로 책임지고자 하는 수도회를 물색하였다. 처음에 시도한 예수회와의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에 현재 북경교구의 사정으로는 한국교회에 아무런 원조를 줄 수 없으니 이 지방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이었던 랑글로와 신부는 당장 결정적 대답을 할 수 없으므로 여유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포교성성에 회답하였다. 신부 수의 부족, 불충분한 재력, 한국입국의 곤란, 동회 모든 주교들의 승인 등이 문제였으며, 이를 위해 우선 마카오 주재 동회 경리부장으로부터 한국입국에 관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또한 한국을 전담하는 일에 대하여 동회 전 주교들의 의사를 타진하여야 하는 까닭에 시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일원이며 샴 교구 부족으로 방콕에서 포교에 종사하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단독으로 한국의 선교를 자원하게 된 사실은 그때까지 미결로 정지상태에 들어갔던 한국포교전담 문제를 재연시키고 이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으며 나아가서 로마로 하여금 한국 교구를 설정케 하는 동기를 만들었다. 당시 포교성성의 장관이었던 까뻴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으로 피선된 이후, 1831년 9월 9일 조선포교지를 조선교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의 어려운 길을 3년 동안 개척한 끝에 1835년 10월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곧 그 길을 따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명이 조선입국에 성공하였고 잇달아 2명의 선교사가 입국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이 경정되면서 1866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이전까지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수는 22명이었다.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를 주교는 3년간의 갖은 고생 끝에 만주에서 순직하였고, 그 뒤를 이어 입국한 3명의 선교사들도 곧 순교하였으며, 그 후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서 9명이 순교하였다. 1866년에 살아남은 선교사는 불과 3명이었고 나머지 선교사들도 헌신적인 봉사로 말미암은 과로로 대개는 젊은 나이에 순직하였다.
2. 한불조약(1886년) 이전의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
1) 조선의 상황과 대외적 상황
조선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대화의 여명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는 신분제의 급격한 붕괴 현상을 겪고 있었다. 신분제의 붕괴는 양반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가는 현상에서 먼저 드러났다. 또한 경제적으로 볼 때에도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농업경제의 분야에서 심화되는 농업문제 내지는 농촌문제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상공업분야에서도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져 공인자본을 위시한 상업자본이 등장하고 있었으며 이 상업자본의 일부는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상계에 있어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실학사상이 발흥되었던 것이다. 이 실학사상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민중계의 욕구에 의해서 출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교회 형성을 위해 선교사들의 영입에 노력하였다. 이로써 신자들의 선교사 파견 요청에 따라 1827년 로마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교구 창설을 위임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의 선교사로 자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3년에 걸쳐 만주까지 와서 조선입국을 시도하던 중 병사했다. 그 뒤를 이어 모방신부는 1836년 1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프랑스인이 되었으며, 이어 이듬해에는 샤스탕 신부와 제2대 교구장 앵베를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이미 6천명의 조선인 신도와 함께 조선에서의 프랑스 선교사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년(1839)의 대박해로 조선인 신도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정부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 그들의 극동함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구실을 얻게 됨으로써 그들의 식민제국주의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함대의 조선원정 계획에 때를 맞추어 1845년 9월 병오 박해시기에 이미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충청도 강경에 밀입국하여 10월에는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박해시기에 프랑스 신부는 살아남았으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이러한 박해사실을 세실 제독 등 프랑스 극동사령관에게 알리면서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나폴레옹 3세 때에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베르뇌 주교가 다른 2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완화되어 계속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함대 파견은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 프랑스정부는 조선에 대해 관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조선의 새 집권자 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방위대책을 새롭게 하면서 1864년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의 접근을 예방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묻기도 하였다
2) 선교사들의 활동 상황
제3세계가 서구사회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체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복음은 이들 사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 가치체계에 대해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여러 형태의 사회, 문화활동과 이들에 의해 운반된 서양문물은 전통적 생활양식을 갖고 있던 이들 사회의 문화변동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고아구제사업과 노인구제사업을 전개하였고, 시약소를 설립하였으며, 신학교 설립과 해외 유학생 파견, 인쇄사업 등을 통해 인적 자원의 양성과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피선교지 사회에서 대부분의 선교 방법은 복음을 통해 피선교지의 기존 문화를 정복하거나 변혁시키려는 일종의 ‘문화우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달랐다. 한국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서방의 외침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시작된 선교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내재적 요구와 한국인의 자주적 노력에 의해 수용되었다.
한국교회의 창립은 이들의 지적 노력이 신앙적 열정으로 전환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가졌던 실천적 관심이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으로 바뀐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용한 동기 속에는 이를 통해 사회질서를 개편하고 근대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현실적인 측면이 포함되었다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창립자들은 초기부터 사회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표출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선교사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앵베르(Imbert, Laurent Marie Joseph, 1796-1839): 성인, 한국명 범세형, 제2대 조선교구 교구장,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제2대 교구장으로 중국 사천성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1837년 5월 14일 카프사의 명의주교로서 조선교구의 주교로 성성되어 조선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도착하여 이튿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13일 후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주교가 되었고 한국교회는 조선교구 창설 6년 만에, 조선교회 창설 53년 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입국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 수가 9,000명을 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서둘러 이미 모방 신부에 의해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교육받게 한 바 있으나, 다시 세 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한편, 정하상, 이신규 등 4명의 성인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일본에도 전교의 손길을 뻗치고자 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일어난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한국에 입국한 지 불과 2년여 만에 순교하였다.
② 페레올(Ferréol, Jean Joesph, 1808-1853): 제3대 조선 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838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 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서만자에서 앵베를 주교의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양부로 가려 하였지만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 31일 만주교구의 베롤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성성식 후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 온 김대건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그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충청도 나바위에 도착하여 조선입국을 시도한 지 6년 만인 1845년 10월 12일에 조선입국에 성공하였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김대건 신부를 잃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1851년 거듭된 박해와 1만여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선종하였다. 그는 제3대 교구장으로서 조선 입국이래 8년 동안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선교회를 소생시키는데 큰 공을 남겼다.
③ 베르뇌(Berneux, Siméon François, 1814-1866): 제4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장경일. 프랑스 르망교구 소속 샤또 뒤 르와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837년 5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은 후 르망 대신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1년 베트남의 통킹에 도착하여 전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2년간의 옥살이 끝에 구조되었고,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교구에서 12년간 전교하였다. 1854년 만주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이해 12월 27일 주교로 성성되고 이듬해 다시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후 10년간 조선교구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배론에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이외에도 교세확장 등 조선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고 잡혀 1866년 2월 23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④ 다블뤼(Daveluy, Mariw Antoine Nicolas,1818-1866): 성인, 한국명 안돈이.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프랑스 아미앙에서 태어나 이시와 생슐피스 소신학교를 거쳐 1841년 1년 반 교구사제로 활약한 후 1843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몇 달 동안의 수련을 거쳐 1844년 2월 류우꾸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고국을 떠나 1844년 9월 말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를 만나 그의 요청으로 조선 선교사에 임명되어 그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 1845년 7월 하순에 상해로 갔다. 때마침 이 곳에 온 김대건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여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라는 작은 포구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1866년 3월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9년)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가장 능통하였다. 황산포에 도착하여 주교는 서울로 올라가고, 자신은 강경지방에서 조선말을 배워 이듬해 1월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서양인 성직자의 입국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그는 박해를 피해 더욱 외딴 곳으로 숨어 다니며 전교에 힘썼다. 한편 교황청으로부터 성모무염시태를 조선교회의 새 주보로 받게 되었고, 또 그동안 성모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자 파리에 본부를 둔 성모성심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1846년 11월 2일 충청도의 ‘수리치골’(현 공주군 신풍면 붕갑리)에서 교우들과 같이 미사를 올리고 조선에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였다. 또 2년 뒤에는 신학생들의 지도를 맡았다. 1853년 그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 주교를 잃었으나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전교에 더욱 힘을 쏟았으며 틈틈이 한한불자전을 편찬하였다. 또 조선사 연표를 번역하고 교우들을 위해 교리서와 신심서를 번역, 저술하였다. 1857년 3월 25일에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보좌주교로 선출되어 서울에서 아콘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순교사’의 편찬이었다.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하여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본부에 보내는 한편 조선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에 피리에 보냄으로써 후세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후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저술되었다. 1861년에 그는 경상도 지방에서 전교하였는데 외교인들의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다. 1865년부터는 내포지방에서 활약하였으나 1866년에 들어서면서 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그 해 2월 2일 베르뇌 주교가 먼저 잡혀가고 그도 3월, 전교 중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도 보령의 수영으로 압송되어 3월 30일 참수를 당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의 부주교로서, 그리고 베르뇌 주교의 순교 후 조선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51일 만에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죄직지’, ‘영세대의’, ‘성찰기략’이 있으며, ‘신명초행’, ‘천주성교예규’, ‘성교요리문답’, ‘천당직로’ 등도 그가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⑤ 리델(Ridel, Félix Clair, 1830-1884): 조선 제6대 교구장, 한국명 이복명. 1830년 7월 7일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하였고 1857년 12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85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61년 3월 31일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를 만나고 곧 충청도 공주의 진밧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썼다. 그러던 중 병인박해로 인해 두 주교와 7명의 동료신부를 잃게 되었으나 리델 신부는 다행히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살아남은 페롱, 칼레 신부와 의논하여 박해로 인해 주교와 여러 성직자를 잃은 조선교회 사정을 알리고 새로이 성직자를 청하고자 탈출하여 1866년 7월 7일 중국 치푸에 도착하여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즈 제독은 칼래외 패롱 신부를 구출코자 3척의 군함을 이끌고 9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오게 되니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이 후 리델 신부는 다시금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이 조선교구에 배속된 여러 신부들과 함께 일본, 만주 등 여러 곳을 찾아 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1869년 6월 25일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잠시 조선입국 시도를 중단하고 한불자전의 완성과 교리문답 책을 편찬하는 데 전심을 쏟았다. 1876년 9월 23일 황해도에 상륙하는데 성공 조선을 떠난 지 11년, 주교로 임명된 지 8년 만에 서울에 들어와 전교를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교회 형편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전하다가 발각되어 주교의 입국사실이 탄로나고 1878년 1월 28일 잡혀 5개월 동안 옥중에 갇혔으나,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의 교섭과 중국 정부의 주선에 의해 6월 5일 옥에서 풀려나 7월 12일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간 코스트 신부에게 맡겼던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이 완성되자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인쇄하여 1880년 말과 1881년 봄에 걸쳐 두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블랑 신부를 보좌주교로 선정하고 그 해 11월 고향으로 되돌아가 1884년 6월 20일 54세로 선종하였다.
⑥ 메스트르(Maistre, Joseph Ambroise, 1808-1857): 한국성 이(李), 1832년에 신부가 되었고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하여 임지를 기다리는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떠났다. 조선 잠입을 위해 10년 간을 고생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드디어 1852년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에 도착하여 입국에 성공,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기에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 주교가 올 때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 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를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 외교인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지만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구제사업을 시작하였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자 양성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 배론에 성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의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3. 한불조약 체결과 의의
1880년대 접어들면서부터는 서양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조선 연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미 통상을 트고 있던 일본, 청국도 서양과 통상하기를 조선정부에 권고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0년 이후로 이미 서양의 나라를 물리칠 수 없게 된 정세를 알고 교섭을 시작하였다. 서양나라 중 첫 번째로 우리나라와 관계를 맺게 된 나라는 미국이었다. 1882년 제물포에서 김홍집과 수펠트가 만나 14개 조항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후 한영, 한독수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비로소 종교에 관한 조문을 넣게 되었다.
불란서 정부는 1886년 조선에 들어와 조선정부에게 천주교의 자유로운 전교를 허락하고 교우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103년 후의 일이고, 조선교구 창설 57년 만의 일이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온지 52년 만의 일이었다.
한불조약의 약정에 따라 천주교 성직자들은 전국 각지로 영행하면서 공공연하게 전교활동을 시작했고, 교회를 짓기 위해 또는 신부 주관으로 건축을 위해 토지나 가옥을 매입하게 되면서 지방관청과 민인(民人)들 사이에 분쟁이 빈발해졌다. 궁지에 몰리는 교회의 협조 요청을 받은 프랑스 공사는 1888년 10월 외위문에 대하여 개항장에서의 토지매입만 허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활동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유력 명지에 대해서도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보장명문을 요구하고 나아가 조선인의 천주교 신앙생활을 자유로이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 안에서 1889년 3월에 전국 13개 관찰사에 교민의 보호를 훈령하였다. 이 교령은 조선정부가 지방관에게 교민보호를 시달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행정지시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호조치에 관한 행정지시였기에 신교 자유를 위한 발전적 가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에 걸쳤던 천주교 박해정책 하에서 생겨난 천주교에 대한 의구심과 박해의식, 그리고 고질화된 박해의 사회기풍이 한 건의 조약문이나 한 장의 훈령으로 일시에 해소되거나 청산될 수는 없었다.
4. 한불조약 이후의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1886-1910년경까지)
1) 조선의 상황과 대외적 상황
개화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여러 측면에서 선교사들이 사회, 문화 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더욱이 1886년 한불조약이 채결된 이후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봉행위와 선교사들의 활동이 보장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당시 점증되던 개화물결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당시 개화 사상가들은 과거 서학의 과학과 기술 분야는 수용하되 서학의 윤리나 종교분야는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북학파 실학자들의 소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온건 개화사상의 현실적 모순을 과감하게 개혁하려는 혁신적 세력이었다. 특히 신사유람단과 맥을 같이 하는 급진개화파들은 서구문물의 매개체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중에는 더 이상 사회통합의 기능을 행하지 못하는 유교주의보다는 서구사회에서 근대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판단되는 프로테스탄트의 수용이야말로 쇠약해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선교단체는 곧 ‘개화의 힘’이 도리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식 계급의 태도 변화는 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의 사회, 문화활동을 촉진시키는 중용한 동인과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발전가치였던 개화, 부국, 자강, 애국계몽과 같은 이념들은 선교사들의 사회, 문화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1880년대 이후부터 일제시대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한국사회와 교회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사회가 요청하는 근대화와 민족의 독립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한국사회의 현 실태로 등장하도록 하는 데에 일정한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한국의 사회변동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였다.
2) 선교사들의 활동 상황
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
이미 프랑스 선교사들은 르네상스와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의 역사적 체험 안에서 신학을 전공하였고, 비록 당시 프랑스 교회가 처한 상황 때문에 철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지녔던 지식과 자국에서의 체험은 한국 사회발전에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근대문명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다방면에서 깊은 통찰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개화기에 이르러 보다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불조약 이후에 어느 정도 자유를 얻게 됨으로써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다. 지속적으로 서구의 문물과 지식을 보급하는 한편, 고아구제와 고아위탁입양사업, 의료시술소와 시약소의 설치, 신학교의 설립, 인쇄소의 설치, 각종의 출판사업, 언론사업, 산업기술지도, 예방의료활동 등 한불조약 이전보다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필요한 각종의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활동한 선교사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블랑(Blanc, Jesn Marie Gustave, 1844-1890): 제7대 조선교구장. 한국명 백규삼. 1866년 12월 22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왔다 그곳에서 병인박해로 두 주교를 잃고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를 만나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 10년 동안 리델 주교를 도와 교리책의 번역과 ‘한불자전’의 편찬으로 세월을 보냈다. 1876년 리델주교가 추방되자 1882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전교에 힘써 1887년 말에는 14명의 성직자와 14명의 신학생, 일만 오천여 명의 신자를 갖춘 교회모습을 이루었다. 1888년 6월 8일 조선교회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며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써 1885년에 강원도 부흥골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페낭 유학생을 비롯한 신학생을 수용하였고 2년 뒤에는 용산으로 옮겼는데 그 때 신학생은 21명이었다. 고아와 노인을 위한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1885년에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40여명의 노인과 100여명의 고아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여 4명의 수녀를 파견 받아 그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대지를 사들여 1887년부터 종현성당을 짓게 되었고 1890년 2월 2일 감사미사를 드렸고 주교관을 지으려 하다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2월 21일 46세로 선종하였다.
② 뮈텔(Mutel, Gudtave Charles Marie, 1854-1933): 대주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877년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에 머물면서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를 정리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을 견학하여 후에 한국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에 도움을 주었다. 1880년 11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척사윤음이 공포된 때라서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와 기록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에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다가 한불조약이 체결된 이후인 1890년 8월에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뒤테르트르, 샤르즈뵈프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에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박해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연히 하기위해 예수성심 신학교, 종현성당, 약현성당을 준공시키는 이외에도 각 지방에서의 분당 창설을 많이 지원해 주었다.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순교자 현양과 한국교회사의 정립, 순교복자 시복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저서 중에서 ‘뮈텔문서’를 보면 1886년의 한불조약, 1894년의 동학혁명, 갑오경장, 항일의병모금사건, 1895년 을미사변, 1896년의 아관파천, 1898년의 명동대성당 준공, 보부상과 황국협회의 천주교인 위협사건, 1899년의 교민조약 및 천주교인들의 황성신문사 난입사건, 1900년의 의화단사건, 1904년의 한․물․러 비밀 3국 동맹 및 선교조약, 1905년의 울릉도 영유권 분쟁, 1909년의 교회운영학교 인가에 대한 정교분쟁 등과 많은 교민, 정교분쟁의 내용이 들어있고 1910년 이후 문서들은 교회내의 사목관계가 대부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근대 한국의 정치, 사회, 사상, 외교사 연구와 한불조약 이후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 동학과 천주교, 1880년대에서부터 1920년대까지의 교회모습 등 근대 한국교회사를 재조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③ 코스트(Coste, Eugéne Jean George, 1842-1896): 한국명 고의선. 프랑스 몽타르노에서 태어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66년 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868년 6월 6일 사제서품을 받고 프랑스를 떠나 파견되었다. 2년간 홍콩에서 경리를 맡아본 후 1870년에 싱가포르로 가서 2년간 요양소 건립에 종사하다가 1874년 상해로 건너가 경리일을 맡아보았다. 1875년 11월 21일 청원이 허락되자 곧 한국으로 가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리델 주교가 오래전부터 작업해 오던 ‘한불자전’의 인쇄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요꼬하마로 건너가 한국어의 자모를 주조하여 ‘한불자전’간행에 착수, 1880년에 출판하였고 이어 그 이듬해에는 한국어의 문법책과 천주성교공과를 출판하였다. 그 뒤 리델 주교에 의해 나가사끼에 조선교구의 경리부가 설치되자 경리부장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쇄일을 맡아보던 중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되어 한국에 입국한 후 약현과 종현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교회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또 인쇄소를 나가사끼에서 한국으로 옮겨와 한국어로 된 30여권의 책을 찍어냈다. 이렇듯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 그는 말년에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다 1896년 선종하였다.
④ 드망즈(Demange, Flerian, 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 한국명 안세화. 프랑스 로렌지방에서 태어나 독불전쟁으로 인해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8년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6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1899년 부산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포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덕을 겸비한 인품으로 1년이 채 못 되어 1900년에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양성에 전심하던 차에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라는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과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은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다. ‘경향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부록으로 ‘보감’도 발간하여 교리와 교회사에 관한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 교인들의 신앙과 새생활을 교도하는 데 큰 공을 남기었다. 1911년 대구교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주교는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⑤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1859-1915): 대구교구 선교사. 1885년 8월에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에서 풍습과 언어를 익혔으며 모국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하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박해가 사라져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에 정착하였는데 그때가 1891년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폐허가 된 교회재건에 노력하였고,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자 큰 성당을 짓기 위해 절약하여 전동성당을 건립하였다. 이 성당은 나중에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는 헌신적인 봉사로 모든 것을 바쳤으며 1915년 5월 27일 선종하였다.
⑥ 로(Raux, Nicolas Joseph, 1860-1902): 한국명 노약망. 프랑스 에농에서 출생. 1887년 2월 1일에 제물포에 도착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해 7월 당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맡게 되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교인들을 모아 구월산 기슭에 4개의 교우촌을 만들어 새롭고 희망에 찬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계속 확대하려 하였으나 1888년 가을에 병을 얻어 홍콩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어 돌아와서는 평안도 지방의 전교를 맡았으며 학교를 세워 한글을 가르치는 등 문맹퇴치운동과 교육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892년에는 원산으로 발령받았으나 병이 재발되어 서울로 돌아와 용산신학교장에 임명되었다. 헌신적인 그의 노력으로 용산 신학교는 놀랄 만큼 발전하였다. 1900년 부산으로 전임된 그는 콜레라로 1902년 선종하였다.
⑦ 타케(Taquet, Emile, 1873-1952): 한국명 엄택기. 프랑스 루르드 출생. 1897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되어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밀양, 김해, 진주, 마산 등지에서 전교했고 1902년부터 1916년까지는 제주도와 전라도의 목포, 무안, 장성, 영광, 함평, 해남, 완도 등을 전교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식물의 수집과 연구로 식물학계에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남쪽의 도서, 특히 제주도에서 식물을 수집하여 유럽박물관으로 보냈는데 그중에서 제주도의 왕벚꽃등은 유명하다.
⑧ 빌렘(Wilhelm, Nicolas Joseph Marie, 1860-1938): 한국명 홍석구. 188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3년 2월 17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3월 28일 페낭으로 떠났다. 이때 페낭 신학교에는 한국인 신학생 21명이 유학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5년간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교육에 힘썼다. 1888년 조선교구로 배속되어 1889년 2월 황해도 지방의 전교를 맡아 매화동, 신천의 청계동에 성당을 건립하고 진남포에도 성당부지를 마련하는 등 교세확장에 노력하였다. 교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자연 토착민과 마찰이 생겼고, 그의 곧고 과격한 성격은 관과도 마찰을 일으켜 ‘해서교안’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항상 한민족의 편에서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는데 그가 세례를 준 안중근을 음양으로 도와주었고,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자 그를 찾아가 격려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찾아가 고백성사를 베풀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신자로서의 마지막 길을 걷게 하는 등 여러 모로 항일 민족 운동을 도왔다. 이는 뮈델 주교의 뜻을 거스른 것이었고, 다른 신부와의 불화로 1914년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알사스에서 1938년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될 당시 파리의 한국인 대표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5. 종합적 평가: 한국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불란서 성직자들 중에는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신학적 지식과 함께 근대문화에 폭넓은 지식을 가진 분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박해라는 외적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이 한국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제5대 교구장이던 다블귀 주교는 ‘한한불자전’을 저술하고 ‘동국역대’를 번역하는 등 한글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그가 파리로 보낸 교회사 자료들을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뿌르띠에 신부는 ‘조선어 연구’와 ‘러한한사전’을 탈고하고 한국의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등을 연구하여 식물 표본의 일부를 파리에 보내기까지 할 정도로 인문과 자연과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는 신자들에게 상업, 농업, 공업 등에 관한 기술 지도를 할 정도로 근대산업 전반에 대한 지식을 지녔으며, 고아구제사업도 활발히 추진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박해 속에서 빈곤과 무지로 인해 사회개발 사업을 전개하지 못했던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사업과 활동을 추진함으로써 근대화에 공헌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한국인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였기에 이들은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박해시대의 각종 경험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본격적인 사업과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은 개화기 때에 사회복지사업과 교육사업, 문화사업, 산업진흥운동 등 활발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영향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 ‘교우’라고 부르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계급으로 이루어졌던 봉건적 계급제도를 타파하는 일에 이바지하였으며, 천주교라는 참된 종교를 전파함으로써 미신행위를 배격하는 일을 일으켰다. 또한 남녀의 동등권을 인정하여 유교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른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축첩제도를 부정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한국순교성인 103위중에서 성직자 11명, 남자 평신도 45명, 여자 평신도 47명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사회 안에서 어린이와 여자는 완전한 의미의 인격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교회는 그들도 존귀한 존재임을 역설하였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여성과 어린이의 사회적 가치를 밝혀 주었다.
② 사회 자선사업: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박애정신으로 불우한 동포들을 구제하는 일을 일으켰다. 프랑스인 성직자들은 1858년부터 서양의 의약을 얻어다가 주요 도시에 설치된 약국에서 환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양육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③ 신학교 개설: 프랑스 성직자들은 신학생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1837년부터 3명의 老신학생을 국내에서 교육하다가 1839년 일어난 박해로 모두 순교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입국한 성직자들은 1854년부터 6명의 신학생을 교육하다가 1858년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배론에 신학교를 두어 10여명의 신학생을 교육하고 1885년에는 강원도 원주 부흥고로 옮겼다가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1887년에는 서울의 용산으로 옮겨 오늘의 가톨릭대학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④ 교회 서적의 출판: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한문사용을 폐지하고 교회서적을 오로지 한글로 편찬하여 국문전용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58년부터는 교회서적을 목판에 새겨 출판하는 일을 일으켜 1863년 말까지에는 8종 13책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⑤ 문화의 보편화: 근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문화의 보편화 현상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 사회 문화에서는 한문을 매개로 한 지배층의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는 한글의 가치를 공헌하고 교리의 한글번역을 시작하였고, 한글 교리서를 보급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⑥ 서구생활양식 도입: 선교사들이 영입되고 해외에 유학생이 나가고 천주교 의식의 집행으로 말미암아 서양의 생활양식이 차차 한국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의식주의 양식은 한국식을 따랐으나 교회의식은 계속하여 서구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여기에서 생활양식이 도입되었다.
⑦ 한국문화의 해외소개: 한국에 들어온 성직자들은 성직활동을 수행하면서 교회창설 이래 거듭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교회를 발전시켜 온 역사적 사실과 순교자들의 행적과 한국의 지리, 역사, 정치, 풍소, 문화 등을 수록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냄으로써 한국의 상황을 외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⑧ 교육사업과 근대문화의 보급: 일반적으로 1885년에서 1886년에 걸쳐 감리교에서 설립한 배제학당과 이화학당을 최초의 근대적 학교로 보고 있으나 이미 천주교에서는 1884년에 서울에 한한학원을 설립하여 처음으로 국어를 가르쳤고, 이듬해 원주 부흥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하고 국어와 함께 외국어도 가르쳤다.
대체로 교회의 교육사업은 대부분이 개신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비해 빈곤자를 위한무료교육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운영난으로 일제시대 이후 정규적인 고등교육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천주교회의 교육사업은 초등교육을 중심으로 민중의 계몽을 위해 무료였고 민중발전을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그렇기에 소수 지식층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지방의 서민층을 위한 문맹퇴치와 대중을 계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은 이러한 긍정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① 영성회복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이들이 소속한 파리외방전교회는 당시 대표적인 선교단체였던 예수회나 도미니꼬회처럼 복음의 전파방법을 사회, 문화활동에 두었던 단체가 아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당시 변질되었던 선교방법의 탈피를 위해서 선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설립된 전교회였던 것이다. 이 전교회는 피선교지에서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고 본국인으로 하여금 교회를 맡게 한다는 것과, 선교의 순수 영적 특성을 회복한다는 것, 그리고 현지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거기에 적응함으로써 선교과정에서 파생할 수 있는 문화갈등을 방지한다는 것을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현실로부터의 초월, 엄격한 금욕생활과 고행, 경건주의를 강조하면서 현실세계는 무관심하게 바라보면서 내세에서의 복에만 관심 갖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전통은 영성을 강조하고 각국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창립정신과 전통, 그리고 18세기 말부터 프랑스교회와 한국교회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받았던 박해의 경험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난 결과였다.
②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뮈텔주교의 일기, 그리고 선교사들이 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박해기와 개화기에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많은 선교사들이 근대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 있었던 것은 신앙적 자유를 획득하고 보전하는 것과, 신앙이 위협받을 경우에는 순교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열정을 한국교회에 심어주는 것 이었다
③ 신자들의 지적능력과 경제적 상황: 선교사들이 아무리 사회, 문화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 내의 인적, 경제적 자원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추진될 수 없을 것이다. 초기 가톨릭 운동의 주도계급은 소장실학자인 양반계급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반국가적인 행위로 단죄를 받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신앙을 포기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신자들의 관심이나 능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빈곤하고 무식한 상태였으며, 그러한 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재원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수동적인 반응만 나타냈다. 이들은 사회 문화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자주적인 개발의식과 참여의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박해의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경건주의, 엄격주의, 내세에 대한 강조 또 그들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문화 우월주의적 태도가 신자들의 이러한 태도를 갖게 한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30여 년에 걸친 성직자 영입에 대한 신자들의 열망과 박해과정을 통해 강화된 응집력, 그리고 천주교회의 강한 위치적 성격은 어떤 면에서 선교사들이 사회, 문화활동을 하는데 유리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박해로 인해 신앙을 표출시키지 못한 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생활을 해야 했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성직자들은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기에 한국교회를 보다 강건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신자들의 수동성, 비자주성, 비자립성, 내세주의 신앙 그리고 빈곤과 무지로 인한 참여능력 결여 등은 한국교회가 시행하는 각종의 사업과 활동을 프랑스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④ 서구적인 방법의 사회, 문화활동: 그들이 전개하였던 각종 사업의 방향과 방법은 한국사회에 적합하다기보다는 서구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결 론
프랑스 선교사들은 19세기라는 일대 변혁과 격동의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복음의 일꾼들이며 본연의 선교사명을 충실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숨어 옮겨 다녀야 했으며 드러나게 활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이 들어왔고, 교회의 복음을 통한 의식개혁이 일어났으며, 한글연구와 우리의 문물을 외국에 소개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책을 편찬하고, 고아사업과 양로사업, 교육사업을 미약하게나마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 보았듯이 그들의 장점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한계점에 대해서는 직시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반성하고 현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